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근이 주인 없는 사랑에서 혼자 앉았다 누웠다 하며 주인을 기다리는데 오
래 되지 않는다던 주인이 너무 오래도록 오지 아니 하여 그대로 가려고까지 생
각할 때, 문간이 떠들썩하며 주인 대감이 사랑으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우.” “얼른 말씀을 여쭙구 가봐야 겠습니다.” “조용히 할 말이라
지? 그럼 이방으루 들어오우.” 원계검이 옷도 갈아 입지 않고 바로 침방으로
남치근을 인도하였다. 단둘이 서로 대하여 앉은 뒤에 원계검이 먼저 “대체 무
슨 일이오?” 하고 물었다. “일전에 잡은 꺽정이의 처 셋 중에 원씨 성을 가진
기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기집이 제 말은 여염 사람이라고 하나 언어 동작이 재
상가 생장 같구 그 본집을 대는 말이 되숭대숭해서 수상하기에, 꺽정이의 도당
한 놈을 잡아내서 그 기집의 근본을 캐어 물어본즉 그놈의 말이 꺽정이가 모교
천변 원판서댁 따님을 업어내다가 데리구 살았다 합니다. 그놈을 미친놈으로 돌
리구 그 따위 소리를 다시 하면 아가리를 찢어 놓는다구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
구 그 기집의 근본을 더 자세히 캐지 않구 어물어물해서 덮어두었습니다.” 원
계검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진 것을 보고 남치근이 말을 더 하지 않고 그만 그치
었다. 원계검은 열기 없는 눈으로 남치근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만에 겨
우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말하는데 말소리가 앓는 사람의 신음하는 소리
와 같았다. “새루 나는 포장이 혹시 생각이 부족하면 대감께서 의외의 망신을
당하실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애는 애대루 쓰구 세찬에 추고에 겹철릭을 입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염감두 아실는지 모르나 내 딸이 형제에 큰것
은 출가해서 자식까지 여러 남매 두었구 작은 것은 출가 전에 요사했는데 웬 딸
이 또 있단 말이오?” “그러면 그 기집의 근본을 밝혀두 좋은 걸 지나친 염려
를 했습니다.”“그러니 아니니 떠들기만 해두 나는 망신이니까 영감 용의가 고
맙소.” “인제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수이 한번 영감을 찾으리다.” 원계검
이 남치근을 보낸 뒤에도 한동안은 넋잃은 사람같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
내 딸이 도둑놈의 계집이 되다니, 그년이 아비 어미의 혈육을 더럽혀도 분수가
있지, 제게 수치요, 부모형제 수치요, 온 문내에 수치인 걸 그대로 무릅쓰고 살
았으면 그년이 오장육부가 썩은 게지. 오장육부 성하고야 그럴 수 있나. 그년 성
깔에 강포의 욕을 당하고 살 리가 없는데 천하 흉악한 도둑놈의 계집 노릇을 하
고 살다니 그 천참만육할 도둑놈이 무슨 약을 먹여서 사람을 등신을 만들어 놓
았나. 등신이 아니라도 죽어야 하지만 더구나 등신이면 살아서 무어하나. 하루바
삐 죽어야지. 전옥에 내려 가두라신 처분이 내렸을 젠 필경 극형에 처할실 모양
인데, 군기시 다리나 당고개로 나가기 전에 소리소문 없이 약사발을 안겼으면
좋겠다. 마누라가 알면 요량 분수없이 딸을 살려내라고 조르렸다. 딸 까닭에 성
화상성된 사람이 무슨 해거를 누릴는지 누가 아나. 마누라에게도 알리는 게 부
질없지. 남포장이 우물쭈물 해놓은 대로 일이 끝나면 좋겠지만 만약 새로 나는
포장이 찰찰하게 발기집어내면 큰 탈이야. 위에 입문이 되고 조관들이 다 알게
될테니 내가 인두겁을 쓰고서야 다시 조정에 나설 수가 있나. 지금 불과 칠팔
일만 지나면 동궁 관례에 찬 노릇하고 직품이 종품으로 돋쳐서 귀 뒤에 도리옥
을 붙이게 될 텐데, 도리옥 맛을 못 보고 만다. 될 말인가. 포청에 두지 말고 빨
리 전옥으로 옮기도록 주선이라도 해야지. 남포장부터 보기가 부끄러워서 안나
오는 발명을 억지로 했더니 다시 생각하니 숫제 까놓고 이야기하고 이런 의논이
라도 해 볼 걸 잘못했나 보다. 아니야, 갈린 포장과 의논서 소용 있나. 혹 무슨
도리가 있을까. 장의동이나 가보겠다.’원계감이 혼자 속을 지글지글 끓이던 끝
에 장의동 이량을 찾아갈 생각이 났으나, 그러나 이량과 의논하거나 또는 이량
에게 청촉하려고 마음을 먹지는 못한 것이 이량의 사랑에는 항상 손이 많아서
조용치 않고 설혹 조용하더라도 얼굴에 개가죽을 뒤어쓰기전에 개구하여 말하기
가 어려운 까닭이었다.
