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에... .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구려."
"다래머리의 사방 높이 넓이가 가히 한 자를 넘었었데."
"지금이라고 왜 그런 일이 없으리? 그 이름만 다래다, 자수다, 바뀌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로 과잉하게 마음이 쏟아져 걷잡지 못하게 사치를 하는 것은 변함
없을 것이다. 집이든, 의복이든, 금패든, 사치를 하기로 들면야 어떻게 감당하겠
느냐?"
"그런데 형님, 이렇게 베갯모에 학이나 수놓고 목단문 보자기에 꽃송이나 피우
는데도, 자수가 어찌 재산을 탕진시키리까? 색실 몇 올이 무에 그리 큰 재산이
든다고."
용원은 수를 놓고 있던 베갯모에 바늘을 꽂으며 물었다.
"금실 은실을 써 보아라. 탕진은 눈 깜짝할 사이지. 그래서 고려 정종 9년 사
월에, 금중외남녀 금수소금 용봉문 능라의복이라하여, 뭇남녀 의복에 금을 녹여
만든 실로 황룡이나 봉황새를 수놓은 비단옷을 금하기도 하고, 인종 9년의 칙령
에는 금서인 라의견고라 엄명을 내렸더란다.
"서민들은 비단 옷이나 명주 바지를 못 입게 한단 말씀인가요?"
"그렇지. 그런 옷 바탕에다가 현란한 금은사를 쓰고, 온 집안 곳곳의 크고 작
은 것들을 비단실로 장식해 봐라. 병풍, 보료, 방장이며 심지어는 무시쌈지, 수저
집, 골무, 거기다가 지금 네 당해 앞부리까지도 분홍 매화문을 수놓지 않았디?
이처럼 수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사치를 하기로 들면 가산이 기울지 않고
견디겠느냐?
"과연... ."
용원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마음인들 그러지 않으리, 손에 만져지고 눈에 뵈는 것이 아니니 어디 표가 나
지야 않겠지만, 어느 한 곳에다 노심초사 마음을 기울이면, 그 몸이 어찌 성할
수 있겠느냐? 과중하게 기울어진 마음은 애, 증 간에 몸을 망치고 말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은 효원 자신에게 다짐하는 길이었는지도 몰랐다. 혼례 후에, 무
엇인가 이미 평탄치 않은 길이 자기 앞에 놓여 있음을 예감하고 그것을 미리 각
오하려는 심정을 은연중 속으로 다지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말벗을 해
주던 용원도 지금은 곁에 없다. 효원은 등이 시리다. 하릴없는 빈 반짇고리를 다
시 웃목으로 밀어 놓는데, 문풍지가 더르르 운다. 외풍이 있는 모양이었다. 방바
닥은 그런대로 따끈하건만 도무지 따뜻한 줄을 모르겠다. 저 먼 아랫몰 어디쯤
에서 개 짖는 소리가 컹 커엉 들린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개들이 싱겁게 따라
짖는다. 다듬이 소리도 어두움 밤 공기의 바람결에 따라 흩어질 듯 들려온다. 맞
방망이 소리가 아닌 것이 누가 혼자서 밤을 세워 다듬이질을 하려는 모양이었
다. 뉘 집에 대사라도 앞두고 있는 것일까. 문득 효원의 머리 속으로, 대실의 사
랑에 모여서 강모를 다루던 사람들의 얼굴과 웃음 소리와 홍두깨질이 쏟아졌다.
"여보게 자네, 뭐 할라고 왔는가? 각시 훔쳐 갈라고 왔는가?"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재종 인욱이가 흰 광목띠를 강모의 발에다 묶으며 이
빨에 힘을 주어 한 마디 던지자,
"아니, 그럼 이 사람이 바로 도둑놈 아닌가?"
하고 곁에서 맞받았다. 신부에게까지 들리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하는 말이었
으니, 온 집안에 그 주고받는 수작이 커다랗게 울렸다.
"도둑놈이라니? 그럴 리가 있는가? 양상군자겠지."
"양상군자? 그렇다면 이는 서생원이란 말이렷다아."
그러자, 방안에서는 와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안뿐이 아니라, 마당에서 구
름같이 둘러서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안방에서도 빙그레 웃음
을 물었다. 양상군자란 도둑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기도 했지만, 달리는 쥐를 이
렇게 부르기 때문이었다.
"서생원과 다를 게 무어야? 남이 일껀 피땀 흘려 지어 놓은 한 해 농사를 남
모르게 물어내 곡식 축내는 건 이 사람과 마찬가지거늘."
"한 해 농사만? 인생 농사 평생 경영 밑천을 빼가는데."
강모의 두 발목은 단단하게 광목띠로 비끄러매진 채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 중 실한 두 사람이 자기 어깨에 발을 묶은 띠를 한 가닥씩 둘러맨 것이다.
순간 와아 함성이 일었다.
"웨메, 저런 꽃 같은 도적이라면 나는 문 열어 놓고 눈 빠지게 지달리겄네잉,
하이고오. 이뿌기도 허구라아."
마당에서, 마루에까지 들어찬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꼰지발을 딛고 넘겨다보
던 콩심이네가 입을 반쯤 벌린 채 탄복한다.
"문이나마나. 머 열고 닫을 것이라도 있당가? 농상 다 열어제끼고 한디서 사는
노무 처지에."
서저울네도 벙싯거리며 고개를 빼문다.
"대문 중문 열두 대문보담 더 짚은 진짜 문이 멋이간디?"
콩심이네는 목소리를 툭 낮추어, 턱을 빼올리고 선 서저울네 옆구리를 쿡 찌
르며 묻는다.
"머엇은 머엇이여? 니 치매 속에 있는 것이겄지."
어느 틈에 점봉이네가 콩심이네 곁에 바싹 다가서서 어깨를 짚으며 그 귓바퀴
에 대고 입김 부는 소리로 대답한다.
"워메 참말로 지랄허고 자빠졌네잉, 누가 들으먼 어쩔라고오."
"아, 넘 들으라고 허는 이얘기 아니였어? 나는 또 부러 소문 내 줄라고 그릿제
잉. 한 번 더 말해 주까?"
점봉이네가 말끝을 채 못 맺고 히히히, 괴상한 웃음을 짓깨물며 터뜨린다. 콩
심이네가 옆구리를 꼬집은 것이다. 그 웃음 소리에 걸려 유성 하나가 하늘의 변
두리로 은꼬리를 길게 남기며 진다.
"자아, 자신의 죄과를 알렷다."
방안에서 짐짓 위엄을 떨치는 굵은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나왔다. 아마 이
제부터 신랑을 다루기 시작할 모양이었다. 강모는 고개와 어깻죽지만 방바닥에
닿은 채 공중으로 두 다리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형국이이서, 얼굴로 핏기가
쏟아지며 몰렸다.
"이실직고를 하렷다."
"도무지 뉘우치는 기색이 없군."
"그럼 매우 쳐야지."
"쳐라."
누군가 홍두깨를 높이 치켜든다.
"남의 문중에 뛰어들어서 귀한 처자를 훔친 죄는 이렇게 다스려야."
치켜든 홍두깨가 강모의 발바닥으로 떨어진다.
"아."
강모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찔한 아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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