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는 칼을 들고 앞에 서서 황천왕동이는 창을 메고 꺽정이의 식구와 같이
중간에 서고 박유복이는 쇠표창 대여섯 개를 손에 쥐고 뒤에 서서 술렁거리는
양주읍내를 무인지경같이 지나나오는 중에 꺽정이의 발길이 자기 집 있는 곳으
로 향하였다. 꺽정이의 집과 최가의 집은 다 타서 주저앉고 최가의 집 이웃집까
지 타서 겨우 뼈대만 남았는데 불 잡던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서 웅긋쭝긋 서
있다가 꺽정이의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 와 하고 흩어졌다. 꺽정이가 불탄 집
앞에 와서 발을 멈추자, 애기 어머니가 꺽정이 옆으로 쫓아나오며 “여기가 우
리 집 아니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백손 어머니가 마저 시누이 옆으로 나서려
고 할 때 꺽정이는 벌써 앞서 걸어나갔다. 길목 지키는 사람들이 먼빛 보고 도
망들 하여 꺽정이의 일행은 아무 거침 없이 약속한 자리에 나와서 서림이를 만
나고 또다시 얼마 동안 더 나와서 애기와 신불출이를 만났다. 꺽정이는 칼을 집
에 꽂아 허리춤에 지르고 황천왕동이는 창을 풀섶에 내던지고 박유복이는 쇠표
창을 주머니에 넣은 뒤에, 애기는 꺽정이가 업고 애기 어머니는 유복이가 부축
하고 백손 어머니는 천왕동이와 백손이가 양옆에서 부축하고 길을 걸었다. 이십
리 남짓하게 와서 날이 밝으니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낮에 파주, 장단을 지
나가기 위험하니 산속 으슥한 곳에 숨어있다가 밤길을 걸읍시다.”하고 말하였
다. 황천왕동이가 옆에서 “밤에 가서 임진을 어떻게 건너겠소.”하고 타박하니
서림이가 황천왕동이를 돌아보며 “이별장의 힘을 빌면 오밤중이라두 건널 수
있을 게요.”하고 대답하였다. 서림의 말을 박유복이가 옳다고 할 뿐 아니라 발
이 아픈 애기 어머니까지도 좋다고 하여 꺽정이가 마침내 서림이의 말을 좇아서
낮에는 종일 산속에 숨어 있다가 어두침침한 때 길을 나서서 임진나루를 나왔는
데, 꺽정이가 이봉학이를 들어가 보니 봉학이는 양주 소식을 낮에 듣고 근심하
고 있던 차이라 긴말 않고 배 한 척을 내주었다. 꺽정이의 일행은 밤중에 임진
나루를 건너고 이튿날 또다시 밤길을 걸어서 밤중에 청석골을 들어왔다.
꺽정이가 양주서 큰 난리를 내다시피 하고 달아난 뒤에 양주군수의 급한 보장
이 경기감영과 포도청으로 올라갔다. 경기감영에서는 감사가 보장 사연을 드듸
어서 시급히 장계하고 포도청에서는 부장이 양주 내려가서 엄밀히 조사하였다.
평양 진상 봉물에 관계 있는 범인을 허술히 잡도리한 것은 군수의 과실이요, 파
옥, 살인, 방화 가지가지 중죄를 낭자히 저지른 것은 꺽정이의 죄상이라 양주군
수는 즉시 파직되고 임꺽정이는 경기감영과 포도청에서 다같이 체포하려고 서둘
렀다. 꺽정이가 영주서 파주길로 달아난 것은 분명하나 임진나루를 건너간 형적
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는가 의심하여 포천, 연천, 적성, 마전, 삭녕, 토
산, 신계 등지를 모조리 수색하는데, 포도군관, 포도군사, 장교, 사령 들이 도처에
들싼을 놓아서 애매한 백성들만 부대낌을 받았다. 이때 청석골 적당의 두목 다
섯 명이 신계 땅에 나온 것을 현령 이흠례가 모짝 다 잡았는데 그놈들 초사에
꺽정이가 청석골 있는 것이 드러나서 황해감영과 서울 포도청은 말할 것 없고
개성유수도 이것을 알게 되었다. 개성유수가 경력과 도사를 불러서 꺽정이 체포
할 방책을 의논하니 경력은 한번 헛수고를 해본 사람이라 선뜻 대답을 못하고
도사가 “패두 이억근이를 불러서 물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하
였다. 이억근이는 서울서 내려온 포도군사의 패두인데 도적 잘 잡기로 경향에
이름난 사람이었다. 유수가 곧 이억근이를 불러들여서 “양주 꺽정이란 놈이 지
