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리었던 나비가 거미줄에서 떨어져서 청산으로 날아가는 듯,
조롱에 갇히었던 새가 조롱을 벗어나서 공중으로 날아가는 듯 단천령이
눈뜨고 꾸는 꿈에 나비 되에 너푼너푼 날고 새가 되어 훨훨 날다가 나귀가
넓은 도랑을 건너뛸 때 하마 떨어질 뻔하고 꿈이 깨어졌다.
댕갈댕갈 지껄이는 계집들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적굴에서부터 동행하는
송도 기생 둘이 말들을 옆으로 타고 뒤에 따라오는데, 지껄이는 것은
자기 이야긴 듯 양반 율객이란 말이 귓결에 들리었다. 율객 소리가
귀에는 거치나 마음에 까지는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그보다 더한 소리를 한대도
시들스러웠다. 단천령 눈에 좌우 산천이 처음 대하는 것같이 새로워서 산보고
좋아하고 물 보고 좋하하며 송도부중까지 들어왔다. 송도를 지나면 점심참이 없
으나 해가 점심때가 안 되어서 단천령이 송도서 쉬지 않고 그대고 지나가려 하
다가, 적굴에서 수청든 기생이 저의 집이 멀지 않다고 잠시 들러가라고 붙들어
서 그 기생의 집에 가서 점심 대접을 받고 묵어가라고 붙드는 것은 못하겠다 떼
치고 떠나왔다. 장단읍내 숙소할 작정하고 나귀를 술렁술렁 걸리었다. 어느덧 널
물이를 지나서 어룡개 앞길에 당도하여 산 한모퉁이를 돌아서자, 수건으로 머리
를 질끈질끈 동인 놈 서넛이 길가에 주저 앉았다가 죽들 이어섰다. 단천령의 하
인이 얼른 지나가려고 나귀를 채쳐 모니 세 놈이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하인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단천령을 치어다보고 단천령은 태연하게 나귀 등에 앉아서
세 놈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내려라!” 하고 한 놈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
서는데 단천령은 예사 언성으로 “왜 내리라느냐?” 하고 뇌까렸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 모르겠느냐? 노수 다 내놓구 나귀까지 두구 가거라.” 단
천령은 꺽정이 장도가 문득 생각나서 “보여 줄 만한 물건은 하나 있거니”" 하
고 말하며 창의 소매에 든 장도를 꺼내서 앞에 나선 놈을 내주었다. 그놈이 장
도를 받아들고 보는데 두 놈마저 와서 들여다보더니 세 놈이 서로 돌아보면서
혹 입도 벌리고 혹 고개도 흔들었다. 장도 가진 놈이 단천령을 치어다보며 “이
걸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하고 깍듯한 말씨로 물었다. “장도 임자에게서 얻
었지 어디서 얻어?” “녜, 그러십니까. 그러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자, 어서 행차합시오.” “장도는 나를 도루 주어야지.” “녜, 예 있습니다.”
단천령이 어룡개 앞길 후미진 곳에서 적환을 면한 뒤 꺽정이의 장도가 값 있는
줄을 밝히 알았다. 이날 밤에 장단 숙소하고 이튿날 낮에 파주 중화하고 고양으
로 오는 길에 혜음령 중턱에서 단천령은 또 화적을 만났다. 화적 댓놈이 내달아
서 길을 막으며 “나귀, 게 세워라!” 하고 소리지를 때, 단천령은 화적들을 가
까이 오라고 손짓하여 불러다가 겉고름에 찬 장도를 보라고 내밀었다. 화적 한
놈이 저의 동무들더러 “청석골 대장의 표신일세.” 하고 말한 뒤 길들을 비키
었다. 고양음에서 숙소하더라도 내일 입성하기는 일반인데, 단천령은 단 십리나
마 서울 더 가까이 오려고 새원 와서 숙소하고 이튿날 일찍 떠나서 아침결에 녹
번이고개를 넘어올 때 어떤 사람 하나가 나귀 머리에 와서 굽실 절을 하였다.
단천령이 전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누군고?”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누구
란 말은 하지 않고 “청석골서 장두 가지구 오시는 행차시지요?” 하고 되물었
다. “그걸 어찌 알구 묻나?” “다 압니다. 그 장두를 이리 줍시오.” “그건
돼 달래?” “찾아보내란 기별이 왔습니다.” “청석골서 사람이 왔단 말이야?
” “녜, 그저께 왔다 갔습니다.”“무어야? 내가 그저께 청석골서 떠났는데.”
“오지 않은 걸 왔달 리가 있습니까. 황두령이 그저께 왔다 갔습니다.” “황두
령이라니 장기 잘 두는 사람 말인가?” “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그저께
청석골 있었는데 무슨 당치 않은 소린가?” “황두령이 장기 잘 두는 건 아셔두
축지법하는 건 모르십니다그려. 요새 해에두 서울을 차례 도다녀갈 겁니다.” 단
천령은 더 말 안 하고 곧 장도를 끌러서 그 사람을 내주었다. 단천령이 입성한
뒤 불과 삼사 일쯤 지나서부터 단천령의 봉변한 이야기가 남북촌 사랑의 이야깃
거리로 돌기 시작하였다. 당시 병조판서 권철이 어느 날 밤에 문객 사오
인을 불러놓고 세상 소문을 이야기시키고 듣는 중에 문객 하나가 “종실 단천
령이 청석골 적굴에 붙잡혀 가서 피리 불구 대접받은 이야기를 들어 기십지요?
