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이가 중언부언 이해를 말하고 천왕동이가 조급하게 결정을 재촉하여도
꺽정이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 한마디가 없어서 사람이 좀 늘쩡한 유복이
까지 답답하게 생각하여 “당초에 말이 없으니 사람이 답답하지 않소.
대체 형님같이 과단성 많은 이가 오늘은 웬일이오?”하고 말하였다.
얼마 뒤에 꺽정이가 꿈꾸다가 깬 때와 같은 태도로 “서장사 말대루 할 테니
식구 빼내올 계책을 서장사가 담당하우.”하고 말하여 서림이는 선뜻 “그건
염려 맙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따루 할 일이 있소.” “무슨 일인가요?”
“이웃집에 버릇 좀 가르칠 것들이 있소.” “녜, 고발한 놈 말씀이지요.”
꺽정이가 한번 고개를 끄덕하였다. “내가 알아서 사람을 분배하오리다.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하실 텐가요?” “내던지구 가지 별수 있소.”
“아주 불질러 버리구 가면 어떻겠습니까?” “좋소.” “그러면 사람 분배를
이렇게 합시다. 박두령하구 황서방은 옥에 갇힌 사람을 끄내오시구
주인은 이웃집에 가서 할 일 하시구 나는 이 집에서 불을 놓구 신서방은 기집애
데리구 앞길에 가서 기다리구 있게 합시다.” 서림이가 꺽정이보고 말한 뒤에
유복이와 천왕동이를 돌아보며 “두 분 하실 일이 제일 중요한데 두 분으루 어
려우실 것 같으면 신서방까지 마저 가게 하겠으니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
그럴 것 없소. 옥문이라구 한번 발길루 내지르면 부서질 놈의 옥문이니까 파옥
하는 데는 나 혼자만 가두 넉넉하우.” 황천왕동이가 먼저 장담하고 “옥은 아
무리 허술하더래두 옥사쟁이 쫓아올 것과 다른 관속들이 쏟아져나올 것을 생각
해야 하지 않소.”하고 서림이가 말하니 “우리가 오래 지체되면 다른 관속들까
지 쏟아져나오게 될 테지만 옥이 허술하면 그렇게 오래 지체될 것두 없구 설혹
몇십 명 쏟아져나온다손 잡드래두 우리 둘이 처치할 수 있을 게요.”박유복이마
저 장담하였다. 대체 의논이 끝난 뒤에 여럿이 둘러 앉아서 저녁밥들을 먹는데
꺽정이도 여러 날 만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저녁상을 일변 치우며 곧 집안
세간을 뒤져서 가져갈 만한 물건을 짐을 만들었는데, 예전에 검술 선생이 준 장
광도는 다행히 집뒤짐에 들쳐나지 않고 벽장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꺽정이가 몸
에 지니려고 내놓았다. 땅거미 지나서 밖이 캄캄할 때 신불출이는 짐을 지워서
애기와 같이 먼저 떠나보내고 네 사람은 짚신 감발들까지 단단히 하고 일 시작
할 시각으로 작정한 정밤중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짐승까지 잠이 드는 정밤중이라 사방이 괴괴하였다. 때 되기를 기다리느라
고 애삭이던 황천왕동이가 “한밤중이 지났나 보우. 인제 고만들 일어납시다.”
하고 재촉하여 다들 같이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먼저 황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옥으로 가는데 옥을 깨칠 제구로는 천왕동이가 도끼 한 자루를 몸에 지닐 뿐이
고 관속을 대적할 무기로는 유복이가 댓가지 표창을 한 줌 가득 쥐었을 뿐이었
다. 옥으로 가는 패가 나간 뒤에 꺽정이는 한 손에 장광도를 빼어들고 최가의
집 사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갔다. 최가의 집은 아래윗간 방이 둘인데 최가
의 어미는 손자 형제를 데리고 아랫간에서 자고 최가 내외는 젖먹이 딸을 데리
고 윗간에서 자는 것을 꺽정이가 잘 아는 까닭에 대번 윗간에 와서 방문을 열어
젖혔다. “이게 누구야?” 새된 계집의 소리가 난 다음에 “엉, 웬일이여.” 얼
뜬 사내 소리가 나고 계집사내가 다 벌떡 일어 앉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었다.
