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들이 아마 합궁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는 근심이 두 내외의 표정과 분위기에서 역력히 느껴질수록 효원은 더욱더,
모든 일이 순탄한 듯 꾸미고 있어야 했다. 정씨부인인들, 아무리 여식이라 하나,
그것을 발설하여 효원에게 곧바로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신방에서는 무사하였느냐?"
고작 그렇게 물을 수밖에 다른 말은 차마 더 하지 못하였다. 그럴 때, 효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수그리면 되었다. 그저 미루어 짐작하시라는 표시다.
"긴히 쓰일 일이 있으리라."
신방에 드는 효원을 따라 들어왔던 정씨부인은 원앙금침의 호화로운 자리밑에
서리처럼 하얀 삼팔주 수건을 고이 넣어 주었다. 중국에서 나던 귀한 명주를 무
엇에 쓰라고 어머니가 손수 거기 접어 넣어 두는지 효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돌리고 말았었다. 그것은 순결하고
비밀스러운 첫날밤의 신부가 꽃잎같이 떨구는 한점 앵혈을 정갈하게 받아내는
부드럽고 흰 비단이었던 것이다. 하늘 아래 그보다 더 정결한 피가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 여인 된 이 누구라서 수줍고 당당하면서 새로이 태어나는 그 한순간
의 핏방울을 함부로 하고 싶으리. 소중히 간직하고 싶을 것이었다. 그래서, 눈부
시게 하얀 비단 위에 그 선홍을 곱게 받는 것이다. 그것은 증거요, 징표였다. 그
러나 그 하얀 삼팔주 수건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효원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
자 문득, 그 명주 수건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채, 그렇게 장 속에 깊이 접혀져
자신과 함께 빛이 바래고 말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대실에서 소식 없는 강
모를 기다리고 있을 때는, 그래도 지금처럼 막막하지는 않았었다.
"나이 어린 탓이니라. 아직도 제기 차고 뛰어놀 나이 아니냐. 조금도 마음을
무겁게 갖지 마라.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봄이 오면 꽃이 저절로 피어나지 않더
냐?"
정씨부인은 효원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일렀다. 효원이 너무 범연한 낯빛이었
으므로 공연한 말을 시작하여 혹 그 마음에 덧이 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
고 오직 모든 핑계를 강모의 어린 나이에 밀어 두었다. 그러나 매안으로 신행을
온 그날부터 효원의 심정은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
오. 효원은 이런 생각들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밀어 놓은 반짇고리를 다
시 끌어당긴다. 오동나무 바탕에 화각을 입힌 화려한 반짇고리다. 시누대 죽장에
우골 장식이 붉은 바탕색 위에 꽃같이 곱다. 그리고 노랑과 연두 빛깔이 현란하
다. 네모진 사면을 돌면서 연잎과 연꽃 사이에서 잉어가 펄떡이며 솟구쳐 노닐
기도 하고, 늙은 거북이 용의 형상을 띠면서 구름 속을 날기도 한다. 모란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신부의 반짇고리라서 이다지도 고운가. 잠 안 오는 밤이
면, 이렇게 색색깔의 화각 반짇고리를 끌어안고, 바느질로 밤을 새우라는 뜻인
가. 그러나 반짇고리에는 화각 실패와 화각 잣대 침척이 덩그라니 담겨 있을 뿐
이었다. 납작한 판형 실패도, 둥실한 통형 실패도 구름 속에 노니는 운학과 운
용, 국화무늬 나비 날개 국국접의 아기자기한 문양으로 호사스럽게 어여쁘고,
침적 또한 한 치마다 얇게 켜서 잘게 자른 쇠뼈에 물을 들인 우골을 그어서 칸
칸이 소담한 매화, 난초 꽃송이를 새겨 넣었으니, 보는 이의 마음도 따라서 화사
하여지련만. 부질없다.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효원은 되뇌인다. 효원이 본디 침선
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바늘을 잡으면 올곧은 성미 그대로, 일
을 길게 끌지는 않았다. 또 그 솜씨도 대범했다. 그래서 정씨부인은
"너는 남자로 났으면 좋을 뻔하였다."
