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불호광경이 나지 않두룩 조심하십시오. 저녁 전에 잠깐 뵙구 말씀을 해 드리
려구 한 것이 틈이 없어 못 갔습니다.” 서림이의 소곤소곤 지껄이는 말이 단천
령 귀에는 우뢰같이 울리었다. 단천령이 송구한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고 한참
생각하고 있다가 “여러 사람이 모두 피리를 듣구 싶어하우?” 하고 물었다. “
그러먼요. 피리를 들으려구 밖에 졸개들두 많이 모였습니다.” “여러 사람 낙망
안 되게 한 곡조 불어볼까. 그러구 이왕 불 바엔 청하기를 기다릴 것두 없지.”
“지금 부시렵니까?” “가야고가 끝나거든.” “가야고는 그만 두라지요. 피리
가 어디 있습니까?” “내 창의를 이리 가져오라시우. 소매에 피리가 들었소.”
단천령이 서림이 꾀에 떨어져서 한 곡조 불려고 마음을 먹고 창의 소매에서 학
경골 피리를 꺼내 들었다. 가야금 뜯는 기생은 듣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들어주
지 아니하여 신명이 나지 않는 판에 고만두란 말을 듣고 끝이 조금 남은 타령을
급히 몰아 마친 뒤에 가야금을 밀치고 일어나고, 장고 치는 기생은 서림이의 시
키는 대로 장고를 들고 단천령 뒤에 와서 앉고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은 대개
앉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단청령 앉은 쪽을 바라보고들 있었다. 단청령이 피
리를 입에 대려고 할 즈음, 뒤에 앉은 기생이 “무슨 장단을 치라고 미리 말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여 단천령은 피리를 한손에 들고 뒤를 돌
아보며 “우조 초중대엽부터 삼중대엽까지.” 하고 대답하였다. 단천령이 피리를
입에 갖다 대었다. 피리 소리가 나기 시작였다. 처음에는 여느 사람의 피리나 마
찬가지지 별수가 없었다. 처음 잠깐 듣고 일어서 간 사람이 있다고 치고 그 사
람더러 말하라면 “단천령이 피리를 귀신같이 분다더니 그저 그렇데.” 하고 말
하였을 것이다. 피리가 차차로 조화를 부리는 듯 우수수 지나가는 바람 소리, 딸
딸딸 구르는 낙엽 소리, 사람들의 지껄지껄하는 소리, 모든 소리를 다없이 하여
여러 사람 귀에 들리는 것이 피리 소리밖에 없었다.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이
서로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만 피리에서 어찌하면 그런 웅장한 곡조가
나오며 우스운 피리 소리에 어찌하면 그런 굉장한 기세가 나타날까. 그 곡조는
그 기세를 좀 흔감스럽게 형용하면 큰바람이 바닷물을 뒤집는 듯러고, 바윗덩이
가 높은 산에서 내리구르는 듯하고, 호걸남자가 큰칼 비껴 들고 말을 놓아 천만
진중에서 횡행하는 듯하였다. 형용은 고만두고 말할지라도 대장부의 씩씩한 기
운을 돋워 줄 만하였다.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들이 어느 틈에 단천령 뒤에 와
서 둘러앉았는데 혹 어깨도 으쓱으쓱하였다. 단천령이 우조를 다 불고 뒤를 돌
아보다가 여러 사람 거동을 보고 적이 웃으면서 피리를 다시 불었다. 곡조가 달
랐다. 이번 고조는 처량하였다. 장고 치던 기생이 계면조를 모를 리 없건만 장고
채를 꽂아놓고 가만히 앉았으므로 소홍이가 장고를 끌어다가 끼고 앉아서 피리
를 따라 장단을 쳤다. 춘몽같은 세상이요, 초로같은 인생인데 시름도 첩첩하고
설움도 첩첩하다. 첩첩한 시름과 설움을 피리로 풀어내는 듯 피리 소리가 원망
하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하소연하는 것도 같으나, 어떤 마디는 천연
울음을 우는 것과 같았다. 그칠듯 자지러지는 소리는 목에 메어 울음이 나오지
않는 것 같고 호들갑스러운 된소리는 울음이 복받쳐 터지는 것 같았다. 사람의
울음은 아니나 울음소리 같은 것은 필시 귀신의 울음일 것이다. 오가는 죽은 마
누라의 혼이 와서 울고불고 하는 듯 생각하고 닭의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
다. 다른 두령들도 각기 구슬프고 한심한 생각이 나서 혹은 눈을 끔벅거리고 혹
은 한숨을 지었다. 바깥마당에서는 누가 우는지 흑흑 느끼는 소리까지 났다. 꺽
정이가 마음이 공연히 비창하여지는 것을 억지로 참는 중에 이 광경을 보고 급
히 손을 내저으며 “피리를 고만 끄치우.”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단천령이 못 들
은 체하고 피리를 그치지 아니하여 꺽정이가 벌떡 일어나서 단천령의 팔죽지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단천령은 팔죽지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이쿠 소리를 부
지중에 질렀다. 꺽정이가 잡은 팔죽지를 놓고 “우리 자리루 가서 술이나 더 먹
읍시다.” 하고 말하였다. 여러 사람이 다같이 먼저 앉았던 자리에 와서 다시 좌
정한 뒤에 꺽정이가 주안을 새로 가져오라고 하여 술들을 한 차례 먹고 다담을
잇대어 가져오라고 하여 밤참들을 먹었다. 송도 기생 중의 가야금 뜯던 계집은
단천령 가까이 앉는 것도 호강인 양 생각하는지 술 먹기 전부터 밤참 먹은 뒤까
지 단천령 옆을 잘 떠나려 들지 아니하였다. 서림이가 이것을 눈여겨보고 이봉
학이에게 몇 마디 귓속말을 하더니 자리를 피하고 일어들 설 때, 이봉학이가 그
기생더러 “너는 손남을 뫼시구 가서 오늘 밤에 수청을 자거라.”