꺽정이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어둔 방안을 들여다보며 “너의 연놈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있어서 우리를 고발했느냐!”라고 불호령하는 중에 최가가
도망하려고 살며시 아랫간 사잇문을 열었다. “이눔, 어디를 도망할 테냐!” 꺽
정이가 방안으로 쫓아들어가니 최가가 아랫간으로 뛰어들어가서 앞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꺽정이가 최가의 뒤를 쫓아나와서 삽작 안에서 칼을 쳤다.
아랫도리 발가벗은 최가가 삽작 앞에 쓰러질 때 최가의 계집은 속곳바람으로 봉
당에 나와서 고함을 치고 최가의 어미는 방문 밖에 머리만 내밀고 악을 쓰고,
또 최가의 자식들은 방안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꺽정이가 봉당 앞에 와서 “모
든 조화가 네년에게서 났을 테지. 네년두 죽어라.”하고 최가의 계집도 칼을 쳤
다. 꺽정이가 최가 내외를 죽인 뒤 피묻은 칼을 들고 밖으로 나올 때 서림이는
벌써 꺽정의 집 전후 좌우에 불을 질러놓고 최가의 집으로 달아왔다. “죽이셨
소? 죽이셨거든 아주 화장까지 지내줍시다.” 서림이의 말을 듣고 꺽정이가 삽
작께 있는 사내의 송장과 봉당에 있는 계집의 송장을 방에 집어넣는 동안에 서
림이는 앞뒤로 돌아다니며 집에 불을 질렀다. 최가의 어미와 자식들은 집 앞뒤
에 불이 돌 때까지 뛰어나오지 못하였으니 필경 불 속에서 타 죽었을 것이다.
꺽정이와 서림이가 일을 마치고 옥에 간 패와 만날 약속한 자리에 먼저 와서 한
동안 기다리어도 오지를 아니하여 꺽정이가 갑갑증이 나서 서림이를 보고 “내
가 얼른 옥에까지 가보구 올 테니 그 동안 여기 혼자 기시우.” 말하고 그 자리
에서 나서서 옥으로 오는데 옥에 다 나오기 전에 풍편에 아우성 소리가 들리어
서 ‘이거 무슨 일 난 게다.’ 꺽정이는 생각하고 곧 달음질을 놓아 쫓아왔다.
황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아무 거침없이 옥에까지 와서 갇힌 사람들에게 온
뜻을 알린 뒤에 곧 옥문을 깨치는데 발길 한번에 부서질 것 같은 문짝이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아니하여 마침내 도끼로 깨치게 되었다. 고요한 밤중에 도끼 소
리가 굉장히 울려서 도끼질을 연거푸 하지 못하고 한번 하고 한참씩 쉬었다. 옥
쇄장이 집에서 옥문 깨치는 도끼 소리를 듣고 놀라서 온 집안 식구가 다 일어났
으나, 파옥하는 사람이 무서운 꺽정인 줄 짐작하고 옥쇄장이부터 옥에는 가볼
생의를 못하였다. 옥쇄장이 집 식구 어른 아이가 각각 이방 이하 관속들의 집으
로 쫓아다니며 잠들을 깨워서 관속들이 바쁜 걸음으로 왔다갔다 하던 끝에 닫히
었던 관가 삼문의 옆문 하나가 다시 열리었다. 군수가 꺽정이 파옥한단 급보를
듣고 일변 급한 대로 장교 사령 십여 명을 먼저 쫓아 내보내고 일변 부랴부랴
수교 이하 장교들과 기타 관속을 불러들여서 일제히 병기를 나눠주며 꺽정이와
그 가속을 살려 잡기 어렵거든 죽여도 좋다고 분부하여 내보내고 그 다음에는
읍내 각동 동소임과 양민의 장정들을 불러내서 각처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황
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옥문을 부수고 칼과 착고를 벗기고 갇힌 사람들을 옥 밖
으로 데려내온 뒤에 백손이는 혼자 걸리고 백손 어머니는 황천왕동이가 부축하
고 애기 어머니는 박유복이가 손을 잡고 나오는데, 옥에서 몇 간쯤 나왔을 때
관속 십여 명이 앞길을 막고 고함들을 질렀다. 박유복이가 황천왕동이를 보고
“저것들은 내가 처치할 테니 세 사람은 자네가 보호하게.”하고 말하여 황천왕
동이는 세 사람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고 박유복이는 댓가지 표창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네놈들이 우리를 가지 못하게 막을 테냐! 죽어두 원망 안할라거든 막
