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오두령하구는 못볼 사인가?” “나까지 따라가서 무어하나. 자네들 둘이
만 잠깐 갔다오게.” 한온이와 이춘동의 수작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앉아서
웃기만 하던 김산이가 이춘동을 보고 “가기 싫다는 사람은 고만두구 우리만 갔
다오세.” 말하고 먼저 일어났다. 이춘동이가 김산이를 따라가서 오가를 인사하
고 도로 올 때 “오씨가 쉰셋이랬지? 어디 오십 넘은 늙은이 같은가. 우리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지 않데. ”“상배하기 전까지는 흰털 하나 없었는데 지금은
수염이 희끗희끗해서 늙은이 같지.”“지금두 박두령보다 되려 젊어 보이데. 박
두령은 거의 반백이데그려.” “박두령은 조백이지.” “오씨가 이름은 무언가?
” “오두령의 이름은 오래 같이 지낸 박두령두 몰랐었는데 연전에 한두령의 아
버지 한첨지가 대장을 가르쳐 드려서 다들 알게 되었다데.” “그래 무어야?”
“개도치라네.” “개도치 . 꺽정이 이름들은 다 훌륭하지 못한걸.” 하고 서로
지껄이며 한온이 집 앞에 와서 한온이를 불러내서 다시 셋이 같이 꺽정이의 사
랑으로 왔다. 이춘동이가 꺽정이게서 점심때 술대접을 받고 여러 두령들과 같이
담화하는 중에 해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할 때,
특히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들을 돌아보며 내일은 일찍 떠나겠다고 말을
하고 그 다음에 특히 꺽정이를 보고 평생에 한번 만나보기를 원하다가 이번에
와서 원을 이루고 가노란 뜻을 말하는데, 꺽정이가 말을 다 못하게 가로막고 “
오늘까지는 산이게서 묵구 내일부터는 내게 와서 며칠 동안 묵다가 가우.” 하
고 만류하였다. “산이게서나 뉘게서나 이 산 안에서 묵으면 다 대장댁에서 묵
는셈인데 따루 내게 와서 묵으라시나 그게 웬 말씀이우?” “소뿔두 각각이라
우. 내일부터는 내가 동향 친구를 대접해야겠소.” “어젯밤 오늘 낮 술대접에
동향 친구가 맘이 흐뭇했소.” “어제 오늘 술잔 낸 건 내 동무의 친구 대접이
지 내 친구 대접은 아니오.” “관곡하신 뜻은 감사하나 집에서 곧 올 줄 알구
기다릴 테니까 내일 가야겠소.” “못 가우. 내가 놔보내지 않겠소.” “집에 가
서 볼일이 있으니 이번은 놔주시우. 이 담에 다시 와서 동향 친구 대접을 실컨
받으리다.” “볼일 있는 사람이 오긴 왜 왔소?” “핑계가 아니오. 산이는 알지
만 우리 어머니 환갑이 이 달인데 미비한 것이 많아서 가봐야겠소
.” “환갑잔치의 미비한 것은 내가 준비해 줄 테니 염려 마우.” “아니오. 내
가 집에를 가서 준비할 일이 많소.” “환갑날이 어느 날이오?” “스무엿샛날
이오.” “이십여 일을 두구 준비할 일이 무어요? 내가 심사 틀리면 환갑날두
못 가게 붙들어 둘 테니 공연히 여러 말 마우.” 꺽정이 말에 눌려서 이춘동이
는 간단 말을 더 세우지 못하였다.
이춘동이가 꺽정이에게 붙들려서 묵는 중에 여러 두령과 서로 너나들이들까지
하게 되고, 또 청석골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게 되었다. 이춘동이가 황천왕
동이를 앞세우고 뒷산 너머 곽오주의 집을 구경하러 가는데 김산이더러도 가자
고 하는 것을 김산이는 이춘동이 없는 틈에 입당시킬 의논을 하려고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김산이가 꺽정이를 보러 왔을 때, 말썽쟁이 서림이가 꺽정이 옆에
앉아 있어서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춘동이더러 입당하라구 권해
보오리까?” 하고 꺽정이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꺽정이가 김산이의 말을 “그래
봐라.” 하고 간단하게 대답한 뒤 서림이를 돌아보며 “서종사 보기엔 춘동이
사람이 어떱디까?” 하고 물으니 처음에 공연히 의심하던 서림이도 “사람이 너
무 고지식한 것이 병통이나 솔직한 것만은 가취할 점인 것 같습디다.” 하고 대
답하는 것이 이제는 의심할 나위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날 밤 여러 두령이 꺽정
이 사람에 모여서 이야기들 하는 중에 박연중이의 처신하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서림이가 명철보신 이라고 칭찬하다가 꺽정이가 후기 없는 늙은이의
일이라고 타박하는 바람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고 우물쭈물 자기의 말을 거두
어치웠다. 박연중이 이야기 끝에 꺽정이가 이춘동이를 보고 “자네가 연중이 노
인의 부하 노릇만 하구 내 부하 노릇은 안 할라나? 내 부하 노릇두 좀 해보게.
