꺽정이가 수교를 노리며 쫓아나가다가 한번 뛰어 수교 뒤로 넘어가서 바른팔을 잡아젖
히고 칼을 뺏었다. 장교와 사령들이 이것을 보고 쫓아올 때 꺽정이는 벌써 칼을
쥐고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하였다. 꺽정이가 삽시간에 장교 사령 이십여 명을
치는데, 치는 것은 칼등이라 사람은 하나도 상치 아니하였으나 치는 곳은 바른
팔이라 병장기를 모두 떨어뜨리어서 옥문에 기대서서 구경하던 황천왕동이가 땅
에 떨어진 칼과 창을 집어다가 한옆에 모아놓았다. 장교와 사령들이 슬금슬금
뒤를 빼려고 드는 것을 꺽정이가 보고 소리를 질러서 도망질들을 치지 못하게
한 뒤에 “인제 꺽정이를 함부루 건드리지 못할 건 알았소?”하고 수교를 바라
보니 수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저기 또 한 패가 오는구려.” 황
천왕동이가 소리쳐서 꺽정이가 앞을 바라보고 섰는 중에 새로 장교 사령 팔구
명이 쫓아들어오며 그중에서 꺽정이에게 인정 쓰던 나이 먹은 장교가 앞으로 나
섰다. “꺽정이 자네두 관령 거역하는 것이 큰 죈 줄 알겠지. 그만 것은 잘 알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인가. 아까 머리 풀구 앉았을 때는 차마 가자구 우기지 못
했지만 지금 여기까지 나온 바엔 거역 말구 곱게 가세.” “나 하나만 잡
아간다면 긴 말 아니하겠소. 그렇지만 일에 상관없는 내 처남까지 잡아간다니
사람이 비윗장이 갈라지지 않소.” “자네 처남은 잡아갈 것 없지. 가만 있게.”
하고 나이 먹은 장교가 수교에게 귓속말하고 와서 “자, 자네만 가세. 그대루 가
두 좋지만 관령이 그렇지 못하니 줄을 지구 가세.”하고 붉은 줄을 내밀었다. 꺽
정이가 옥 앞에서 잡혀서 관가에 들어갔을 때 날이 이미 어두웠었다. 군수가 저
녁 먹기가 늦은 까닭에 꺽정이를 잡아들여서 옥쇄장이에게 행패한 것만 대강 사
실하고 곧 장방에 내려 가두게 하였다.
이튿날 조사 끝에 비로소 장물에 대한 꺽정이의 초사를 받게 되었는데 군수는
꺽정이의 인물이 사내답게 생긴 것을 보고 백정의 자식으로 난 것을 아깝게 여
기는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네가 본래 양주 사람이냐?” “녜, 양주서 났소
이다.” “나이 올에 몇 살이냐?” “서른여덟 살이올시다.” “네가 백정의 자
식으로 푸주도 안하고 다솔 식구에 어떻게 사느냐?”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그럭저럭이라니 모호한 말이다. 분명히 말할 수 없느냐?” “남의 도움이 많
소이다.” “네 집에서 나온 주단 포목 등속은 어디서 생긴 것이냐?” “평양서
온 것이올시다.” “평양서 보냈어? 평양서 누가 보냈느냐” “수지국장사 서림
이란 사람이 보낸 것이올시다.” “서림이가 어디 사람이냐?” “광주 아전으루
경기감영 영리를 다니던 사람이올시다.” “경기감영 영리가 어떻게 평양 가서
토관을 다니느냐?” “평안감사께 신임을 받았답니다.” “서림이가 너하고 대
단 친하냐?” “녜, 친합니다.” “네 누이의 말은 물건들은 서울 양반의 댁에서
보냈다니 그건 거짓말이냐?” “물건이 올 때 서울편으루 온 까닭에 서울서 보
낸 줄루 잘못 안 모양이올시다.” “물건이 오긴 언제 왔느냐?” “재작년 섣달
