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이가 우두머니 서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이춘동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산역하는데
와서 일을 보았다. 해질 무렵에 상행이 들어와서 전을 지낸다. 상두꾼 술을 먹인다,
한참 수선한 중에 이춘동이가 저녁 먹으러 가자고 부르러 와서 김산이는 가까스로 틈
을 타서 주상하는 늙은이에게 의외에 옛친구를 만나서 그 사람의 집으로 저녁밥
먹으러 간다고 말하고 이춘동이를 따라왔다. 이춘동이의 집은 산밑에 있는데 집
이 커서 어림에 한 이십 간 되는 것 같았다. 바깥방은 치지 말고 안으로만 방이
셋인데, 그 중의 제일 작은 아랫방도 간반이 이간같이 널찍하였다. 이춘동이의
어머니는 환갑 늙은이가 칠십이 넘어 보이도록 나이보다 더 늙었고, 이춘동이의
안해란 안핸지 첩인지 춘동이보다 근 이십 년 아래 될 듯 젊어 보이었다. 김산
이가 이춘동이의 끄는 대로 먼저 춘동이 어머니 거처하는 건넌방
에 들어가서 잠시 동안 앉았다가 건넌방에서 나오는 길에 춘동이 내외 쓴다는
안방을 들여다보고 나중에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얼마 아니 있다가 저녁밥을 내
와서 주인 손 두사람이 겸상하여 먹는데 닭을 몇마리나 잡았는지 국에도 닭고기
요, 지지미에도 닭고기요, 구운 고기도 닭이요, 볶은 고기도 닭이었다. 반주 먹고
밥 먹고 다 먹은 밥상을 내보낸 뒤 이춘동이가 김산이더러 “인제 자네 이야기
를 좀 듣세.” 하고 말하였다. “재미두 없는 이야기를 듣기가 그리 바쁜가?”
“대체 자네가 지금 어디 있나. 금교역말 있나?” “나 있는데를 몰라서 궁금한
가? 황해도 선화당에 있네.” “정당하게 묻는데 실없은 말루 대답하는 것이 그
게 친구 대접인가.” “이야기를 하자면 순서 차려 해야겠네. 우선 자네가 나를
찾아다니던 이야기부터 마저 하게. 그래 적성 가서 어떻게 했나?” “적성 가선
마전으로 이사간 것을 알구 또 마전 가선 기집년과 총각놈을 죽여놓구 도망한
것을 알았네.” “그럼 내가 그 연놈 죽이던 날 밤 일부터 이야기함세.” 하고
김산이는 곧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김산이가 자기 데리고 살던 계집의 행실이
원래 부정하던 것과 그날 저녁때 젊은 과객이 와서 자자고 청하는데 계집의 눈
치가 달라서 일부러 과객을 재우고 초상집에 밤새임하러 가는 체하고 숨어서 엿
본 것과 계집이 정을 돋우다 못하여 나중에 막 달라붙는 것을 그 과객이 끝끝내
받자하지 않은 것과 과객을 죽이려던 칼에 옆집 총각놈이 죽게 된 것을 죽 내려
이야기하고 잠깐 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그 과객과 같이 밤길을 걷는 중에 그
과객이 청석골 두령 황천왕동인 줄을 알게 된 것과 황천왕동이를 따라서 청석골
을 왔더니 임꺽정이가 백부에게 검술을 배운 사람인 까닭으로 백부를 생각하고
특별히 후대하여 대번 두령을 시켜 준 것과 이번에 도중을 대표하여 어물전 초
상에 일 보아주러 온 것을 다 까놓고 이야기하였다. 이춘동이가 김산이의 이야
기를 듣고 난 뒤 “자네를 내가 수상스럽게 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청석골 대당일
세그려.” 하고 싱그레 웃었다. 이때 일꾼 하나가 와서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며
