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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25)

카지모도 2023. 11. 24.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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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홀로 보는 푸른 등불

 

효원의 방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다. 청암부인이 율촌댁과 함께 거처하는

큰방의 등불은 한식경 전에 꺼지고, 잠시 후에 사랑채의 큰사랑에 불이 꺼졌다.

그러니, 이제 안채의 큰방과 대청마루 하나를 사이에 둔 효원의 건넌방에 불이

꺼질 차례인 것이다. 웃어른의 방에 불이 꺼지기 전, 그 아랫사람들이 먼저 불을

끄고 잠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순서를 지키는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율촌댁이 이 댁으로 시집와서 건넌방에 든 그날로부터 이날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지켜져 온 일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만, 그것은 감히

누가 깨뜨릴 수 없는 불문율처럼 위엄있게 밤마다 행하여졌다. 율촌댁은 효원이

신행을 오기 며칠 전에, 좋은 날을 받아 청암부인이 거처하는 안방으로 옮겨 앉

았다. 그리고 새로 집안에 들어올 며느리를 위하여, 이대까지 기거해 오던 건넌

방을 물려주는 것이다. 본디 안채란, 가운데 넓은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큰 정지

와 도장방이 딸린 넓은 안방, 완쪽이 그보다 작은 건넌방이 있을 뿐이었으니, 고

부 양대 거처밖에는 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물론 방을 한 칸 더 달아 내는 것

이 무슨 어려운 일일까마는, 삼 대가 함께 거하게 되면, 중년의 며느리는 새며느

리한테 자기가 쓰던 건넌방을 물려주고, 안방으로 들어가 노년에 이른 시어머니

와 함께 기거하는 것이 상례였다. 사람들은 이 안방을 큰방이라 하였다.

"내가 이런 날을 기다리며 그 많은 세월을 살아왔었느니라."

율촌댁이 큰방으로 들어와 마주 앉은 날, 그네가 절을 하였을 때 청암부인은

탄식처럼 이야기했다. 그 목소리에는 할 일을 다하고 난 사람의 감개와 허탈이

엉기어 있었다.

"이제는 되었다. 이제는 다아 잘되었다."

율촌댁이 큰방으로 짐을 옮기던 날은 날씨도 청명하였다. 그 청명한 햇발에

청암부인의 허연 머릿결이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그것은 서리를 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머리가 센 줄은 몰랐던 율촌댁은, 마당에 서

서 짐 나르는 것을 바라보는 청암부인의 모습에 까닭없이 가슴이 철렁, 하여 손

끝이 떨리었다. 무엇이라고 형언하면 좋을까. 온 집안을 누르고 있던 숨막히는

기상의 한쪽이 아침나절의 서리와도 같이 알게 모르게 스러지는 것을 손끝이 먼

저 느끼었다고나 할 것인지.

"죄송스럽습니다."

율촌댁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소리 속에 간곡함이 배어났다. 그러나

단순하게 간곡하기만 한 것이 아니요. 이상하게도 무엇인지 벅차오르는 듯한 심

회를 가누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청암부인은 아랫목에 정좌하며 그러한

며느리를 지그시 건너다 보았다.

"죄송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당치도 않다. 내... 이런 날을 보고 죽으려고 일

찍이 젊은 날에 살아 남았던 것이 아니냐. 이마안허면... 나는 복 있는 사람이니

라."

청암부인은 눈을 내리감은 채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만감이 어리었다.

"다 알아서 할 것이지만 모든 준비에 정성을 들이도록 하여라."

효원이 거처할 건넌방의 치장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물론 그 방은 도배도

새로 하고, 장판도 다시 발랐다. 장판에 먹인 노란 콩기름 냄새가 군불의 열을

받아 구수하게 방안에 고여 오른다. 효원은 등잔 아래 앉아 물끄러미 방안의 세

간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이번 신행길에 함께 가지고 온 혼수 세간들이다. 사방

열한 자의 건넌방은 크고 작은 가구 집기들로 가득 차 있다. 웃목의 주칠 삼층

장만 하여도, 난쟁이 목수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오직 이것 하나를 위하여 꼬

박 석 달 열흘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난쟁이 목수 솜씨라면 인근뿐만 아니

라 광주, 나주에서까지도 사람이 오곤 하였는데, 설마 그렇게나 오래 걸렸을까

싶었지만, 하기는 귀목을 베어 말리는 일부터 시작하자면 그렇게 걸렸을 법도

한 일이었다. 장식이 정교하여 기둘과 쇠목, 동자목, 문골 등의 울거미를 모두

골밀이로 둥글게 파낸데다가 주칠도 투명하게하여, 귀목의 아름다운 나무 무늬

를 그대로 살아나게 끼웠다. 기둥의 네 귀퉁이는 불로초 귀감잡이로 싸서 꾸몄

다. 그리고 서랍에는 국화 바탕에 칠보 들소가 앙징스럽게 단추처럼 달려 있고,

장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자잘하게 장식한 풍혈은 박쥐 풍혈이다. 서랍층장 옆

에는 의걸이장이 놓여 있고, 실 궤와 사방 탁자가 각각 제자리에 앉고 설고 하

였다. 사방 탁자의 아래칸에는 신랑 쪽에서 혼서지와 채단을 담아 보내왔던 함

이 자리잡고 있다. 함의 앞바탕과 경첩에는 음각 매화문이 새겨져 있어 등잔 불

빛을 받아 은은히 빛난다. 대로 상자같이 네모 반듯하게 짜서 거죽을 채색 종이

로 곱게 발라 옷이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둘 수 있는 농, 주석 장식이 단아