과 작년 섣달에 세찬으루 왔소이다.” “촛궤두 평양서 온 것이냐?” “녜, 그렇
소이다.” “촛궤에 영부사댁 택호 쓰였든 것이 분명한데 네게 보낸 것이면 그
런 택호가 쓰였을 리 있느냐?” “택호 쓰인 것은 못 보았습니다. 글씨를 썼다
가 긁어버린 자국만 있습디다.” “네가 긁어버리기 않았느냐?” “보낸 사람이
그런 것을 보냈습디다.” 군수가 별로 까다롭게 묻지 않고 묻는 것을 그친 뒤에
“네 집 물건의 소종래가 네 말과 같은지 평양으로 알아보기까지 너는 갇히어
있어야 할 테니 그리 알아라.”하고 말을 이르니 꺽정이는 죽은 아비와 동생을
감장하도록 이삼일 말미를 달라구 사정하였다. 군수 생각에 꺽정이의 죄 있고
없는 건 나중 밝히면 드러나려니와 죄가 있다고 치더라도 상제 되기 전에 범한
죄가 상제 된 뒤에 발각될 때는 십악대죄 이외에는 다 속을 받고 내놓고 만일
속을 못 바치거나 안 바치려고 하면 백일거상시킨 뒤에 비로소 결벌하는 것이
국법이라, 꺽정이를 내놓아 죽은 아비를 감장하게 하는 것이 국법에 비추어서
합당할 듯하여 꺽정이에게 “네 정경이 가긍해서 특별히 사흘 말미를 줄 것이매
그 안에 감장하구 다시 들어와서 갇히게 해라.”하고 처분을 내리었다.
꺽정이가 집에 나와 보니 천왕동이는 임진을 나가고 죽을 꼴이 된 애기 혼자
집에 있었다. “오늘 아침에 옥에 갔다 왔느냐?” “어제 저녁에 밥을 가지고
갔다가 밥도 못 드리고 매만 맞았어요.” “옥사쟁이에게 맞았느냐?” “녜, 다
시 오면 다리를 분질러놓는다구 해요.” “밥 가지구 나하구 같이 가자.” 꺽정
이가 애기를 데리고 옥에 가려고 집에서 나설 때 사령 하나가 쫓아오며 “꺽정
이.”하고 불렀다. “무슨 일이 있소?” “어디를 가나?” “옥에 밥 들이러 가
우.” “그럼 마침 잘됐네. 지금 형방이 옥에 나오셔서 동생 송장을 받아가라구
부르시네.” 꺽정이와 애기가 사령 뒤를 따라 옥에 와서 꺽정이는 팔삭동이의
송장을 찾아내고 애기는 옥에 남은 세 식구에게 밥을 들이는데, 옥쇄장이가 형
방에게도 눌리려니와 꺽정이를 기탄하여 기광을 부리지 못하였다.
이날 점심때 천왕동이가 돌아오고 저녁때 이봉학이가 하인 하나 안 데리고 혼
자 오고 이튿날 낮에 신불출이가 돌아오고 밤에 박유복이가 서림이와 작반하여
같이 왔다. 유복이가 올 때 다른 두령들이 다같이 오려고 하고 더욱이 곽오주가
몸달게 오려고 하는 것을 일체로 못 오게 하고 급할 때 지혜를 빌려고 오직 서
림이와 같이 온 것이었다. 서림이의 온 것을 꺽정이는 의외로 생각하여 서림이
를 보고 의외라고 말하니 서림이가 웃으면서 “이번 액회 당하신 것을 귀기본하
여 말하자면 내 탓이라구 할 수 있는데 내가 안 와볼 길이 있습니까.”하고 대
답하였다. 실상 서림이가 유복이를 따라온 것은 유복이의 비위도 맞추고 꺽정이
의 환심도 사고 또 같지않은 의기도 보이려는 것이었다. 범절 없는 초종이나마
서림이 온 뒤에 비로소 두서를 차려서 상포로 수의 명색들도 만들고 상제의 상
옷도 지었다. 이튿날 점심때가 지난 뒤에 북망산 한모퉁이에 장사를 지내게 되
었는데 서림이는 먼저 가서 산지를 잡고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는 서림이를 따
라가서 산역들 하고 꺽정이는 아비의 관을 옆에 끼고 가고 신불출이는 팔삭동이
의 관을 지게에 지고 가고 이봉학이는 애기의 손을 잡고 관 뒤에 따라갔다. 평
토된 것을 보고 이봉학이는 산에서 바로 가는데, 갈 때 꺽정이에게 무슨 귓속말
을 하였다.
