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서울에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그는, 동광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덕분인지, 아니면 팔도에서 온 조선인 말고도 일본인과 중국인, 백계
러시아인들이 섞여 사는 국제 도시의 상인답게 말씨를 다듬어서인지, 평소에는
별로 심한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다만 억양만큼은 평안도식이엇다.
"1910년에 합방이 되고, 1911년 봄, 우리 아버지가 봉턴으로
오셧디요. 그러나까 봉천 근교였는데, 친척 일가분이 먼저 여기로 와서 농토를
많이 일궈 가지고 아버질 부른 거예요.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그때 땅에 나무 뿌리가 수백 년씩 얼키설키 억세게 뒤엉켜서 보습을 대면,
묵어 자빠졌던 땅이니, 황무지니껜요, 나무 뿌리에 걸려 그만 보습이 뚝뚝
부러져 나갔어요. 참, 대단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들고, 개간을 하면서,
사람이 살아야 할 집을 뚝딱거리고 지어야 하니껜, 목수가 필요했지요."
김씨는 기룸한 얼굴에 키도 훌씬 큰데다 걸음걸이가 단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낯빛에는 엷은 웃음이 배어 있다.
"날 야마또 호떼루에다 세워 와 보세요. 기죽을 일, 책잡힐 일 하는가. 난
누구한테도 얕보이긴 싫어요. 그러자면 내가 앝보일 일을 안해야지. 하는 짓은
망나니면서 존경만 받을려구 그러면 누가. 존경은 뭐 거저 주나? 다 값이 있는
게지." 경우 바른 말투로 카랑카랑 이야기하는 그의 내력 중에 하나.
"맨 처음 우리가 그 시골에 도착했을 때, 아주 우스운 일이 벌어졌어요오.
알어맞춰 보세요.무슨 일인지." 수수께끼를 내는 것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미소를 깨물며, 그는 강모와 강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르겠는데요?" 남을 대할 때, 강태는 뜻밖에도 강모보다 붙임성이 있다
할까, 아니면 응대를 해 준다 할까, 대답을 잘하는 편이다. 그 점이 강모는
새롭고 낯설어 기이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새까맣게 배앵 둘러서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죄다 쏟아져 나와 우리를 에워싸고, 신기하다는 듯이 뜯어보는
거였어요. 조선 사람 구경을 하는 거예요오. 생전 처음 조선 사람을 보는
거니까, 꺼울리렌(고려인)이 왔다고, 신기한 인종이 왔다고 막 야단이 났어요.
위에 보고, 아래 보고, 아래 위 훑어보고. 와글와글와글 떠들어 대면서." "그때
몇 살이셨습니까?" "저요? 다섯 살이었죠. 참 쬐꼬맸습니다. 첨에는
멈칫멈칫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내 머리를 만져 보고, 뺨도 찔러 보고, 얼러도
보고, 킥킥거리고,굉장했어요. 그럴 만도 할 것이, 어머니는 등에다 포대기
둘러 아이 업고, 올망절망 보따리는 이고 지고, 아버지는 상투 틀고 아들은
머리 땋고, 우선 복색이 자기네들하고는 판이하게 다른데다 말은 한마디도
못했으니껜. 거기다가 오죽이나 꾀죄죄했을 겁니까? 우리 몰골이. 머, 거기
사는 중국인들이 우리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지만." "일가 친척이 먼저 와
자리를 잡았다면서요? 그 양반은 어디 계셨길래? 서로 연락이 안 됐던가."
"그건 오가황이었구." "오가황이요?" "봉천에서 조선 사람 둥지는 서탑이라면,
남만주 농촌에 조선 사람 둥지는 대흥향의 오가황이에요." 김씨 말에 얼른 지레
짐작은 안 갔지만, 그들이 표랑민으로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정황이었는지는
알 것 같아 강태는 고개를 끄억였다. "그게 벌써 삼십 년 전 일이 됐어요오."
"성공하셨습니까?" "조선에서 죽지 못해 그대로 사는 것보담이야 좀 낫겠지.
이까짓 게 무슨 성공입니까? 밀가루 국수집 한 칸 가지구 있는 걸."