” 하고 입당을 권하니 이춘동이는 웃으면서 “나는 팔자가 남의 부하 노릇만
할 사람인가?” 하고 실없는 말을 한마디 한 뒤 곧 정중한 말로 “내가 소시적
에 어머니 말을 안 들어서 어머니 속을 무척 썩여 드렸소.그래 서울서 평산으루
뫼셔올 때 이후는 말을 잘 듣겠다구 어머니 앞에서 맹세를 했었소. 박대장하구
같이 살지 않고 마산리루 따루 이사온 것두 어머니 말을 순종한 게요. 아까 저
녁때 산이가 나더러 이번에 입당하구 가라구 조르는데 내가 어머니 허락을 받은
뒤에 다시 와서 입당하마구 대답했소. 지금 대장께두 그 밖에 더 대답할 말씀이
없소.” 하고 입당 바로 못할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이춘동이가 다른 두령들과는
맞히게를 하되 꺽정이에게만은 기꺽하여 반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오를 하였
다. 여러 두령이 떠받드는 사람을 하게하기가 거북도 하가니와 그보다도 꺽정이
의 기안에 눌려서 하게가 잘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춘동이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꺽정이는 잠자코 있고 대신 여러 두령들이 제가끔 말 한마디씩 하였다. “
비싸게 굴지 말게.” 황천왕동이의 조소와 “자네가 아직 어머니 젖꼭지를 못
떨어진 어린앨세그려.” 한온이의 농은 말할 것 없고 “효잘세. 가만 두게.” 배
돌석이의 빈정대는 말과 “입당하기가 싫거든 바루 싫달 게지 구차스럽게 무슨
핑계람.” 길막봉이의 게먹은 말을 대꾸 안 하던 이춘동이가 “그년의 늙은이
처치하기 어렵거든 날 불러가게. 도리깨루 대갱이를 바시어 줄께.” 곽오주의 무
식스러운 말은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든지 “천생 도리깨 도둑놈의 말본새
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서림이가 정당한 말을 자기 입에서 들으란 듯이 먼저
“여게 내 말좀 듣게.” 하고 허두를 내놓고 “자고로 부인네가 지아비 죽은 뒤
에 아들을 좇으란 법은 있지만 사내자식이 아비 죽은 뒤에 어미를 좇으란 법은
없는데, 지금 자네는 매사에 어머니 말을 좇는다니 이건 옛날 성인들의 마련해
놓은 법과 뒤쪽일세.” 하고 교훈하듯 말하였다. 서림이 말한 뒤 이봉학까지 마
저 “자당이 운달산에는 가서 기시구 청석골은 못 와 기시겠다구 하실 리가 없
을 테지.” 한마디 차례에 빠지지 않고 박유복이와 김산이 두 사람만 말이 없었
다. 박유복이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앉았고 김산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돌아보았다. 김산이의 웃는 속은 이춘동이 입당하기를 제일 바라는
사람이 입당 않는다고 몰아세우는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좋아하는 것이려니와,
박유복이 속은 좌중의 제일 눈치 빠른 서림이도 짐작 못하여 “박두령 어디 불
편하시우?” 하고 물으니 박유복이는 천천히 고개를 치어들고 풀기 없는 말로
“나는 춘동이 어머니 파는 것이 부럽소.” 하고 말하는 것이 이춘동이 사정 이
야기에 감촉되어서 자기의 죽은 어머니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담화가
그치어서 방안이 조용하였다. 이춘동이는 자기 까닭으로 자리가 버성겨지는 것
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좌중을 한번 돌아본 뒤 꺽정이를 향하고 앉아서 “산이가
나를 끄는 것은 아이 적 동무의 정분이지만 여러분 친구들루 말하면 초면 만난
처지에 나 같은 하치않은 사람을 사생동고할 만한 사람으루 쳐주니 내 뼛속까지
사무친 감사한 맘을 말루 이루 다할 수가 없소. 내가 가서 어떻게든지 어머니의
허럭을 받아가지구 오리다. 내가 정히 조르면 어머니 맘에 싫더라
두 허락하실 줄 아우. 그럴 리는 만무하지만 어머니가 종시 허락을 안 해서 다
시 못 오게 되면 나는 죽음으루 여러분 친구께 사과하겠소.” 하고 말하는데 결
심한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꺽정이가 이것을 보고 “자네가 그렇게까지 맘을
먹을 것 같으면 먼저 입당하구 가서 나중 허락을 받두룩 하게.” 하고 말하니
“그건 어머니를 속이는 게니까 그렇겐 못하겠소.” 하고 이춘동이는 왼고개를
쳤다. “그래 다시 온다면 언제쯤 오겠나?” “어머니 환갑이나 지내구 오겠소.
