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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7권 (22)

카지모도 2023. 6. 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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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가 성공을 못한 것처럼 속여볼까, 아주 뱃심을 부리고 내대어볼까, 숫제 어디로

피신하여 볼까 이것저것 모두가 신통치 못하고 꺽정이를 움직여 보았으면 좋을

것만 같은데 어떻게 하면 움직일 수 있을까 종일 생각하였다. 이날 석후에 꺽정

이가 새집에 가려고 나설 때 노밤이는 미리 의관을 정제하고 있다가 얼른 정하

에 내려가서 밑도끝도 없이 “저는 오늘 저녁에 선다님께 마지막 하직을 여쭙겠

습니다.” 하고 허리를 구부렸다. “마지막 하직이라니 무슨 소리냐?” “오늘

밤에 제가 모교를 가기루 작정했는데 꾸중을 들을까 봐 말씀을 진작 여쭙지 못

했습니다.” “모교를 가다니?” 노밤이가 다른 사람 없는 것을 번히 알면서도

사방을 휘 돌아보고 나서 “기집애를 죽이러 갑니다.” 하고 나직이 말하였다.

“네가 원수를 갚아주마구 했느냐?” “네, 제가 요전자 기집의 우는 것을 달래

느라구 위로조루 말한마디 하구 꾸중까지 듣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말 한마디

에 발목이 잡혀서 성가심을 받았는데 사내자식의 면목이 있어서 싫구 좋구 되구

안되구 모두 다 불계하구 일을 담당하구 나서지 않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마지막 하직이란 건 웬 소리냐? 기집애를 죽이구 다른데루 도망할 작정

이냐?” “도망하게 될 것만 같으면 마지막 하직을 여쭐 것이 없습니다. 이리

와서 뵈입든지 광복 가서 뵈업든지 다시 뵈입지요. 그렇지만 기집애를 죽이구

못 죽이구 간에 저는 십상팔구 잡힐 것 같은데 잡히면 죽는 목숨 아닙니까. 그

래서 아주 마지막 하직을 여쭙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제가 잡혔다는 소문이 들

리거든 선다님이시나 이집 주인 양반이시나 얼마 동안 자리를 옮겨 앉으시두룩

하십시오. 제가 지금 맘을 먹기는 압슬, 포락을 당하더래두 함부루 말을 불지 않

을 작정입니다만 혹시 정신을 잃은 중에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른지 모릅니다.

매사가 불여튼튼 아닙니까?” 노밤이의 말할 때 태도가 전과 같이 뒤숭숭스럽지

않고 제법 침착하였다. 꺽정이가 물끄러미 노밤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네가

알아볼 건 다 알아봤느냐? 우선 그 집 안팎길을 환하게 잘 알았느냐?” 하고 물

으니 노밤이는 선뜻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소상히 알아봤습니다.” 하고 대

답한 뒤 다시 이어 말하였다. “그 집이 모교다리 북쪽 천변 첫골목 안 남향대

문집인데 대문안에 들어서면 잡잇간, 마굿간, 광들이 있구 사랑 중문은 서편으루

꺾여 나구 안중문은 맞은편 층계 위에 드높게 매달려서 대문 밖에서 안중문이

곧게 들여다보입니다. 안중문간을 지나 들어서면 육간 대청이 남향으루 놓이구

안방은 동쪽이구 건너방은 서쪽이구 건너방 모퉁이에 사랑에서 드나드는 일

각문이 있답니다. 안 뒤는 훨씬 넓어서 서편으루 사당방채가 있구 동편으루 별

당채가 있는데 별당채는 안방 뒤 광채와 비슷한 줄에 서향으루 놓였답니다. 별

당채만두 조그만 여염집만해서 안방이 이 간, 마루가 삼간, 건너방이 한 간인데

별당 안방이 곧 그 처녀의 방이랍니다. 앞으루 대문, 바깥중문, 안중문을 지나서

안 뒤에 있는 별당에까지 들어가는 건 애초에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구 그 집