고 말하곤 했다. 자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효원의 아우 용원과는 사뭇
달랐다. 바로 네 살 아래인 용원은, 자태부터도 부용 용자가 어울리게 형에 비하
여 아담하고 고왔으며 용모도 순덕하였다. 그 모습대로 자수의 솜씨 또한 매우
정교하고 화사하였다. 그러나 효원은 달랐다. 용원처럼 요모조모로 알뜰하게 모
양을 꾸며가며 빛깔을 곱게 써서 정교하게 수를 놓는 것은 효원의 성품에 맞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자잘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를 놓는니, 차라리
홀로 서책을 대하거나, 부친 허담과 마주앉아 담론을 하는 쪽이 보다 좋았다. 허
담도 그러한 효원을 상대로 고기를 들려 주고, 조상의 학문과 내력, 그분들의 업
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혼행에 상객으로 온 이기채에게
"내가 운수가 비색하여 저 아이를 여아로 두었소이다."
하고 솔직하게 털어 놓을 정도로 효원을 애중히 여기었다. 효원은, 용원이 수
를 놓고 있을 때 막내 아우 남욱과 더불어 사군자를 치기도 하고, 혹은 여사서
를 베껴 쓰기도 하였다. 필사본을 만드는 것이었다. 효원의 필재는 호방하였다.
그러나 그 서체에는 고집스러운 금속성이 모가 나게 서려 있는 것을 숨길 수 없
었다. 효원은 곧잘 밤을 밝혀 필사본을 썼다. 물론 궁체 글씨였다. 명심보감이며,
조선조의 이름난 시가들, 그리고 박씨부인전, 유충렬전, 숙영낭자전, 사씨남정기
들의 이야기책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륜행실도까지하여 여남은 권의 책을 옮겨
써 두었다. 그럴 때 용원은 그 곁에서 곧잘 밤을 같이 세워 주었다. 동무를 하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혼례를 치르고 아직 매안으로 신행 오기 전, 친정에서 묵히
고 있을 때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언제부터 이렇게 바늘 들고 수를 놓기 시작했을까요?"
"글쎄, 옛사람들은 흙을 보고 그릇을 굽고, 나무를 보고는 가구를 짜고, 금을
보고 가락지를 만들었으니, 실이 생기고는 그 실을 가만 두었겠느냐? 내 생각에
실로 베를 짜기 시작할 때부터 수가 있었을 것 같은데? 옷감을 짰으니 무늬를
놓고 싶었겠지."
"하얀 화선지를 보고는 화공이 저절로 붓을 드는 심정으로?"
"그렇기도 했을 게다."
"어찌 되어 생겨났든 자수란 규방에 얼마나 아름다운 동무인지 몰라요. 이 고
운 색실에다 마음을 꿰어 한 올 한 올."
"그것도 고려 시대에는 굉장했다더라."
"어떻게요?"
"어찌나 자수가 성행했는지 집집마다 수 안 놓고는 못 사는데, 귀족은 말할 것
도 없고 일반 백성의 복식에도 온갖 장식 자수가 극성해서, 수차에 걸쳐 국법까
지 제정을 했드란다."
"아이구머니나, 얼마나 요란했으면 그랬을까?"
"왕을 호위하는 군대들의 장수 병졸 군복에도 휘황찬란하게 수를 놓아서, 오채
수화로 장식을 했단다."
"오채수화? 다섯 가지 색색으로 꽃무늬를 수놓았단 말인가?"
"그것도 전쟁하는 군복에 말이다. 그러니 일반 서민들까지도 사치스러운 자수
를 얻느라고 그 낭비가 대단했었던 모양이더라."
"아니, 이런 자수 정도가 그다지도 심한 낭비 사치가 되었을까요?"
"사소하게 뵈는 것도 도가 지나치면 걷잡을 수 없는 낭비에 바지게 된다. 조선
조에 여인들의 머리 장식 또한 그랬다지 않느냐? 얹은머리가 어찌나 크게 성했
든지, 다래 한 채 값이 중인 열 집의 재산을 넣었더래. 거기다가 수식 또한 엄청
나서 밀화석황에 금패주옥이며 칠보를 주렁주렁 붙이고 달고 꽂았으니, 가산 탕
진을 안하겠느냐? 심지어는 그런 일도 있었더란다. 부귀한 집의 열세 살 먹은
신부가 말이다. 다래머리를 어찌나 무겁고 높게 하였던지 신부가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방에 시아버지가 들어오시니 갑자기 일어서다가 그만 목뼈가 부러졌단
다. 다래 무게에 눌린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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