금 청석골 적굴에 숨어 있다는데 어떻게 잡을 수 없겠느냐?”하고 물은즉 이억
근이는 “소인을 정병 백 명만 주시면 다짐 두옵구 체포하여 바치겠소이다.”하
고 장담하였다. 유수가 경력을 돌아보고 군사 뽑아줄 것을 상의한즉 경력이 이
억근이의 장담하는 것을 불쾌하게 들었던지 “우선 군사 이삼십 명만 주어서 청
석골 적당의 내정을 염탐하게 한 뒤에 차차 봐가며 군사를 백 명이구 이백 명이
구 더 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하외다.”하고 말하여 유수가 경력의 말을 옳게 듣고
다시 이억근이더러 “우선 이삼십 명 데리고 나가서 적정을 탐지해 봐라.”하고
분부하였다. 이억근이는 이십여 명 군사를 데리고 나와서 적굴 있는 방향을 탐
지한 뒤 도적들이 새벽 일어나기 전에 들이치려고 오경머리에 청석골 산속에를
들어왔다가 파수꾼에게 들켜서 화적들이 산 위에 몰려나와서 활들을 내려쏘는데
이억근이도 죽고 이십여 명 군사도 거지반 다 죽었다. 개성유수는 패두 이억근
이가 군사 수십 명 데리고 화적을 잡으러 갔다가 화적에게 죽었다고 간단하게
장계 한 장만 위에 올리고 일을 더 크게 벌리지 아니하였다. 각읍으로 퍼진 포
도군관, 포도군사 들은 임꺽정이를 체포하려고 수색하는 것이 헛수고인 줄을 미
리 짐작하여 수색을 건정으로 하고 꺽정이의 조력군을 사출하기 시작하였다. 포
도부장 한 사람이 군사 몇 명을 데리고 봉산 내려가서 장교 다녔다는 임꺽정이
의 처남의 근지를 탐문하여 전 이방 백가의 사위인 것을 알고 백가를 잡아서 사
위의 종적을 대라고 족칠 때에 백가는 그럴싸한 거짓말로 발을 빼었다. “소인
의 사위 명색 황가란 것이 본래는 그다지 상없지 않던 위인이온데 못된 자들과
교유가 생기며부터 주색을 밝혀서 소인의 내외가 다 못마땅하게 여기옵든 차에
그 교유하던 자 중에 경천 역졸 배가란 자가 살인하구 도망하는 것을 방조해 주
옵구 그 죄루 제주 귀양을 가올 때 소인은 아주 의절하다시피 말해 보냈었소이다.
황가가 이 달에 귀양이 풀려서 소인의 집을 찾아왔솝기에 소인이 받지 아니
하려다가 인정에 박절하와 후일이나 경계하려구 말마디 꾸짖었솝드니 어리석은
것이 되려 고깝게 듣구 소인에게 불공설화를 하옵기에 나가라구 야단을 쳐서 오
던 이튿날 바루 나갔소이다. 갈 때 봉산땅에 다시 발두 들여놓지 않는다구 말하
구 가든 것이 불과 육칠 일 만에 도루 와서 기집을 내달라구 야료를 하옵는데
동네가 부끄러워서 소인은 악언상거를 못하옵구 딸자식을 불러서 부모와 같이
있을 테냐, 서방 명색을 따라갈 테냐 물어보은즉 무남독녀루 귀엽게 길러놓은
보람이 없이 서방이란 자를 따라갈 의향으루 대답하옵기에 소인이 괘씸한 맘에
전후 불계하구 딸자식이란 것더러 너 같은 자식 죽어 없는 셈 잡으면 고만이니
서방 따라가라구 해서 딸자식까지 내쫓았소이다.” 천왕동이가 그 동안 몰래 처
가에 와서 장인 장모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안해를 청석골로 데려간
까닭에 백가의 말이 얼쑹덜쑹하여 서울서 처음 온 부장은 고사하고 봉산에 오래
있는 군수까지 거짓말로 듣지 아니하였다. 부장이 백가의 처치를 군수에게 맡기
고 돌아간 뒤에 백가의 결찌들이 군수에게 청질하여 백가는 아무 탈없이 놓여나
오게 되었다. 봉산 백가가 사위의 연루로 단련을 받는 동안에 임진별장 이봉
학이가 임꺽정이와 형제같이 친하여 꺽정이 아비 장사에 회장까지 간 것이 드러
나서 꺽정이가 청석골로 달아나는 데 이봉학이가 임진나루를 건너주었으려니 의
심들 하게 되었다. 이때 임진 진군 육십이 명 중에 봉학이에게 한두 번 매깨나
맞은 자가 밤배 낸 것을 포도군사들에게 말하여 주어서 봉학이가 꺽정이 일에
관련 있는 것이 의심없이 되었으나, 봉학이는 조정 명관이라 조정 처분이 내리
기 전에 포도군사들이 바로 잡지 못하였다. 봉학이의 소실 계향이가 이때 태중
만삭이라 봉학이는 계향이를 근심시키지 않으려고 꺽정이의 연루받게 되기 쉬운
것을 사색에도 나타내지 않았으나, 눈치빠른 계향이가 벌써 다 짐작하고 은근히
근심하여 조석도 잘 먹지 못하고 밤잠도 잘 자지 못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봉
