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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정이가 천왕동이를 데리고 청석골을 떠나서 일력을 다하여 임진까지 왔으나
나루를 건널 수가 없어서 나룻가에 하룻밤을 드새고 이튿날 식전 첫배를 타고
건너온 뒤 줄달음을 치다시피하여 점심 나절도 채 되기 전에 양주 집에를 들어
왔다. 반겨 내닫는 애기를 보고 꺽정이는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바로 아비 방
에 와서 방문을 열었다. 눈이 뜨이는 것은 얼굴 덮은 홑이불폭이요, 코를 찌르는
것은 살 썩는 시취라 꺽정이는 정신이 아뜩하며 눈앞이 캄캄하여 털썩 주저앉았
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나 왔소.
꺽정이 왔소.”하고 홑이불 폭을 걷어치니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 아비의 얼굴이
아니다. 꺼진 눈자위, 악물린 이빨, 어디가 조금이나 보던 얼굴 같을까. 꺽정이가
다시 넋 잃은 사람같이 앉았는 것을 천왕동이가 와서 붙들어 일으켜서 안방으로
건너왔다. 꺽정이가 안방에 와서 앉으며 비로소 아이구 소리 한 마디를 지르고
네 이웃에 다 들릴만큼 큰 울음소리를 내놓았다. 천왕동이는 꺽정이의 울음을
진정시키려다 못하고 나중에 애기에게 옥에 갔다 온다고 말하고 나갔다.
천왕동이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착실히 지나서 꺽정이는 울음을 겨우 그치고
자기 손으로 머리를 푸는데 밖에서 여러 신발 소리가 나서 애기가 얼른 내다보
니 꾸역꾸역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장교와 사령들이었다. “아이구, 아저씨 잡으
러들 왔소.” 애기의 말을 듣고 꺽정이가 곧 머리를 거듬거듬하여 수건으로 눌
러 동이며 마루로 나왔다. 앞장선 두 장교가 마루 앞으로 가까이 오며 하나가
먼저 “꺽정이 관가에 잡혔다.”하고 말을 붙이고 또 하나가 뒤를 이어 “곱게
잡혀가자.”하고 말을 일렀다. 꺽정이가 힘이 장사인 줄 아는 까닭에 꺽정이 하
나를 잡아가려고 장교와 사령이 십여 명 몰려나왔지만 그래도 염려스러워서 마
구 욱대기지 못한 것이었다. 꺽정이가 한동안 눈만 부릅뜨고 말이 없이 섰다가
나중에 “내가 지금은 못 잡혀가겠소. 죽은 아버지를 아무렇게라두 땅에 끌어
묻구야 잡혀갈 테니 오늘은 그대루들 가구 내일 모레쯤 다시 나오.” 무거운 말
소리로 띄엄띄엄 말하였다. “관가 일을 네 맘대루 지휘하느냐?” “그런 어쭙
지 않은 소리 말구 얼른 나서라.” “내가 잡혀가구 싶지 않은 걸 잡아갈 사람
이 누구요? 십여 명은 고만두구 백여 명이라두 내 몸에 손끝 하나 못댈 테니 알
아 하우.”
꺽정이 눈에 불이 철철 흘렀다. 장교와 사령들이 꺽정이의 기안에 눌려서 말
한마디 못하고 서로 돌아보기들만 하는 중에 나이 먹은 장교 하나가 앞으로 나
서서 “여보게, 꺽정이. 내 말 듣게. 자네를 우리 자의로 잡으러 온 것 같으면
내일 모레는 고사하구 열흘 보름이라두 관한을 해주겠네. 그렇지만 우리 자의가
아니구 안전 분부니 자네가 관가에 들어가서 안전께 사정을 말씀하게.” 말씨
곱게 말하니 꺽정이가 수건을 벗고 풀어진 머리를 내보이며 “지금 막 머리를
푸는 중이오. 들어가서 안전께 이런 사정을 여쭈어 주시우. 내가 한번 잡혀간다
구 말한 바에 도망할 리두 없구 또 식구들이 모두 옥에 갇혀 있는데 나 혼자 도
망한들 무어하겠소.”하고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 장교가 다른 장교 사령들과 쑥
덕쑥덕 말하고 나서 다시 꺽정이를 보고 “자네 사정이 하두 딱하니 우리가 들
어가서 안전께 말씀을 어쭈어 봄세. 그렇지만 또 나오게 될는지 모르겠네. 자네
두 좀더 생각해 보게.”하고 먼저 돌아서 나가니 다른 장교들도 다 그 뒤를 따
라나갔다.