원계검이 이량의 집에 왔을 때 마침 주인은 궐내에서 일찍 나왔고 매일같이
댁 대형하는 손들은 아직 모이지 아니하여 사랑이 의외로 조용하였다. “대감
지금 마을에서 나오시오? 마을에 무슨 일이 있소?” 이량이 묻는 말에 원계검은
고개를 가로 흔들며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럼 웬일이시오?” “이렇
게 조용한 때를 좀 와서 보이려고 일찍 왔소.” “내가 일찍 퇴궐하기를 잘했구
먼.” “오늘 포장이 새로 났나요?” “네, 났소.” “좌변이 누구요?” “김순
고요.” 김순고는 원계검과 세혐이 있는 사람이다. 원계검의 아버지가 무슨 별성
으로 김순고의 조부 어디 부사를 장파시킨 일이 있어서 서로 세혐을 보았다. 김
순고의 좌포장은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셈이라 원계검이 속으로 왼새끼를
꼬지 않을 수 없었다. 원계검의 기색이 좋지 못한 것을 이량이 보고 “대감, 무
슨 근심이 생기셨소?” 하고 물었다. “내가 벼슬을 버리고 어느 시골로든지 낙
향하게 될까 보오.” “그게 웬 말씀이오. 급류용퇴할 생각이 났단 말씀이오?”
“아니오. 그런 생각이 난 게 아니라 그럴 사정이 있소.” “그럴 사정이 무어
요?” “집안 사람들도 모르게 숨겨둔 문호의 수치 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말씀하잔즉 낯이 뜨뜻하오.” 원계검이 이렇게 말한 끝에 출가 전 작은딸이 하
룻밤새 없어져서 죽었다고 헛장사를 지낸 일을 이야기한 다음에, 남치근의 말하
던 사연을 옮기어 말하고 나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집안에서 우리 내외뿐이
고 외인으로는 지금 남포장이 기연가미연가 하게 알 뿐인데 새로 난 좌포장은
내집과 세혐 있는 사람이니 알기만 하면 온세상 사람이 다 알도록 떠들어놓지
않겠소. 그러면 내가 갓철대를 이마에 붙이고 남의 앞에 나설 수가 있소.” 하고
눈물까지 머금으며 말하였다. 이량이 원계검의 말을 들은 뒤 “김순고가 손을
대지 못하게 하면 염려가 없겠구려. 그만 일이 무에 어렵겠소? 내가 이를 테니
염려 마시오.” 하고 말하여 원계검은 염려가 적이 놓이었다.