"그럼 어느만이나 해야 성공인데?" "아 우리 서탑으 조선 사람 중에도 김창호
같은 이는 아주 큰부자지요. 만삐, 만주 비행기 회사 주주 아닙니까? 아마 몇
십 뿌로는 가지고 있을 걸요? 대주주지요. 그 사람 집이 저 남만주
의과대학에서 멀지 않습니다. 이 요녕성 전체에서 제일 좋은 집이에요, 그게."
엄지손가락을 바짝 곧추세워 치켜 올린 김씨는 어깨까지 으쓱 들어 보였다.
그 말에 강모는 힐끗 강태의 표정을 살ㅍ다. 그러나 강태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뭘 해서 그렇게 부가가 됐답니까?" "땅이
마않아요오." "어떻게 조선 사람이? 남의 나라에 와서. 물려받는 것도
아닐텐데요." "그러기에 하늘이 낸 부자라는 것 아닙니까? 요기 요 애들 먹는
사탕알 두 개에 일 전인데, 김창호는 일 전 이 전에 땅을 눅거리로 엄청나게
사서 되팔고 불리고 한 거죠오. 동북에서는 아마 그렇게 크고 좇은 집 없을
겁니다. 중국 부자들도 장작림 빼고는 그런 집 못 가져요." "들어가 보셨어요?"
"우리야 뭐 겉에서만 봤지, 무슨 수로? 우리 아들놈이 서탑소학교 다닐 적ㅇ[,
그 집에 소제해 주러 가면 사탕도 주고 그러더래요." "아니, 개인 집 소제를
학료 아동들이 가서 해 줍니까?" 이번에는 강모도 의아해서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문요오. 그집이 얼마나 크기에요? 땅끄가 몇대 씩 들어앉아두 꿈쩍 안하게
넓고 튼튼한 지하실에다, 대리석 삼층 집에, 난간두 외국제 대리석이구. 건평만
천삼백팔십이 평방메다, 열한 칸 집인데, 그레 어지간한 관공서 건물만
하지요오." "열한 칸이라니? 방이 열한 갭니까?" "아이구, 참 열한 개가
뭡니까? 백 개는 다 못돼도 한 몇 십 개는 족히 되고도 남을 겁니다아. 그 열한
칸이라는 건, 초가 삼 칸 집을 지어, 노래할 때 그 한 칸 두 칸을 말하는
거에요. 으리으리하지요." 아무런 지식없이 소개장 하나 들고 이제 막 봉천에
도착한 지 며칠 안되었던 강태와 강모는, 집주인 김씨의 이야기를 아주 주의
깊고 흥미있게 들었다. 중요한 정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서탑소학교
아이들이 당번을 정해 가지고 순번으로 가서 청소를 할 만도 하지요."
"부러우십니까?" 강태가 찌르듯 물었다. "부럽지 않구요,그럼?" 그날 밤에
강태는 강모에게 말했다. "보아라, 저 무지 몽매의 비극을, 저만치나 깨이고
처신할 줄 안다는 자가, 어는 참혹한 처지의 농민한테서 부당하게도 사탕 두 개
값으로 마구 사들인 땅을, 굴리고 불려 소위 부자가 된 착취자의 집구석에
대리석 계단을 닦으라고 제 아들을 보내면서도, 굴욕감 대신에 긍지를 느끼며
선망하다니." 그의 음성이 어금니 사이에서 파랗게 갈렸다. 바깥에서는 바람에
기왓장 뒤집어지는 소리가 떨그덕 따그락 들리도니, 짜그르륵, 어는 벽
귀퉁이에 가 부딪쳐 깨지는지 요란스러운 파열음이 났다.
"형님이 어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아직 그 김창호란 이를 만나 보지도
않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조사한 바도 없는데 무조건 착취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좀 성급하지 않습니까?" "전에도 내가 말한 일이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한 거래라면, 어느 한쪽이 그처럼 폭리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야. 반드시 공정치 못한 이윤의 편중이 있기에 거래를 통해서 이익을 보는
쪽이 생기는 것이다. 그 이익의 폭이 크면 클수록 손해를 보는 쪽의 폭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고, '손해' 정도를 넘어서면 '착취'을 당한 것이
분명해지지." "땅을 판 사람으로서는 그 가격이 정당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그렇게 팔아야만 할." "그게 바로 가진
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이 말에 강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강태가 강모에게서 가장 못 견디는 부분이 바로 이 '가진 자의 논리'라는
것이고, 강모 또한 강태에게서 가장 큰 장벽을 느끼는 것이 이 말이었으니,
말이 여기에 이르면 두 사람 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묵으로 떨어져 버리고
하였다.