동편에 있는 막다른 실골목을 한참 들어가면 높은 담 안에 큰 배나무 선 데가

있는데 그 배나무가 별당 뒤에 백인 것이라니까 어떻게 그쪽 담을 넘어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별당에 상직꾼두 여럿이려니와 별당에서 소리를 치면

안방에 들리구 안방에서 큰소리를 지르면 사랑 수청방에 들리구 수청방에서 설

렁을 치면 하인청 하인과 행랑방 낭속이 쏟아져나오게 될 텐데 만일에 밖으루

실골목 어귀를 막구 안으로 쫓아들어오면 옴치구 뛸 데가 없을 겝니다.” 노밤

이의 길게 말하는 것이 저의 안 것을 자랑하는 것도 같고 또는 꺽정이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같았다. 꺽정이가 노밤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나더니

“가긴 가더래두 내일 내 말을 듣구 가거라.” 하고 분부하였다. “기집이 내일,

식전에 하회를 알러 올 텐데 오늘 밤에 간다구 해놓구 안 가구 있으면 창피하지

않습니까?” “기집이 내일 오거든 오늘 밤에 내 분부가 있어서 못 가구 일간 갈

텐데 하회를 뻔찔 알러 다닐 것두 없으니 집에 가만히 앉아서 소문을 들으라구

일러 보내려무나.” “어디 그렇게 해봅지요. 그렇지만 좀 창피를 볼 것 같습니

다. ” 꺽정이가 새집으로 가는 것을 노밤이는 문밖에까지 전송하고 들어올 때

싱글싱글 웃으면서 “바루 들어맞았다. 인제는 됐어.” 하고 혼잣말로 지껄였다.

이튿날 식정에 상노아이의 어미가 와서 노밤이는 전날 밤에 가지 못한 사정을

말하는데 꺽정이의 분부는 쑥 빼고 환도날에 녹이나서 오늘 밤까지 갈아야 쓰겠

다고 거짓말하여 속이었다. 그러고 노밤이는 꺽정이 입에서 분명한 말을 듣게

되기만 종일 바라고 있었다. 꺽정이가 이날 낮에 모교 원계검의 집에 가서 대문

밖에서 들여다보면 동편 실골목 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한온이 큰첩의 집 앞을 지나오다가 마침 한온이를 만나 끌려들어가서 국수장국

으로 점심 요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런 수작이 있었다. “자네 선전

관의 표신 같은 것을 하나 얻어 줄 수 없겠냐?” “그건 무엇하실랍니까?” “

무엇에 좀 쓸 데가 있는데 쓸 데는 나중 알게.” “언제 쓰실랍니까?” “오늘

해전에 열어 주면 좋겠네.” “선전관의 표신과 꼭 같게 위조한 것이 큰집에 여

러 개 있습니다. 한 개 갖다 드리지요.” 꺽정이가 낮에 나간 것을 새집에 간 줄

로만 짐작하는 노밤이는 꺽정이 오기를 잔뜩 기다리고 있다가 꺽정이가 온 뒤에

곧 앞에 나가서 “어젯밤에 오늘 들으라신 말씀은 무엇이오니까?”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아직 가만 있거라.” 한마디 꾸짖듯 말하고 다른 말을 더 하지 아니

하였다. 이날 밤에 꺽정이가 새집에 가지 않고 처소에서 잠을 잤다. 새집을 배치

한 뒤 이십여 일 동안에 두어 번 광복산에서 황천왕동이가 와서 같이 자느라고

못가고 그 외에는 밤마다 가서 자던 사람이 초저녁에 잠깐 다녀만 오는 것이 무

슨 까닭이 있는 일인데 그 까닭이 별게 아닐 것이라 노밤이는 속으로 “옳지,

이 양반이 여기서 자다가 밤에 기집애를 죽이러 갈 작정이구나. 그런데 나더러

말 안 하는 게 웬일일까. 기집에 대가리를 끊어가지고 와서 엿다 받아라 할 생

각인가. 그렇지, 어둔 밤에 홍두깨 대신 사람의 대가리로 나를 놀라킬라는 게지.