새로 제수된 좌변 포도대장 김순고가 처음 시무하기 시작하던 날, 꺽정이 계
집과 졸개들의 구초받아 적은 것을 뒤적뒤적 보다가 종사관 한 사람을 불러서
“원가 성 가진 기집년은 서울 여염 사람의 딸이라구만 했지, 그아비 이름두 없
구 그 본집 동명두 없구 꺽정이의 기집 된 경로두 분명치 않으니 문초를 어떻게
받은 셈인가?” 하고 나무라는 구기로 말을 물으니 그 종사관은 자기가 잘못이
나 한 것같이 황송하여 하며 “그 기집이 하두 깐깐해서 그나마두 받는데 힘이
여간 키이지 않았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깐깐하다구 문초를 건정 했단 말
인가?” “그런 건 아닙지요만 그 기집이 사람이 잔약해서 뺨 한 번 맞구두 까
물치니 어떻게 매질을 할 수가 있어얍지요.” “그 기집과 같이 잡혀온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이라두 조겨서 물어볼 게지.” “재상가의 딸을 꺽정이가 업어내
왔다구 꺽정이의 부하 한 놈이 말하옵는 것을 전 대장 염감께서 미친 놈 소리
한다구 윽박 지르시구 더 캐어묻지 않으셨소이다. 이번 꺽정이의 기집들을 잡게
된 데는 그놈의 내통한 힘이 많습니요만, 그놈이 사람이 실성한 놈 같구 말이
사구일생이외다.” “원씨의 재상가라면 지금 원계검 원판서밖에 더 있나?” “
그놈이 모교다리 원판서라구까지 말하옵디다.” “도무지 새판으루 내가 한번
문초를 받아봐야겠네.” “지금 곧 거조를 차리라구 하오리까?” “오늘은 내가
몇 군데 인사 다닐 데가 있어서 일찍 나가야겠으니 내일 하세.” “소인은 처소
루 물러나가오리까?” “그러게.”
김순고가 종사관을 내보낸 뒤 얼마 아니 있다가 집으로 나가려고 하는 차에
패초령이 내려서 집으로 나가지 못하고 궐내로 들어왔다. 위에서 김순고를 편전
으로 불러들여서 꺽정이의 계집들과 도당들을 곧 전옥으로 보내서 가두게 하라
고 분부를 내리었다. 김순고는 원계검의 딸이란 계집이 아닌가 긴가 밝혀볼 마
음이 골몰하여 “초사의 불분명한 점이 간혹 있사오니 신이 일차 추문하온 후
하옥하면 어떠하올지?” 하고 품하였다. “꺽정의 처와 도당인 것은 분명하지?
” “그는 분명한 줄로 아뢰오.” “그러면 초사를 더 상세히 받을 것이 없으니
그대로 즉시 전옥으로 보내라.” “지당합시외다.” 김순고가 어명을 받고 궐내
에 물러나오는 길로 다시 포청에 와서 꺽정이의 계집 셋과 졸개 셋을 다 전옥으
로 압송시키었다.
노밤이가 치도곤을 맞을 때 상목 한 동 어음쪽을 나중에 사령을 준다고 일시
발림수로 거짓말하고 이튿날 사령 두엇이 간 앞에 와서 어음쪽을 내라고 말할
때, 옷고름을 뜯고 넣어 둔 것이 숭교방을 갔다오는 동안에 길에 빠졌는지 없어
졌다고 거짓말 뒷갈망으로 또 거짓말하여 사령들이 터무니없는 거짓부리로 사람
을 놀렸다고 노밤이를 곧 잡아먹을 것같이 별렀었다. 집장 사령이 어느 때 간앞
을 지나다가 도끼눈을 뜨고 들여다보며 “이놈아, 요 다음엔 대매에 심줄이 끊
어질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벼르는데 “여보 한번 별르지 말구 열 번 치라
는데 사람을 공연히 왜 그렇게 별르우? 상목 한 동은 내가 나가는 날루 곧 여러
분께 내줄 테니 염려 마우.” 하고 노밤이는 이죽이죽 말하였다. “이놈아, 나가
긴 어딜 나가! 궁귀서 다리루 나가?” “나를 상급은 안 주더래두 백방이야 안
할라구.” “백방! 이놈아 쉬어라.” “두구 보우.” “두구 봐야 모가지 뎅겅이
다.” “내가 죽으면 시원할 게 뭐요? 상목 몇 필만 떠나가지.” “상목 소린 다
시 입밖에 내지 마라. 듣기두 싫다.” “지금은 저래두 상목 줄 때는 싫단 말 않
구 여게 노첨지 고마웨하구 받을 테지.” “뒷덜미에서 사자밥을 짊어진 놈이
잘두 너덜댄다.” “실없는 말은 고만두구 내가 언제쯤이나 놓여가겠다구 말들
합디까?” “너이 연놈을 허루이 다스린다구 간관들이 먹어대서 남대장께서 벼
슬이 떨어지셨다. 새 대장이 누가 오시든지 너이는 여기서 초죽엄하구 궁귀서
다리나 당고개에 가서 영죽엄한다. 내 말이 헛말인가 두구 봐라.” 사령이 삵의
웃음을 웃어가며 말하는 것을 듣고 노밤이는 마음이 좀 떨떠름하여졌다.
