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까 구로정에서부터는 거의 내닫다시피하여 냇물을 건너고, 날아가듯 중뜸
고샅에 이르자 숨이 턱에 닿았는데, 집의 대문, 중문을 들어서면서는 자기도 모
르게 큰 소리로 토하듯이 어머니를 먼저 부른다. 건넌방 문이 열리며 율촌댁이
내다본다.
"?"
강모는 순간 의아하였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면 어머니가 저리 한가롭게
건넌방에 계실 리가 있는가... ,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어서 오너라."
목소리에 반가움이 피어난다. 그러고 보니 집안 또한 우환이 있는 집 같지 않
고 평온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강모는 우선 댓돌 위에 구두를 벗는다. 율
촌책은 강모가 마루로 올라서기를 기다려 큰방 문을 먼저 연다.
"어머님, 강모 왔습니다."
"오냐."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모는 다시 한 번 의아하였다. 그가 큰방으로
들어섰을 때, 청암부인은 곧은 허리를 세운 채 정좌하고 강모를 맞이하였던 것
이다.
"어서 오너라."
강모는 우선 얼떨떨한 채로 절을 하면서, 분명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많이 놀랐겠구나."
"예... ."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무리 행신이 가벼운 아녀자이지만 거짓으로 무슨 일
을 획책하려 했던 일은 없었느니라. 그런데 이번에는 할미가 급한 소리를 하노
라고. 일부러 그리 위장 전보를 쳤다."
강모는 온몸의 기운이 쑤욱 빠지면서 허탈해졌다. 그리고 도무지 무슨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랬었구나.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
고... . 한편으로는 청암부인은 무고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요, 다른 한편으로
는 과연 무슨 일인가 싶은 의구심이 겹쳐서, 강모의 심중은 어수선하고 혼란스
러웠다. 그러나 먼저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기채도 청암부인의 옆에 앉아 강
모가 오기를 기다렸던 듯, 계속 헛기침을 한다. 율촌댁은 문간 쪽에 앉은 채 청
암부인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강모야. 너, 대실에 다녀오너라."
드디어 청암부인은 무겁게 말한다. 아아, 이 말을 하려고, 강모는 가슴이 한쪽
으로 힘없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로구나. 어떻게 피
하여 볼 도리도 없이. 대실에... 가라고... ? ... 내가... ?
"이제 내달이면 네가 혼행을 한 지 일 년이 된다. 일 년을 채웠으니, 신부가
신행을 와야 하지 않겠느냐?"
청암부인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강모 쪽으로 몸을 기울여 말한다. 강모는
얼른 율촌댁을 바라본다. 율촌댁이, 어른의 말씀인데 어찌 하겠느냐는 낯빛으로
강모를 안쓰럽게 본다. 이기채는 발을 개고 앉은 채 상체를 좌우로 흔들고만 있
다.
"너도 이제 나이 열여섯, 결코 어린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한 여자의 주인이
아니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야. 물론 네가 아직 학생이니, 거기 따른
학업도 중요하다만, 네가 대실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
인륜지대사이니라. 급한 위장 전보를 친 것도, 따지고 보면 일이 그만큼 중대한
것이기 때문 아니겠느냐? 날짜는 미리 잡아 두었다. 아주 길일을 잡았으니, 그리
알아라."
"할머니."
"네 심중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심중대로 하는 게 아니야. 절
차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도리인즉."
"할머니이."
"강모야. 너도 인제 많이 늙었다. 어서 어서 꽃 같고 달 같은 손부를 이 집안
으로 들어서게 하고 싶다."
그러면서 청암부인은 몸이 뒤쪽으로 젖히었다. 감회와 각오가 그 몸짓에 어린
다.
"내 눈으로 보고 싶다. 손부도 보고, 증손도 보고 싶다. 그러고 나면 나는 이
가문에 대하여 할 일을 다하는 셈이다. 강모야. 너는 아직 모르리라. 이 집안이,
명예에 비하여 얼마나 고달픈가를... ."
강모는 묵묵히 장판만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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