아봐라!” 박유복이의 재주를 모르는 관속들이 꺽정이 아니라고 넘보고서 몽치
들을 휘두르며 앞으로 내닫다가 댓가지 표창이 면상에 들어가 박히는 바람에 두
서너 사람이 땅에 엎드러지자,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슬금슬금 도망하였다. 박
유복이와 황천왕동이가 다시 한데 모여서 세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중에 백손
어머니가 갈증이 나서 못 견디겠다고 하여 옥쇄장이 집 앞에 와서 황천왕동이가
집안 동정을 살피고 물을 뜨러 들어갔다가 집안이 하도 괴괴하여 방안을 들여다
보니 사람의 새끼 하나 없는 빈집이라 여러 사람을 불러들여서 백손 어머니 외
의 다른 목마른 사람도 물들을 같이 먹었다. 옥쇄장이 집에서 나왔을 때 앞을
바라보니 관속 여러 십 명이 풍우같이 몰려오는데 병기들이 달빛에 번쩍번쩍하
였다. “이번은 사람 수두 많거니와 모두 병장기를 가진 모양일세.” “셋은 옥
사쟁이 집에 들여앉히구 우리 둘이 막아내 봅시다.”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의
수작하는 말을 애기 어머니가 듣고 “그럴 것 없이 우리 다섯이 다 집에 들어가
서 숨어 있다가 옥에들 가서 찾는 틈에 도망해 보지.” 하고 말하여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가 다 애기 어머니의 말을 좇아 옥쇄장이 집으로 도로 들어와서 어둠
침침한 봉당 구석과 부엌 구석에 숨어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장교가 옥쇄
장이 집 앞을 지나서 옥으로 쫓아갈 때 뒤에 따라오던 옥쇄장이가 꽁무니를 뺄
생각이 났던지 저의 집으로 들어오다가 봉당 구석에 숨어 있던 박유복이에게 댓
가지 표창 한 개를 맞고 땅에 쓰러졌다가 곧 밖으로 기어나가며 “도둑놈들 여
기 있소!”하고 소리를 쳐서 숨어 있는 사람들이 도망하여 나가기 전에 장교패
가 몰려와서 집을 에워싸고 아우성들을 질렀다.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 단둘만
같으면 한편을 뚫고 도망도 하겠지만 백손이도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장달음질을
지기 어렵거니와 백손 어머니 시누이 올케가 당초에 달음질칠 가망이 없어서 도
망할 생의를 못하였다. “이거 큰일났소. 어떻게 하면 좋소.” 천왕동이가 몸을
달리기 시작하니 “지금 내 손에 댓가지두 여남은 개 남아 있구 또 따루 쇠가
한벌 있으니까 아직은 염려없네.” 유복이는 위로하듯 말하였다. “이놈들이 밖
에서 아우성만 치구 들어오지를 않으니 우리가 쫓아나가 볼라우?” “무슨 꾀들
을 쓰는지 모르니 가만히 좀 있어 보세.” “얼른 여기를 벗어져 나가야 하지
않소.” “설마 어떻게든지 벗어져 나가게 되겠지.” 박유복이와 황천왕동이가
봉당 구석에서 수작하고 섰을 때 앞뒤 울타리가 일시에 부서지며 관속들이 사방
으로 뛰어들어왔다. 유복이는 표창을 내치고 천왕동이는 표창 맞은 장교에게서
창 한 자루를 뺏어들고 내둘렀다. 유복이의 표창이 쇠밖에 안 남았을 때 홀저에
밖에서 “꺽정이 여기 왔다!” 벽력 같은 소리가 나고 삽작께를 막고 섰는 장교
들이 엎드려지며 고꾸라지고 꺽정이가 칼을 춤추며 들어왔다. 천왕동이가 얼른
내달으며 “형님, 우리들 다 여기 있소.”하고 소리치니 꺽정이는 “오냐.” 한
마디 대답하고 곧 천왕동이를 등지고 돌아서서 칼을 머리 위에 비껴 들고 좌우
를 돌아보며 “죽구 싶은 놈은 내 칼을 받아라.!”하고 호통을 질렀다. 꺽정이의
호통 한번에 죽은 장교와 중상당한 관속들만 뒤에 남고 성한 관속들은 다 도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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