강도의 초범으로 죽일 죄상이 없는 자는 이마에 강도라고 자자하여 먼 변지로
귀양을 보내고, 또 강도의 처자는 소재관에 관비, 관노를 박는 것이 법전의 정한
형벌이니, 법전대로 시행하면 꺽정이의 졸개 두사람과 계집 세 사람도 다 죽지
않으려든 하물며 노밤이의 공로 있음이랴. 꺽정이의 있는 처소와 계집들과 와주
를 고해 바친 공로가 아무리 줄잡더라도 전에 지은 죄는 넉넉히 대속할 만하므
로 노밤이는 죽을리 만무할 줄 믿고 있었다. 남치근 대에 새로 나는 포도대장이
남치근보다 더 혹독한 사람이라도 억지로 죽을 고에 몰아넣을 리는 없겠지만,
문초는 다시 받기가 첩경 쉬운데 문초를 다시 받는다면 땅벼락같이 벼르는 집장
사령의 손에 치도곤을 맞을 염려가 없지 아니하여 반죽 좋은 노밤이도 치도곤은
무서워서 손톱여물을 썰게 되었었다.
새 포도대장이 등청한 뒤에 문초는 다시 받지 않고 불각시 전옥으로 넘기더니
전옥에서 스물닷근 칼을 씌우고 착고까지 채우는 것이 분명히 사죄수로 다루는
모양이라, 노밤이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노밤
이가 갇혀 앉아서 곰곰 생각하여 보니 상급은 주지 않더라도 포청에서 백방해야
옳을 것을 백방하지 않고 넘기면 형조로나 넘겨야 옳을 것을 형조로도 넘기지
않고 전옥에 갖다 가두어도 유만부동이지 머리에 스물닷근 칼이 당하며 다리에
착고가 당한가. 그러나 옳지 않은 것을 따질 데도 없고 당치 않은 것을 물을 데
도 없으니, 인제는 살지 않으면 죽을 판인데 죽는 것이 얼뜨고 사는 것이 장사
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 설마 아주 죽으랴. 살아나갈 꾀를 이
것저것 생각하는 중에 마침 쇄장이 하나가 창살 앞으로 지나갔다. 쇄장이를 불
러 말을 좀 해볼 생각으로 노방이가 여보여보 소리치니 쇄장이는 한번 흘끗 옆
눈질만 하고 그대로 가버린다. 노밤이가 홀저에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울음소리
가 야단스러울 때 쇄장이가 창살 앞에 와서 들여다 보며 “이놈아, 시끄럽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쇄장이를 부르느라고 우는 울음이라 노밤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내가 원통해서 죽겠소.” 하고 우는 소리로 말하는데, 쇄장이가 무엇이
바쁜지 대꾸도 안허고 또 그대로 가버리려고 하였다. “여보시우, 참봉 나리를
좀 뵙게 해주시우.” “참봉 나리는 왜?” “말씀 여쭐 일이 있소.” “말씀 여
쭐 일이 있거든 뒀다가 지만 올릴 때 실컨 여쭤라.” “내가 역적 고변을 할라
구 그러우.” “역적 고변을 할라면 진작 포청에서 할 것이지 왜 여기 와서 수
선이냐!” “포청에선 고변 안하구두 놓여나갈 줄만 알았더니 인제 할 수 없어
서 고변하구 목숨이나 살아나갈 생각이오.” “내가 말씀을 여쭤 줄 테니 시끄
럽게 굴지 말구 가만 있거라.” 비록 죄수라도 고변한다는 것은 막는 법이 없다.
노밤이가 고변한다고 말한 지 사흘 만에 의금부에서 노밤이를 데려가게 되었다.
여느 사람이 고변을 하여도 죄인같이 몽두를 씌울 뿐 아니라 항쇄, 족쇄까지 다
하였다. 금부 나졸들이 노밤이를 끌고 와서 몽두를 벗기고 항쇄, 족쇄를 풀고 상
투 잡아 끌어다가 당직청 댓돌 아래 꿇여놓은 뒤 번 든 도사가 대청위에서 내려
다보며 “네가 역적 고변한다구 한 놈이냐?” 하고 호령으로 말을 물으니 노밤
이는 가장 황송한 체하면서 “네, 그렇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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