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가면은요, 버들처럼 흐느적 흐느저억 늘어져 감기면서 걷는 사람들이
마않지요." 버들거리. 어여쁜 이름이 아닐가.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 너는 누구의 버들인가, 라는.
그러니까 버들이 애인이죠, 여인이에요,"
기모노 입은 버들여인들이 살고 있는 골목은 우묵하고 좁고 깊었다. "조선
사람들은 여기러 다닙니다." "일본인 전용이라면서요?"
"그래도 조선 사람은 갈 수 있어요. 이등 국민이라고 해서 중국인보다는
대접이 좀 나으니까. 하지만 중국인들은 발도 못 들여놔요. "일등 국민은 일본
사람입니까?" "중국인들조차도 자기네는 삼등 국민이라고 자칭하지 않습니까?
너희 조선 사람이 우리보다 낫다는 게지요." 다른 데는 몰라도 봉천에서만큼은
그 등급이 분명하여, 신분증처럼 찍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통장 색깔조차 세
민족은 서로 달랐다. "지금 서울 인구 칠십만인데 봉천 인구는 백오십만입니다.
이중에 서탑 시칸방 조선 사람이 몇 만 명은 될 거예요. 만주 벌판 다
돌아다녀야 이렇게 조선 사람 모여서 사는 곳은 없지요. 이 봉천 지대에
인구비례가 만족이 삼분지 일. 여진족이 또 삼분지 일, 그리고 고려인이 삼분지
일이라고 했답니다. 그만큼 봉천은 우리 조선하고 연이 깊은 곳이지요. 한
사오백 년 전에는 이 대 일 비율로 고려인 촌 사람이 살았다는 거에요오.
그러니껜 조선 건립 초기 이야기지요." 봉천은 큰 곳입니다. 우선 누구라도
봉천역에 내리면 지하도를 거쳐서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습니까? 그게 서울에도
없는 시설이라. 서탑에 와서 우리 동포들끼리 이야기할 때 "야아, 봉천은
뻐근해. 지하철도가 다 있어." 첫 마디가 그겁니다. 그게 철도는 아니고 그냥
지하도인데 하도 규모가 웅장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게지요. 여관만 해도 벌써
몇 갭니까? 이 오 리 남짓밖에 안되는 거리에. 조선 여관이 여섯 갭니다.
평양여관,조선여관,서울여관....협화여관. 그만큼 왕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애기지요. 그 여관들이 항상 손님으로 버글버글합니다. 주로 조선
사람들이에요. 내가 잘 알지요. 삼십 년을 이 서탑에서만 살았는데 모르는 게
있겠습니까? 바로 요 서탑교회 건너편에 새끼골목, 조선상점 뒤쪽으로 난 그
골목 말이에요. 그걸 새끼골목이라 하는데, 왜 그러느냐, 하도 가난해서 할 게
없으니까 새끼 꼬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불러요, 새끼 꼬아서
니야까에다 둥치둥치 서려 가지군 팔러 다니지요. 그 새끼골목 사는 사람들부텀
바로 그 옆에 화목정에 집 주인 일본 사람까지 다 알아요.
"조선인 거리에 일본 사람도 삽니까?" "그게 아니구요. 거 화목정 집들이 다
좋잖아요? 그건 일본 사람들이 집을 크게 지어 가지고 세를 놓아 먹고 사는
겁니다."
여기는 국제적인 도시니까 변화하죠. 강업 경기가 좋습니다. 정미소도 많고,
상점도 많고, 은행도 많고, 각국 나라 사람들 인종도 많고, 중국의 동북 각처를
다닐래면 전부 봉천을 경과해야 하니까. 지형으로 보면 사람의 목과 같은
곳이죠. 봉천이. "그렇군요." 봉천은 혼하강 강줄기를 따라 세워졌으므로,
동서가 갈고 남북을 짧았다. 그 중에 일직선 한 토막인 서탑거리의 동쪽 끝
북시장 곁에는 강태가 살고, 서쪽 끝 신시장 옆 서탑 아래 서향으로 창이 난
작은 집에는 강모가 살게 되었으니, 걸어서는 한 삼사십분 되는 거리였다.
"어차피 고향을 떠나 왔고, 나도 이제는 일개 무산자에 불과한데, 형님이
굳이 시탄방으로 갈 것이면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면 형님도 이 집에 함께
살든지." 강모가 그렇게 말했을 때, 강태는 미소를 띄웠다.