” 꺽정이가 고개를 한두 번 끄덕인 뒤 “환갑 때 산이를 오라구 청했다지? 나
는 좀 청하지 않나?” 하고 말하며 웃었다. “실없는 말씀이지. 그런 한만한 길
을 하실 리 있소.” “나더러는 오지 말란 말일세그려.” “그때 만일 오시면 박
대장하구 두 분이 만나실 수는 있지.” “연중이 노인이 온다구 했나?” “지난
날 초생 뵈러 갔을 때 오신다구 말씀합디다.” “경사술 얻어먹구 오래 못 만난
사람 만나구 겸두겸두 가겠네. 산이하구 같이 갈 테니 그리 알구 기다리게.” “
어머니 하락만 얻으면 나는 그때 아주 마산리 살림 명색을 거둬치우구 식구 데
리구 따라오겠소.” “살림을 그렇게 쉽사리 거둬치울 수가 있을까?” “집하구
밭뙈기는 동네 사람에게 맡겨두었다가 나중에 팔아오지요.” “그건 자네 요량
해 할 일일세.” “내가 여기 온 지가 벌써 나흘이오. 내일은 가게 해주시우.”
“그러게. 내일은 가게.” 이날 밤 밤참으로 술들을 먹을 때 여러 두령들이 작별
술이라고 자꾸 권하여 이춘동이는 양에 지나는 술을 먹었건만,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조반 요기하고 바로 떠나는데 꺽정이가 환갑네 물품을 부조하고 그 물
품을 지워가라고 졸개 하나까지 주었다.
김덕룡이란 문무 겸전한 사람이 새로 황해감사로 내려온다는 기별이 청석골에
들어온 것은 이춘동이가 와서 있을 때요, 신계현령 이흠례가 봉산군수로 승탁되
어서 편도 부임한다는 소식을 청석골서 들은 것은 이춘동이가 돌아간 뒤 한 보
름 가까이 되었을 때다. 꺽정이가 봉산군수 갈린 소식을 듣던 날 불시에 여러
두령을 모아놓고 “신계현령 이흠례가 봉산군수루 승탁이 되었다니 그눔을 가만
둘 수가 없는데 어떻게 처치하면 좋을까.” 하고 이흠례 처치할 의논을 시작하
였다. 서림이가 꺽정이 말의 뒤를 받아서 “이흠례가 재간이 좀 있다구 조정에
서 특별히 승탁시킨 모양이구먼요. 그자가 신계 구석에 있어두 성가시었는데 봉
산에 나와 앉으면 봉산 이서 왕래에 여간 성가시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처치해
야지요.” 하고 말할 뿐이고 다른 두령들은 잠자코 있는데, 중대한 회의라고 빠
지지 않고 참례한 오가가 꺽정이를 보고 “이흠례는 윤지숙이와두 달라서 워낙
가만놔둘 수 없는 놈이오. 그놈 손에 잡혀 죽은 여러 두목들의 원수두 갚아 주
는 것이 좋지않소. 그러니 그놈은 잡아서 죽이두룩 합시다. 그놈을 죽이면 우리
의 위엄두 서구 우리의 후환두 없을 것이오.” 하고 말한 끝에 “자네들 생각엔
내 말이 어떤가.” 하고 여러 두령을 돌아보니 다들 좋다고 그 말에 찬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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