” 하고 물으니, 권판서는 고개를 한두 번 가로 흔들며 “못 들었네.” 하고 대
답하였다. “단천령 이야기가 요새 파다하든데 어째 대감께서 이때까지 못 들으
셨습니까?” “파다한 이야기를 인제라도 좀 듣게 이야기하게.” 그 문객이 단
천령 이야기를 몰라서 빼기도 하고 꾸며서 보태기도 하여 일장 이야기를 마치
자, 다른 문객 하나가 그 뒤를 받아서 황해도 선비들의 소조를 이야기하는데 주
워 들은 소문이라 죽은 사람과 살아간 사람의 수효가 다 틀릴뿐더러 사실과 뒤
쪽으로 말을 뻣뻣하게 한 사람들은 모두 죽고 창피하도록 애걸복걸한 사람은 살
아갔다더라고 이야기하였다. 단천령 이야기가 태반 터무니도 없는 이야기를 여
러 문객들이 받고채기로 지껄인 끝에 먼저 단천령의 일을 이야기하던 문객이 주
인 대감을 보고 “꺽정이 같은 근고에 없는 큰 도둑놈을 조정에서 얼른 잡아 없
앨 도리를 차리지 않는 것이 웬일이오니까?” 하고 물은즉 권판서는 잠자코 쓴
입맛만 다시었다.
매일 상참에는 임금이 편전에서 신하들은 접견하고 간인 조참에는 임금이 정
전에서 신하들 조회를 받던 것인데, 상참과 조참이 연산주 때 정지된 뒤 거의
빈 이름만 남게 되어서 근신 외에는 신하들이 임금을 면대할 기회가 드물었다.
권판서가 재상 몇 사람과 서로 의론하고 같이 예궐하여 위에 알현을 청하여 편
전에서 면계로 아뢰기를 “황해도 대당 근포하올 방책은 삼공이 이미 아뢰온 일
도 있솝거니와 근래 적세가 점점 더 성하와 행려를 욕보이는 건 여차이옵고 살
육까지 낭자히 하옵는 까닭에 서관대로에 행려가 두절될 지경이오며 심지어 조
관이라 칭하옵고 기탄없이 각군에를 출입하옵는대 수령이 혹 모르고 접대까지
한자가 있었다 하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어데 있소리까. 본도에서 체포한다는
선성이 나오면 으레 강원도나 평안도로 도망하옵는데, 강원도에는 이천지경에
소굴이 있솝고 평안도에는 양덕, 맹산지경에 소굴이 있다고 하옵건만 양도의 감
사나 병사가 체포할 방법을 강구한단 말이 없사오니 이것은 잘못된 일이외다.
속히 체포하도록 비밀히 하유하옵소서. 또 그 흉악한 대당이 황해도에서 재물을
약탈하와 개성부중에 가져다가 판매하기도 하옵고 도성 안에 와서 거접하기도
한다고 하오므로 포도대장을 시켜 비밀히 근포라게 하였솝는데, 체포할 조처를
한단 말이 없사오니 이것은 미타한 일이외다. 포도대장과 종사관들은 추고시켜
그 한만한 것을 징계하옵시고 부장 군관들은 사목을 따라 치죄하게 하옵시고 금
군은 각별 택차하게 하옵소서.” 대개 이와 같이 아뢰어서 위의 윤허를 물었다.
육칠 일 후에 사간원 간관들이 초기로 합계를 올리었는데, 그 계사는 이러하였
다. “황해도 한 도가 도적의 소굴이 되어서 행인을 무참히 죽이거나 잔생이 욕
보이와 도로가 막히게 되옵고 약탈한 물화를 싣고 서울와서 숨어 파옵고 조관이
니 감사의 친족이니 하고 각군의 허실을 엿보고 다녔다 하오니 이건 근고에 없
는 변이라 어찌 놀랍지 않사오리까. 수색하고 체포하는 건 수령들의 할 일이오
나 명령은 감사에게서 나올 것이온데 황해감사 유지선이 한 방면 전제의 책임을
맡아가지고 간 지 지금 벌써 삼사 삭이 되옵건만, 도적 잡을 방략을 세운 것이
조금도 없고 대적이 친족이라 하고 횡행한 일을 일찍 장계도 않고 덮어두었사오
니 이런 미타한 일이 어디 있사오리까. 속히 체차시키시고 문무 겸전한 사람을
각별 택송합셔서 도적을 섬멸하와 지방을 간정케 하심을 바랍니다.” 위에서 간
관들의 계사대로 하라 처분을 내려서 이삼 일 후에 김덕룡이란 재상이 유지선을
대신하여 황해감사로 나가게 되었고, 새 황해감사는 윤지숙이 적당에게 수치당
한 것을 들어 아는 까닭으로 도임초에 장파하고 신계현령 이흠례가 그 대에 봉
산군수로 승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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