"시끄럽다. 말장난, 네가 어떻게 거기 가 살어? 하루도 못 견딜걸? 다 견디어
본 자만이 견딜 수 있는 거야." "못 견딜 건 또 무어요?" "너, 생각나? 맨 처음
네가 전주로 유학하게 을 때. 할머니께서 몸소 오시어, 나랑 같이 있던 너를
청수정으로 옮겨서, 따로 하숙하게 하셨던 것." "아, 그때, 그 일?"
강모는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강태를 흘깃 바라보았다. "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참 충격받았었지. 우리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간이지만, 너는 나와 다르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는 네가 나와 한집에 사는
것을, 즉 가까이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 간단히
말해서 할머니는 너와 나를 떼어 놓으려 하셨다. 내가 사는 동네가 마땅치
않아서라기보다, 바로 내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거다. 위험....하게 여기신 거야.
그래서 나도 의도적으로 너를 멀리했고, 그 동안." "아니,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강모에게 강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네가 미안할 것을 없어. 하지만 그때는, 쓸쓸했었다." 강모는 눈을
떨구었다. "내가 그때 깨달은 것은, 한 가지,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고, 너는
할머니의 손자라는 것이었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가진 것이 없었고, 너의
할머니는 가진 것이 많았다." 그 최초의 격리는 강태에게 흉터를 남겼다고
했다.
"격리....흉터....같은 말은 너무 심해." 가까스로 강모는 반박하며 " 이렇게
내 스스로 형님을 따라 왔는데요, 뭘, 지금은." 하고도, 입을 다물엇다.
"그런데, 역시 할머니가 잘 보셨던 거야. 어른이라 예감이 있으셨던게지.
결국 이렇게 나는 너를 도망시켰으니. 참, 할 말 없게 되었다. 이런 날이 있을
줄 알고, 할머니는 우리를 갈라 놓으려 하셨던 것 아니겠냐." "왜 자꾸 자책을
해요? 나보고 반성하라는 역설입니까?" "네가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다."
"무엇이?" "오늘의 모습이." "흉보시는 겁니까?" "도대체 네가,
무산자,무산자..하는데, 정말 웃통 벗고 길거리에 앉아서 점심 한 끼를 아무
반찬도 없는 맨빵 한 개 뜯어먹으며, 살았다,라고 할 수 있어? 이걸 먹었으니
다음 끼니까지는 살겠구나, 하는 그 서러운 안도감 말이야, 그걸 느낄 수
있겠냐? 안되는 널 나무라지는 않는다. 네가 겪어 본 일이 없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너는 겪을 생각도 없잖으냐, 그런 상황이 부닥쳐 온다면, 너는, 곧장
어떻게 할까? 바로 이 서탑거리 여관이나 집집마다 가가호호 뒤져서 남원
사람을 찾겠지? 그리고 빚을 낼 거다. 아마 남원 사람이라면 아무도 묻지 않고
두말 없이 너한테 돈을 줄 것이고, 남원 사람과 청암부인댁 손자 이강모는
남원을 떠나, 조선을 떠나, 만주벌판 봉천에까지 와서도 핏줄같이 질긴 끈을
주렁주렁 잇고 살아갈 테니까, 그건 서로의 필요와 잇속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너든 돈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은 남원으로 돌아가 이자를 받을 수 있을
터이니."
하지만 그런 짓을 제가 아직은 못하는 이유가 있지. 우선은 숨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치 그런 날이 곧 오리라는 예언같이 들리는구만요." 강모가 언짢은
투로 말끝을 묶었다. "경계해라. 그 말이다."강모보다 강태는 더 언짢은
모양이었다.
"궁도령이 고초가 많아서 보기 딱하고,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 하는
일마다 걱정이야. 게다가....."
도대체 조선에서 여기가 어디라고,어떻게 떠나 온 길이라고, 저 따위
계집이나 끌고 다니면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해 보겠다는 것이야? 하는 심정과,
어쩔 수 없이 이것들을 내가 메고 다녀야 하리라는 예감이 그를 짓누르늘 것
같았다.
해가 지는 겨울의 서탑은 아름다웠다. 일찍이 청 태종 황태극이 숭덕으로부터
순치 원년 사이에, 황실의 무궁한 안녕과 태평천하를 빌기 위하여 봉천 고성의
동.서.남.북에 똑같은 모양으로 세운 네 탑 중에 하나인 이 서탑은,
'팅와ㅈ'이라는 벽돌 청와전을 구워서 만든 것이었다.
청외전은 멀리서 보면 검은색이 나고 가까이서 보면 흰 듯한 청회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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