아랫말 간다고 말하는 것을 이춘동이가 좀 있다 가라고 이르고 그 일꾼의 발꿈
치도 미처 돌아서기 전에 김산이더러 “임꺽정이 사람이 대체 어떤가. 같이 지
낼 만한가?” 하고 물었다. 김산이는 얼굴빛을 변하고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그
일꾼이 바깥방으로 나가는 듯 신발 소리가 멀어진 뒤 이춘동이를 보고 “나는
자네를 아이 적 친구루 믿구서 못할 말 없이 다 했더니 믿은 보람이 없네.” 하
고 책망을 하였다. “일꾼은 자네를 밀고할 사람들이 아니니 안심하게.” “일꾼
이 밀고할까 봐 겁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닐세. 자네가 친구의 비밀한 이야기를
누설시키는 것이 섭섭하단 말이지.” “자네가 우리 집에서 역적모의를 하더라
두 밖에 누설될 리는 만무하지. 내가 목벨 다짐함세. 임꺽정이 이야기를 나두 듣
긴 많이 들었네만 도청도설을 준신할 수 있나. 자네가 친히 겪어본 걸 좀 이야
기하게.” “그보다두 자네 소경력을 먼저 좀 듣세.” 이춘동이는 김산이 백모의
친정 조카니 본래 양주 어둔리 사람이다. 춘동이 열아홉 살때 장가든 색시가 입
이 싸서 시어머니 말대답을 네뚜리로 하고 주책이 없어서 동네로 돌아다니며 말
질을 일쑤 잘하여 시어머니와 갈등이 나고 동네 여편네들과 무릎맞춤이 자주 났
었다. 춘동이가 처음에 그저 구박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소박하여 친정으로 쫓으
러 든즉 죽는다고 독살을 부리더니 참말 어느 날 춘동이 모자 집에 없는 틈에
보꾹에 목을 매고 죽어 버렸다. 색시 친정 쪽의 친오라비, 사촌오라비 여러 종형
제가 사람들이 모두 불량하여 춘동이 모자를 저의 누이 죽인 원수라고 때려죽인
다고 서두는 통에 춘동이 어머니가 외아들 춘동이 몸에 무슨 일이 있을까 겁이
나서 맞아죽어도 좋다고 배짱 부리는 춘동이를 달래어 데리고 어둔리서 도망하
듯 서울로 올라왔었다. 서울서 남의 집 행랑살이를 하는 중에 춘동이가 못된 동
무들을 사귀어서 술을 배우고 노름을 배우고 또 도적질을 배워서 어머니의 속을
무척 썩어 주었다. 춘동이의 친한 동무가 난전을 벌였는데 물건을 팔아서 동무
일을 도와주기 겸 장사한다고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여 주려고 난전 물건을 가지
고 시골로 내려다니다가 한번 평산서 해주로 나가는 길에 우연히 운달산패의 연
줄을 얻어서 바로 입당하고 서울 어머니를 운달산으로 데려 내려왔었다. 춘동이
가 여력도 세거니와 사람이 기걸하여 괴수 박연중의 눈에 들어서 괴수의 버금가
는 수령 노릇까지 하였는데, 운달산패가 관군에게 소탕을 당하여 풍비박산 흩어
질 때 춘동이는 박연중이와 같이 해주따에 가서 숨어 살다가 마산리로 이사온
지 이때 불과 일 년 남짓 되었었다. 이춘동이가 열아홉 살 이후 소경력을
다 이야기하고 김산이와 서로 보고 웃는데, 두 사람의 웃음이 다같이 서글픈
웃음이었다. 밤이 이슥하여 김산이가 상행 묵는 집으로 다시 올때, 이춘동이는
아랬말 간다던 일꾼을 불러서 관솔불을 들리고 자기도 같이 나와서 그 집까지
데려다 주고 갔다.
진시초가 지나야 해가 뜨는 시월 그믐새 하관시가 사시초라, 시각을 대기가
바쁘지마는 광중은 전날 낮에 만들어놓고 다른 준비는 전날 밤에 다 해놓은 까
닭에 일이 몰리지않고 제 시각에 하관하게 되었다. 오시가 지나기 전에 평토가
끝이 나서 반우가 떠나갈 때 김산이는 어물전 늙은이를 보고 “나는 친구에게
붙들려서 이삼일 후에난 가겠으니 우리게서들 기다리지 않두룩 기별 좀 해주시
우.” 하고 부탁하였다.