"중국 사람 땅인데 뭐 어때. 조선 사람이 샀으니 좋은 일이지." 강모가
어색해진 틈바구니에 말을 밀어 넣는다. "국적을 떠나서,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강태가 강모를 일별하고 시선을
빗긴다. "자, 이제 나는 오늘까지만 여기서 자고, 날이 밝으면 저기 시칸방
근처로 가서 방을 얻어 볼 테니 그리 알어라." 강태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깊을 숨을 무겁게 삼켰다. 그 다음 말이 쉽지 않다는 표시다. 창문도 검은
빛이다. "기왕에 집도 한 칸 얻었는데, 멀쩡한 집을 두고 남남처럼 어디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쓸데없이 비용도 이중으로 나가고." 봉천에 도착한 이래 그
동안 몇 번씩 되풀이된 말인지라, 강모가 답답하다는 시늉으로 마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강모의 말이 당치않은 까닭이
강태는 그렇게 밝혔다. 그것은 강태가 아까부터 참고 있던 말이기도 하였다.
아니, 아까부터가 아니라, 기차가 전주역을 출발하고 나서 얼마 안된, 삼례를
지날 때부터 내내 분노와 더불어 폭발하려는 증오를 그는 겨우 참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릅니다." 강모는 수모를 당한 무안함에 툭, 말을 던졌다.
"내내 데불고 다닐 것이야?" "모른다지 않습니까?" 오유끼는 아직까지도 강태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뒷걸움을 치며, 우선 집주인의 아낙에게로 몸을
숨기듯이 가 있었다.
"그렇다면 내 일에도 모를체해라." 그리고는 며칠 후, 정말 강태는
시칸방에 거처를 정하고 말았다. "시칸방 어디로 가셨답니까아?" 강태가 떠나
버리자 김씨는 말벗이 사라져 섭섭한 얼굴로 물었다.
"북시장 근처랍니다." "가 봤소?" "아니요." 위치를 말로만 들었다고, 이제
곧 가 볼 참이라고 하자 김씨는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갸우똥하였다.
"거기는 좀 험한 곳인데에." "험하다니요?" 마적이 나옵니까? 강모는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하였다.
"빈궁하다는 거지요." "아니, 거기도 서탑 동네 아닌가요?" "조선 사람이
살기야 많이 살지요만 여기보담은 좀 낮고, 북시장 근처에는 중국인 전용
유곽이 있어서.....거 아주 지저분하고 복잡해요." "중국인 전용 유곽이라니?
유곽에도 무슨 전용이 있습니까?" "있고말고요. 거기는 중국인들만 갑니다.
조선 사람이나 일본 사람은 절대 안 가요." 이상하다." 아니 그럼, 조선 사람
일본 사람 가는 유곽은 따로 있단 말이에요?" 흥미가 있어서라기보다, 조선
것에 대한 파악으로 엉겁결에 물은 것이었지만, 강모는 뒷목이 붉어졌다.
김씨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진지하게 설명한다.
"시칸방 북시장에서부터 저쪽 서탑 보셨지요? 그 서탑 아래 신시장까지 주욱
일자로 넓다랗게 뻗은 시부대로 훤칠한 길 좌우 일대가 조선 사람만 사는 지역
서탑거리안데, 사람들은 그냥 이 거리를 간단히 서탑 그래요. 저기 서 있는 저
탑이 서탑이죠오. 그런데 이 서탑거리의 동쪽 끝은 시칸방이고 서쪽 끝은
신시장이라. 신시장에는 가보셨어요?" "아니요" "그걸 새로 지었습니다. 원래
구시장이 서탑 왼쪽에 있었는데 헐었거든요. 그러니까 서탑에서 치자면
남쪽이죠. 그게 원래 오래된 시장이었어요. 없는 것도 없구요. 그런데 이제
시부대로 오른쪽으로 자릴 옮겼어요. 시장을." 바로 이 신시장 옆구리를 끼고
배암처럼 기다할게 고불고불 굽이치는 골목이 '버들거리', 야나게마찌,
유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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