장교와 사령이 십여 명이나 함께 몰려나왔다가 뒤통수들을 치고 들어가니 그
중에는 남보기 창피하다고 두덜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고 또 원님께 죄책을 당하
겠다고 귀성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대로 들어가자고 발론하던 나이 먹은
장교가 두덜거리는 사람들 보고는 “큰 창피를 안 당하려면 작은 창피는 참아야
하네. 꺽정이가 어떤 장산지 자네들 잘 아는가. 스무 살 안짝에 벌써 기둥을 쳐
들구 물건을 끼었다 뺐다 한 장살세. 내가 아까 말하지 않던가. 꺽정이 잡으려
오는 데는 한둘이나 십여 명이나 마찬가지라구. 십여 명쯤으루 건드리지 못할
걸 아니까 그렇게 말한 겔세. 꺽정이를 섣불리 건드리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인
줄만 알게.”하고 중언부언 타이르고 또 귀성거리는 사람들보고는 “안전께 말
씀만 잘 여쭈면 꾸중 한마디 안 들을 테니 염려들 말게. 말씀 여쭐 것은 내 맡
음세.”하고 한말로 담당하였다. 장교와 사령들이 관가에 들어왔을 때 그 나이
먹은 장교가 군수 앞에 나와서 “꺽정이를 잡으러 가보온즉 머리를 풀구 죽은
아비 옆에 엎드려 통곡하는 중이옵디다. 아무 천인이라두 아비 임종두 못한 놈
이 막 와서 발상하는 것을 잡아내기 어렵사와 말미를 주구 왔소이다.”하고 아
뢰니 군수는 듣고 다른 말이 없이 다만 “도타할 염려가 없겠느냐?”하고 물었
다. “처자식이 갇혀 있사온 까닭에 도타할 염려는 없사오나 튼튼할 성으루 소
인들이 꺽정이 집을 지키겠소이다.” “그럼 내일 식전 조사 뒤에 잡아 대령하
도록 해라.” “네, 그리 하오리다.” 그 장교가 삼문 밖에 물러나와서 동무 장
교와 사령들을 보고 “내 말이 어떤가. 영낙재없지.”하고 말이 맞은 것을 자랑
하였다. “그러나 밤에 누가 나가 지킬 테요?” “낮에 십여 명이 나가 못 잡은
놈을 한둘이 지켜 무어하우?” “내일 식전에는 무슨 용뺄 수 있소. 어떻게 잡
아올 테요?” “또 무슨 거짓말을 꾸며댈라우.” 여러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지
껄이고 나서는 것을 그 장교가 손을 내저으며 “가만히들 좀 있게.”하고 누르
고 나서 “우리가 나가서 지키지 않드래두 꺽정이는 도망 못할 게니 염려말게.
집에 뻗쳐놓은 아비 송장이 있지 옥에 갇힌 식구가 있지 어딜 도망하겠나. 그러
구 내일 식전에는 여럿이 나갈 것 없네. 누구든지 하나만 나하구 같이 나가서
꺽정이를 잡아오세. 오늘 맘을 눅여준 까닭에 제 입으루 말한 모레 안에 잡아올
수 있을 테니 내일 두구 보게.”하고 말하니 다른 장교와 사령들은 다행히 여겨
서 “그러면 작히 좋겠소.” “우리는 모르니 잘 해보우.” 이와 같은 말을 지껄
이고 다 각기 집으로 흩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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