한 반닫이장이 나란히 맞대로 있는데, 반닫이의 윗장 알갱이에 용목을 붙여 만

든 화사한 면과 거멍쇠 장식, 칠보문 제비초리 경첩 완자문 자물쇠, 열쇠받이,

불로초 장식 등은 과연 난쟁이 목수가 심혈을 기울였다 할 만했다. 그뿐이랴. 문

갑 모양으로 짰으면서도 언뜻 그 외양은 일반 장롱을 조그맣게 줄여 놓은 듯한

화각 버선장의 호화롭고도 아담한 자태라니. 앞면 골재는 감나무로하고, 개판,

옆널, 뒤판은 오동판으로 된 이 버선장에는 앞문 복판에 하늘로 날개를 치며 오

르려는 봉황과 붉은 구름이 무늬지어 날고, 그 사방 둘레를 돌며 매화, 난초, 국

화, 목단, 불로연 들이 수줍은 듯 흐드러진 듯 피어 있다. 나비 모양의 문고리

바탕과 경첩, 박쥐 모양의 귀싸개 장식은 파랑, 초록, 살색 칠보를 입고 요요

히 빛나는데, 자물쇠에는 칠보 상감으로 희자가 새겨져 잔잔히 웃는 것이다. 참

이만한 솜씨라면 난쟁이 목수를 광주, 나주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안 불러 갈 수

가 없었겠다. 효원은 오른 무릎을 세운 채,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이런 것들을 둘러본다. 밤에 거울을 보면 무서운 일이 생긴다하

여 뚜껑을 닫아 밀어 놓은 경대가 백동 장식을 달고, 장지문 옆 동편 자라에 뎅

그맣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한참이리라. 효원은 경대 옆의 화각 반짇고리를

본다. 그 시선에 놋화로의 날카로운 놋쇠 빛깔이 부딪친다. 차갑다. 아직 잿불을

담을 때가 아니지. 불기 없는 놋화로는 그 비어 있는 것이 이상하게 섬뜩하고

썰렁하여, 몸을 오스스 떨게 한다. 횃대에 걸린 저고리의 긴 고름이 문틈으로 스

며드는 바람에 그러는 것인지 보일 듯 말 듯 흔들린다. 빈 벽에 길게 늘어뜨려

드리워진 옷고름 그림자가 검다. 금방 벗어서 걸어 놓은 저고리다. 이제 막 흰

적삼과 속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아무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으나 몸을 일

으켜 이부자리를 편다. 버스럭 버스럭. 감잎 같은 매끄럽고 도톰한 본견과, 풀

먹인 열한새 광목 하얀 호청이 서로 접히고 겹쳐지면서 와스락거린다. 사위가

고요하여, 물 밑바닥처럼 적막한 방안에 홀로 이불 펴는 소리만이 낙엽 소리처

럼 부서진다. 뒤안의 감나무 가지에서 때를 맞추어 마른 잎사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중 몇 잎은 떨어지는지 마당에 구르는 소리가 떼구르르 난다. 산이 가

까운 탓인가. 떡갈나무 잎사귀들, 참나무, 상수리나무 잎사귀들이 서로 사그락거

리는 소리도 바로 귀밑에서 들린다. 솨아아. 문득 효원의 귀에 친전 대실의 대바

람 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성성한 대숲의 대이파리들이 날을 파랗게 세우며

바람을 일으킨다.

아아.

사랑채 작은사랑의 불빛은 아직도 밝혀져 있는지. 마음 같아서는 장지문을 열

어 보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효원은 지그시 내려누른다. 인두로 저고리 깃을 돌

려가며 누르듯. 그리고는 불을 끌까 하다가 그대로 오두마니 앉아 등잔을 바라

본다. 강모는 사랑채의 작은 사랑에 있다. 언제라고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을까

만, 강모는 신행 온 그날 하루만 밤이 아주 늦어서야 건넌방으로 들어오고는, 지

금 이레가 되었는데 스치는 일도 없이 그대로 사랑에서 지내는 것이다. 그나마

내일은 전주로 떠난다고 했다. 전주로만 갈 것인가. 그는 동경으로 간다고 했었

다. 효원은 웃목에 놓은 반짇고리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아무래도 잠이 들기는

틀린 것 같다. 이렇게 밤이면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이제 효원에게는 벌써 버릇

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 대례를 치르고 신방에 들었던 그 밤으로부터 이미

불면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설령 어쩌다 깊은 잠이 든 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날조차도 효원은 잠을 설치고 말았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그리고

머리 속은 그만큼 늘 무겁고, 짓눌리듯 답답하였으며, 그것은 아무리 걷어내도

개운하지를 않았다. 딱 무엇이라고 꼬집어내서 말하기 어려운 무슨 연기 같은

것이 가슴에 가득 차 있어, 자연 숨을 크게 뿜어내곤 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렇

다고 밖으로 드러내어 표를 낼 수도 없었다. 오히려 허담과 정씨부인 쪽에서 효

원보다 더욱 근심을 하는 기색이 보여, 부모의 앞에서는 낯빛을 온화하게 꾸미

고 범연한 척해야 했다. 그것이 하루 이틀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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