학이가 잠을 잃고 누워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술먹고 싶은 생각이
나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안으로 난 일각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안방에 불이
켜 있는데 머리맡 되창문에 턱살 괴고 앉은 계향이의 그림자가 비치었다. 봉학
이가 신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니 되창문이 열리며 계향이가 머리를 내밀고 “나
리시오?”하고 물었다. “왜 이때까지 자지 않구 앉았나?” “누웠다가 허리가
아파서 잠깐 일어나 앉았세요.” “산점이 있나?” “아니오.” 이봉학이가 안방
에 들어설 때 윗간에서 자던 상직꾼이 일어나서 건넌방으로 건너가려고 이불 조
각을 끌어안았다. “거기서 그대루 자거라.” 봉학이가 상직꾼에게 말을 이르는
데 “가만 내버려 두세요.” 계향이가 이봉학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머리맡 되창
문을 닫고 단둘이 마주 앉은 뒤에 계향이가 먼저 “요새 잠을 잘 못 주무시지
요?”하고 물으니 이봉학이는 짐짓 괴상히 여기는 모양을 보이며 “왜 못 자?
잘 자지.”하고 대답하였다. “고만 두어요.” “무얼 고만두어?” “속에 근심
하시는 일이 있는 줄 다 알아요.” “근심하는 일이 있으면 자네에게 왜 말을
안 하겠나?” “그렇기에 말씀이지요.” “말 안 하는 것을 보면 근심하는 일이
없는 줄 알 것 아닌가.” “아니예요.” “아니라니? 그럼 없는 근심두 있다구
할까.” “요새 날마다 진군들이 포도군사에게 단련을 받는다는데 어째 근심이
없다세요.” “그건 근심이 된다면 되겠지만 그저 그렇지 무슨 큰 근심이야 될
것 있나.” “밤배를 낸 것이 발각되지 않겠어요?” 계향이는 입안 소리로 근심
스럽게 말하는데 “그걸 아는 진군들은 다 내 심복이니까 누설될 바두 없구 설
혹 누설이 되어서 말썽이 된대두 삭탈관직밖에 더 되겠나? 삭탈관직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두 해로울 것 없네. 어느 조용한 시굴에 가서 나는 밭매구 자
네는 길쌈하구 사세그려. 그러면 고만 태평이 아니겠나.” 이봉학이는 소리를 내
서 껄껄 웃었다. “그렇게쯤만 되어도 좋지요.” “그럼 그밖에 더 되겠나?” “
귀양이 되지나 않을까요?” “친한 친구 사폐 잠깐 봐준 것이 귀양갈 죄야 되
나.” “그래도 미리 주선을 좀 해두시지요.” “미리 주선이라니? 내가 이런
짓을 했소 하구 내 입으루 떠들구 다니란 말인가.” “이정승 대감께 미리 말씀
해 두시는 게 좋지 않겠세요.” “글쎄, 어디 생각해 보세. 그 이야기는 고만두
구 술이나 한잔 주게.” 계향이가 골방에 놓인 술항아리에서 술 한 대접을 따라
다가 화로의 불씨를 헤치고 거냉하여 주었다. 봉학이가 한 대접 술을 거의 다
마시다가 계향이를 보며 “자네 좀 남겨주까?” 하고 물으니 “그렇지 않아도
숨이 가쁜데 술먹고 배기나요.” 하고 계향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봉학
이가 술대접을 놓은 뒤에 안주로 내놓은 포 한쪽에 반 쪽을 찢어 씹으면서 남은
반 쪽을 먹으라고 주니 계향이가 싫다고 받지 아니하여 “포두 먹으면 숨이 가
빠지나?” 하고 이봉학이가 웃음의 소리를 해서 이때껏 웃지 않던 계향이도 방
그레 웃었다. “나두 여기서 좀 자다 나갈까?” “나가서 편히 주무시지요.” “
내가 나가면 자네 혼자 오두마니 앉았을 테니 나하구 같이 자세.” “잘 테니
나가세요.” “상직꾼을 쫓았으니까 내가 대신 상직하지.” 이봉학이가 먼저 자
리에 누워서 계향이를 바라보며 “이리 와서 눕게.” 하고 옆자리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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