하고 일러서 단천령을 딸려 보냈다. 이튿날 식전에 꺽정이가 도회청에 나사서
조사를 마치고 사랑으로 돌아올 때, 서림이가 뒤따라 왔다. “아침 먹으러 가지
않구 어째 왔소? 무슨 할 말이 있소?” “단천령을 어떻게 하실랍니까, 놔보내
실랍니까?” “오늘 보내겠소.” “제 생각에는 아주 붙들어 두어두 좋을 것 같
은데 어떨까요?” “서종사, 피리에 반했구료.” “옛날 초한전쟁 때 한나라 장
자방이 계명산 가을밤에 퉁소를 불어서 초나라 대군을 흩어버린 일이 있답니다.
단천령의 피리가 장자방의 퉁소만 못지 않을 듯한데 붙들어 두면 앞으루 혹시
쓸데가 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 때 적진 군사는 흩지 못하구 자기 군사를
흩으면 어찌하오?” “그거야 미리 단속해 두면 염려없겠지요.” “단천령이 입
당을 할 듯싶소?” “지금은 잘 안할러구 하겠지만 오래 두구 시달리면 모르지
요.” “당장은 고만두구 장래라두 꼭 쓸데가 있다면 또 모르지만 혹시나 쓸데
가 있을까 바라구 귀골 양반을 붙들어 둘 건 없소.” “칠장사 스님 유서에 ‘
삼년적리관산월’이란 글이 있습지요. 단천령을 삼 년 동안 붙들어 두면 그 글
뜻이 맞을 듯 생각이 듭니다.” “관산달이란 말에 이별 뜻이 있다며. 이별이란
좋지 않은 것인데 억지루 맞두룩 할 것 무어 있소.” “저두 꼭 붙들어 두자구
말씀 여쭙는 건 아닙니다.” 이 때 마침 한온이가 퇴 앞에까지 들어오다가 도로
나가는 것을 꺽정이가 열어놓은 방문으로 내다보고 “그게 온이 아닌가? 왜 안
들오구 도루 가나?” 하고 소리하여 한온이가 방에 들어와서 도로 나간 발명으
로 “무슨 의논들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무슨 의논을 하기
루 자네가 피할 까닭 있나.” “말씀할 일이 급한 일이 아니니까 좀 있다 다시
오려구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단천령이 식전 일어나며부터 와서 보입
겠다구 하는 것을 조사 끝나기까지 기다리라구 일러두었는데 지금 데리구 와두
좋을는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오늘 가게 해달라구 나를 보자는 게지.” “아
마 그렇겠지요.” “아침 후에 데리구 오게.” “아침은 먹었습니다.” “나는
아침을 아직 안 먹었는데 나중에 데리구 오라구 통기할 테니 가서 있게.”
한온이와 서림이가 같이 일어서 나간 뒤에 꺽정이는 신불출이를 불러서 아침
재촉을 시키었다. 전날 밤에 꺽정이가 도회청에서 소흥이 집으로 가서 음률 이
야기를 듣다가 그대로 눌러 자고 식전에 기침을 여느때보다 늦게 한 까닭에 자
리조반도 안 먹고 조사를 보러 나갔었다. 꺽정이가 안에 들어와서 아침밥을 먹
을 때, 그 누님 애기 어머니가 상머리에 앉아서 시중을 들면서 “대장두 어젯밤
에 피리 듣고 눈물을 냈다지?” 하고 물었다. “누가 그 따위 소릴 합디까?”
“백손이 외삼촌이 우리를 속였구먼.” “실없는 것이 거짓부리하는 걸 고이듣
는 사람이 딱하우.” “우리만 보고 그런 소릴 하면 곧이 안 들었겠지만 백손이
더러 형님께서 눈물을 내셨다구 하구 바로 점잖게 말하기에 그럴싸하게 들었지.
속은 걸 생각하니 분해 죽겠네.” “누님두 나와 들으셨소?” “죄다 나갔었지.
누구 안 나간 사람 있어.” “그래 안식구들 중에 더러 운 사람이 있소?” “소
리내서 울기까지 한 사람은 갑돌이 처 하나지만 눈물 낸 사람은 한둘이 아니야.