” 혼자 다 안 것 같이 생각하였다. 노밤이가 자리에 누운 뒤에 얼굴에 찬바람

끼치는 것이 실어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어쓰고 잠이 들어서 코를 골며 곤히

자는 중에 몸이 혁혁한데 잠이 깨어서 눈을 떠본즉 꼈던 불이 다시 껴지고 무서

운 군관 하나가 눈앞에 서 있었다. 노밤이는 눈뜨고 꿈꾸는 줄로 여겨서 눈을

도로 감고 배 아래에 내려가 있는 이불을 더듬어 끌어올리다가 “눈까지 떠보구

도루 잘 테냐! 얼른 일어나가라!” 말소리가 꺽정이라 그제사 꿈질거리고 일어나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비비었따. “빨리 옷 입어라!” 꺽정이의 말을 노밤이가

“빨리 받아라!”로 빗듣고 “어디 있습니까?” 하고 꺽정이를 쳐다보았따. “무

에 어디 있단 말이냐?” “기집애 대가리 말입니다.” “저눔이 잠주정하지 않

나, 정신을 얼른 못 차리겠느냐!” 꺽정이가 발끝으로 앞정강이를 직신하여 노

밤이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는데 허리띠 안 맨 바지를 붙들지도 않아서 깝데

기가 홀딱 벗어졌다. “저게 무슨 꼴이냐?” “녜 녜, 옷을 입겠습니다.” 노밤

이가 주저앉아서 바지를 치키고 버선을 신고 허리띠 대님까지

매고 다시 일어선 뒤에 “지금 나하구 같이 가자.” 하고 꺽정이가 말하니 노

밤이는 얼떨떨하여 “어딜 가시렵니까?” 하고 물었다. “어딜 가다니, 네가 간

다는 데를 같이 가잔 말이다.” “선다님 혼자 가시지요.” “저눔 보게, 저 혼

자 보내기가 염려돼서 가자니까 되려 나더러 혼자 가란 말이냐?” “선다님께서

가시면 고만이지 제야 가서 무어합니까?” “네가 갈 맘이 없으면 나두 고만두

겠다.” “아니, 가겠습니다. 가서 망이라두 봐드리겠습니다.” “갈 테거든 얼른

군사 복색을 차리구 나서라.”

군관이나 군사의 복색을 차리는 것은 야순 도는 군사에서 잡히지 않으려는 것

인 줄 꺽정이가 말 아니하여도 노밤이는 짐작을 잘 하였다. 선전관 복색을 차린

꺽정이가 군사 복색을 차린 노밤이를 데리고 밤중의 인적 그친 큰길을 아무 거

침없이 지나서 모교 천변을 아래서 끼고 올라오다가 원계검의 집 동쪽 실골목을

잡아 들어섰다. 실골목 안은 천변보다 훨씬 더 어두워서 어둠 속에 발들을 더듬

어 떼놓으며 차츰차츰 들어오는 중에 어느 집의 들창의 펼떡 열리며 오줌을 내

버리는데 꺽정이보다 뒤떨어진 노밤이가 마침 들창앞을 지나오다가 옷에다 흠뻑

받았다. “이런 제기.” 노밤이가 무심결에 말소리를 내고 도리어 놀라서 뒤에

나오던 욕설을 입속에서 삼켜버리고 앞서 간 꺽정이를 부지런히 쫓아왔다. 꺽정

이가 배나무 선 데를 먼저 와서 있다가 노밤이가 앞에 온 뒤에 비로서 “아까

오줌을 받았더냐?” 하고 물었다. 거기는 양편이 모두 큰집 담이라 가만가만 이

야기하여서는 들릴 데가 없었다. “이거 좀 맡아 보십시오.” “지린내 난다. 저

리 비켜서라.” “저는 여기서 망보구 있을 테니 혼자 담 넘어 들어가십시오.”