장사를 다 지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꺽정이가 새삼스럽게 통곡함을 마지 아니
하여 박유복이가 “형님 그만 우시우.” 황천왕동이가 “운다구 죽은 사람이 살
아오겠소. 고만 울구 갇힌 사람들 빼내 올 도리나 생각합시다.” 서림이가 “지
금 우시구만 기실 때가 아닙니다.” 또 신불출이가 “고만 진정하십시오.”하고
여럿이 말로 말리는 외에 애기까지 “아저씨 고만 그치세요.”하고 팔목을 잡고
흔들며 말리었다. 꺽정이가 곡을 그친 뒤에 서림이가 먼저 꺽정이더러 “앞으루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하고 물으니 꺽정이가 한참 만에 “아직 질정한 생각
이 없소.”하고 대답하였다. “아까 이별장이 갈때 무슨 말씀 합디까?” “나만
피하구 없으면 내 식구쯤은 자기 힘으루 주선해서 빼놀 수 있다구 나더러 피하
랍디다.” 꺽정이 말끝에 박유복이는 “그러면 됐소. 형님, 우리에게루 갑시다.
숨어 있기는 우리게가 좋지 않소.”하고 권하는데 황천왕동이는 “아니 그게 될
말이오? 옥에 남은 식구들이 모두 팔삭동이처럼 죽어나오게 되란 말이지. 말이
되우?”하고 타박하였다. 박유복이가 서림이를 돌아보며 “이별장 말이 유리하
지 않소. 서장사 생각엔 어떻소?”하고 의견을 물어서 서림이가 나직나직한 말
소리로 “황서방의 염려가 좀 과하긴 하나 그런 염려가 바이 없진 않소. 이별장
의 주선이 어련할 것 아니로되 그 주선이 도는 동안에 옥에 갇힌 사람이 몇 번
살는지 누가 아우? 사람의 목숨이 워낙 초로 같다지만 옥에 갇힌 사람의 목숨이
야말루 참말 초로 같소. 내 생각 같아서는 옥에 갇힌 사람들까지 아주 빼가지구
우리게루 가시는 게 제일 상책일 듯하우.”하고 대답하는 것을 꺽정이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더 좋겠소.” 박유복이가 말하고 “지금 그렇
게라두 했지 별수 있소.” 황천왕동이가 말하는데 꺽정이는 여전히 눈을 딱 감
고 있어서 천황동이가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형님, 어떻게든지 좌단해 말하
우.” 꺽정이가 천황동이의 말을 듣고 비로소 눈을 뜨고 애기를 보며 “저녁밥
곧 지어라.”하고 이르고 다른 말이 없었다.
꺽정이 앞에 세갈랫길이 놓여 있었다. 한 갈래는 식구들이 갇혀 있는 옥으로
들어가는 길이니 이 길로 가면 적어도 극변이나 원악도를 안 가지 못할 것 같
고, 또 한 갈래는 식구들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나는 길이니, 이 길로 가면 나중
돌아올 기약이 망연할 뿐 아니라 돌아오게 되더라도 식구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고, 마지막 한 갈래는 식구들을 옥에서 빼내가지고 청석골로 달아나는 길
이니, 서림이가 가르치고 유복이가 끌고 또 천왕동이가 권하나 이 길로 가면 막
이 적굴에 빠져서 도적놈으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 세갈랫길이 다같이 꺽
정이 마음에는 좋지 않았다. 도적놈의 힘으로 악착한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만
있다면 꺽정이는 벌써 도적놈이 되었을 사람이다. 도적놈을 그르게 알거나 미워
하거나 하지는 아니하되 자기가 늦깎이로 도적놈 되는 것도 마음에 신신치 않거
니와 외아들 백손이를 도적놈 만드는 것이 더욱 마음에 싫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6권 (19) (0) | 2023.04.01 |
---|---|
임꺽정 6권 (18) (0) | 2023.03.31 |
임꺽정 6권 (16) (0) | 2023.03.29 |
임꺽정 6권 (15) (0) | 2023.03.28 |
임꺽정 6권 (14) (0)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