” “갑돌이 처는 아주 통곡을 했소?” “난간 모퉁이에 가 붙어서서 우는 소린
나두 들었서. 그년은 무슨 설움이 그렇게 많아서 통곡까지 했단 말이오?” “그
년이 어느 때는 꼭 산매들린 것 같으니까 매친 증이 났든 거야.” 꺽정이가 남
매 이야기하며 밥을 먹느라고 한동안 늘어지게 안에 있다가 사랑에를 나와 보니
이봉학이, 박유복이, 배돌석이, 길막봉이 네 두령이 사랑에 와 앉아 있었다. 네
두령이 일제히 일어섰다가 꺽정이가 자리에 와서 앉은 뒤에 다시들 앉는데, 그
중의 길막봉이는 이날 탑고개를 나가게 되어서 꺽정이를 보고 가려고 기다리던
차이라 일어선 채로 “저는 지금 탑고개를 나갑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직
좀 있거라.” “무슨 이르실 말씀이 있습니까?” “단천령을 오늘 보낼 텐데 네
가 데리구 나가거라.” “그럼 한두령에게 가서 단천령을 데리구 가겠습니다.”
“가만 좀 있어. 내가 아직 가란 말두 이르지 않았다.” “데리구 나갈 아이들은
도회청 앞에 세워놨는데 그 아이들이나 먼저 내보낼까요?” “가만히 있으라는
데 무슨 잔소리냐!” 하고 꺽정이가 꾸중기 있게 말하여 길막봉이는 입을 다물
고 우두머니 섰다가 다시 주저 앉았다. 꺽정이가 신불출이를 불러서 “한두령에
게 가서 손님을 데리구 오시라구 말해라.” 하고 분부할 때 서림이가 들어오더
니 꺽정이를 보고 “좀 있다 보내시지요.” 하고 말하여 “왜?”하고 꺽정이가
물었다. “제가 지금 한두령에게를 다녀오는데 단천령이 황두령하구 내기 장기
를 둡디다.” “무슨 내기야?” “단천령이 지면 피리를 한번 더 불구 황두령이
지면 탑고개까지 곧 데려다 주기랍디다. 단천령 장기가 황두령하구 맞둘 수가
못되는 걸 황두령이 수를 속이구 한두령과 김두령이 부추려서 내기를 시킨 모양
입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시면 장기판이 깨질 테니 이따가 피리 소리 난 뒤에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은 대답 않고 가지 않고 섰는
신불출이를 돌아보며 “왜 안 가구 섰느냐? 얼른 가서 곧 오시라구 해라.” 하
고 재차 분부하여 내기 장기판을 끝마치게 하려고 청하던 서림이는 더 개구하지
못하였다. 신불출이가간 지 얼마 아니 되어서 한온이가 단천령을 데리고 오는데
황천왕동이와 김산이도 따라왔다. 꺽정이와 먼저 있던 네두령이 밤 잔 인사들을
마치고 여러 사람이 다같이 좌정한 후에 꺽정이가 단천령의 보자는 뜻을 다 짐
작하면서 짐짓 “무슨 일루 나를 보자구 하셨소?” 하고 물었다. “어제두 누누
이 말씀했지만 내가 집에 갈 맘이 일시가 바쁘니 오늘 아침에는 꼭 떠나게 해주
시우. 이 말씀하려구 보입자구 했소.” “당신의 피리가 하두 용해서 우리 중의
반한 사람이 많소. 당신을 붙들어서 한 삼년 같이 지내게 해달라는 청을 내가
받구 왔소.” 단천령은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못하였다. “어제 내가 오늘
보내 드리마구 말했는데 대장부가 일구이언하겠소. 보내 드릴 테니 염려 마시우.
”꺽정이의 말에 단천령은 놀란 마음이 가라앉아서 “지금 곧 떠나게 해주셨으
면 좋겠소.” 하고 바짝 졸랐다. “그리하시우. 서울까지 가실 노수를 드리구 싶
으나 찐덥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고만두구 정으루 조그만 물건 하나를 빌리겠소.
”하고 꺽정이가 옷고름에 찬 먹감나무로 만든 제골장도를 끌러서 단천령을 주
면서 “길에서 혹시 작경하는 자들을 만나거든 이걸 내보이시우.” 하고 말하니
단천령은 인사성으로 한번 치사하고 받았다.
단천령의 노주를 데리고 탑고개로 나가려고 할 때, 송도 기생들이 단천령 일
행과 같이 나가게 하여 달라고 황천왕동이를 졸라서 황천왕동이가 꺽정이에게
말하고 같이 내보내는데 단천령에게 수청든 기생은 일례로 주는 상급 외에 피륙
몇 필을 더 행하여 주었다. 단천령이 길막봉이의 배행으로 탑고개까지 나와서
길막봉이에게 수어치사하고 곧 송도로 향하는데, 몸과 마음이 다 거뜬하여 곧
날 것 같았다. 몸은 나귀 등에 실리었을 망정 마음은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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