“망이 무슨 망이냐! 가지고 온 밧줄이나 이리 내라.” “밧줄 가지구 어떻게 넘

어가실랍니까?” “내가 먼저 뛰어넘어가서 밧줄 한 끝을 넘켜보낼 테니 네가

붙잡아 넘어오너라.” “저는 몸이 비둔해서 그렇게 안됩니다. 선다님 담 넘어가

시는데 소용 안 되면 밧줄은 일부러 가지구 올 것두 없는 걸 공연히 가지구 왔

습니다. 그러구 대가리는 꼭 떼어가지구 나오십시오. 제가 갖다 보여주마구 기집

에게 허락했습니다.” 꺽정이가 한참 생각하다가 “그럼 너는 여기 있거라.” 노

밤이에게 말한 뒤에 발을 몽굴러가지고 길이 넘는 높은 담을 뛰어넘는데 담 안

에 가서 쿵 소리도 나지 아니하였다. 꺽정이는 노밤이가 섣불리 살인하다가 위

급한 일을 당할 경우에 옆에서 도와주려고 생각하고 같이 왔는데 노밤이가 취평

하려고 꾀를 피울 뿐 아니라 다시 생각하여 보니 노밤이를 담 안으로 끌어들어

고 담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공연한 군일이라 노밤이는 제 소원대로 담 밖에 남

겨두고 혼자 담을 뛰어넘었었다. 꺽정이가 힘도 장사려니와 몸이 날래서 뛰엄질

을 잘하여 숭례문을 뛰어넘었다고 헛소문까지 난 사람이라 원계검의 집 후원 담

이 높지 않은 건 아니로되 여반장으로 뛰어넘었던 것이다. 꺽정이가 담 안에 들

어온 뒤 혹시 무슨 기척이 있나 잠시 서서 귀를 기울이었다. 자리는 후원의 동

떨어진 곳이요, 때는 한밤중이 훨씬 지난 뒤라 사방이 괴괴한데 여자의 이야기

책 보는 소리가 어디서 나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원채 안방에서 나는 줄 생각하

였더니 나중에 알고 본즉 별당안방에서 나는데 소리가 가늘어 멀리서 오는 것

같았다. 꺽정이가 발짝 소리를 별로 숨기지도 않고 별당 뜰 앞에까지 걸어왔을

때 책 보던 소리는 벌써 그쳐지고 희미하던 불빛이 다시 밝아지더니 방안에서

말소리들이 나는데 “할멈, 할멈!” 하고 몸달게 부르는 건 계집아이의 소리요

“왜 그러시우?” 하고 성가신 듯이 대답하는 건 늙은 할미의 소리였다. “밖에

서 신발 소리가 났소.” “무슨 신발 소리가 났단 말이오?” “내가 똑똑히 들

었는데 누가 뒤꼍에서 앞으로 나온 것 같아.” “정월 고사를 안 지내더니 대감

이 떡 생각이 나서 돌아다니는게지.” “할멈, 일어나서 바깥 좀 내다보오.” “

작은아씨가 밤늦도록 잠을 안 자니까 이런 소리 저런 소리 귀에 들리지요. 어서

불 끄고 잡시다.” “불 없으면 더 무서우라구.” “언제 또 큰 초까지 붙여났

소?” “건너방에서 자는 것들이나 좀 깨워 데리구 오.” “그까지 아년들 깨워

오면 무어하우, 할멈이 여기 있으니 조금도 무서워 마시우.” “무서운 생각이

자꾸 나니 어떡하우.” 계집아이의 말고 늙은 할미의 말이 섞바꾸어 나는 것을

꺽정이가 서서 듣다가 말의 동안이 뜰 때 더 섰지 않고 마루 위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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