이춘동이가 일부러 데리러 산으로 올라온 것을 김산이는 이왕 보아주던 일이
니 봉분 짓는 것까지 마저 보고 간다고 춘동이를 먼저 내려보내고 한낮이 지나
기까지 산에 있다가 춘동이 집으로 내려왔다. 춘동이는 대장간에 나가서 집에
없고 춘동이 어머니가 아랫방 문을 열어주며 들어앉으라고 권하는데, 김산이가
춘동이의 대장일 하는 꼴을 구경하러 간다고 동네 밖에 있는 대장간을 찾아 나
왔다. 게따지 같은 대장간 속에 맨 뒤에는 일꾼하나가 풀무 위에 올라서서 풀무
질을 하고 모루 뒤에는 춘동이가 왼손에 집게 들고 바른손에 마치 들고 불속에
들여다보고 앉았고 춘동이 앞에는 일꾼들이 메들을 거꾸로 세우고 쇠 위에 팔들
을 걸치고 섰고 대장간 앞에는 동네 사람 서넛이 쪼그리고들 앉았는데, 둘은 고
누를 두고 하나는 옆에서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뒤에 춘동이가 불속에서
발갛게 단 쇠를 집게로 집어내서 모루 위에 놓고 마치질을 하는데 마치질 한번
에 메질 한번씩 쌍메가 번갈아 들었다. 마치질소리와 메질 소리가 고저장단이
서로 맞았다. 한동안 지나서 마치질이 그치고 메질하는 일꾼들이 다시 쉬게 되
었을때, 그중의 하나가 대장간 뒤 둑에 올라섰는 김산이를 보고 춘동이더러 말
하여 춘동이가 돌아다보면서 “어째 여기를 나왔나? 우리 집으루 들어가게. 나
두 곧 들어감세.” 하고 말하였다. “어서 일이나 하게. 나는 여기서 구경하겠네.
” “네일 발매 간다구 낫하구 도끼들을 벼려 달래소 끌려나왔는데 자네 내려오
기 전에 다 해치운다는 것이 그렇게 못 됐네.” “자네 어머니께 말씀 듣구 왔
네.” “어머니하구 이야기나 하지 왜 나왔나?” “자네 일하는 구경 하려구.”
“그럼 구경하게. 인제 도끼 둘, 낫 하나 남았는데 곧 다 되겠네.” 김산이가 둑
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쇠를 불리고 이기고 담그는것을 구경하는 중에 대장일이
끝이 나서 춘동이가 마치, 집게 다놓고 일서서는데, 고누 구경하던 사람이 맨 나
중에 벼려 내놓은 낫을 들고 보며 “이렇게 건정으루 벼려서는 며칠 못 쓰구 도
루 무돼지겠네.” 하구 두덜거리니 이춘동이는 “여게 이 사람, 이번을 용서하
게. 이담 번에 맘먹구 잘 벼려 줌세.” 하고 너스레를 놓았다. 이춘동이가 일꾼
들더러 “뒤에 너희들이 다 치우구 들어오너라.” 하고 말을 이르고 둑 위로 올
라왔다. 김산이가 이춘동이와 같이 동네로 들어오는 길에 “자네가 일꾼들더러
해라를 하니 무어 되는 사람들인가?” 하고 물을니 이춘동이는 웃으면서 “왜
일꾼들더러 해라 못하나?” 하고 되물은 뒤 “전에 앞에 두구 부리던 아이들일
세.” 하고 말하여 전날 밤 일꾼 듣는데 꺽정이 말을 펼쳐놓고 묻던 것이 비로
소 해혹이 되어서 김산이는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었다. 이춘동이가 김산이와 같
이 집에 와서 김산이는 먼저 아랫방에 들여 앉히고 자기는 질자배기에 물을 떠
다가 아랫방 앞에서 세수를 할 때 춘동이 어머니가 위채에서 내려와서 “저녁을
기다리자면 시장들 하지 않으까.” 하고 물으니 이춘동이가 물 묻는 얼굴을 들
고 그 어머니를 치어다 보며 “시장하다면 무어 먹을 걸 주실라우?” 하고 되물
었다. “애기 어미가 술을 걸러놨단다.” “지금 속이 출출한데 한 사발 먹었으
면 좋겠소. 안주두 많이 놔서 내려보내시우.” 춘동이 어머니는 위채로 도로 올
라가고 이춘동이는 얼굴에 수건질을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 뒤에 춘동이
안해가 알방구리 위에 납작소반을 얹어서 들고 내려왔는데 소반에는 대접에 담
은 편육과 보시기에 떠놓은 장물과 술 먹을 사발과 편육을 집을 젓가락이 늘어
놓였고 방구리에 담긴 것은 탁배기였다. 이춘동이가 소반과 방구리를 받아서 방
에 들여놓으며 “고기를 좀 많이 놓지 요게 무어야!”하고 안주를 투정하니 며
느리 뒤를 따라온 춘동이 어머니가 “아주 많이 저며서 한 목판 담아놨다. 나중
에 더 갖다 먹어라.” 하고 아들더러 말한 뒤 김산이를 보고 “김서방, 우리 아
들하구 개고기 누가 많이 먹나 내기해 보게.” 하고 웃으며 말하였다. “목판에
담아놨다는 고기를 아주 이리 가져오게.” 하고 이춘동이가 그 안해에게 말을
일러서 다시 가져온 고기는 쪽 목판일망정 그리 적지 아니한데 수북하게 담기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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