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죽기 마련인 조선 인민, 노동자, 농민들은,
발바닥이 찍어지게 걸어가다 죽더라도 신천지가 있다니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어찌어찌 목숨 붙어 여기까지 왔으면, 본증적으로 손톱 발톱 써래
삼아, 돌 고르고 나무뿌리 캐내면서 개간하기 마련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개척단." "요새 부쩍 더 하는 것 같습디다." "만주 선전?" "예" "정국이
불안해서 그렇겠지. 빛이 부시면 그림자 짙은 법 아니냐. 일본 내부에서라고 왜
소요가 없겠어? 사람 생각은 같은데. 그걸 무마하고 안도감을 주려는 수단
방편으로 이처럼 화려한 소도구, 신도시 봉천.신경을 번쩍번쩍 세우는 거라.
과시도 할 겸. 저희들이 침투 점령한 만주 지역을 군대만으로 다 버틸 수는
없으니까. 이 넓은 땅에 배치할 군인 숫자도 턱없이 모자라지만, 또
전쟁해야지, 인력이 어디 남나, 그러니 농민들을 감언이설로 유치해서, 대신
농사 지어가며 땅을 지키게 하는 셈이지. 다목적으로, 그런데 무어? 평화향의
석양에 무품의 옥야? 망할 놈들." "년이라면서요? 스즈에." 강모가 눙친다.
"너를 내가 오래 참아야겠지?" "이 몸이 얼른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어 버리는 강태의 얼굴이 어둡다.
"너 변죽이 많이 늘었다." "어차피 역사나 중명할 미친 짓이 겁도 없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난세 아닙니까. 살아 남는 길이란 한 가지뿐이에요."
"무언데?" "마약이거나 농담." "너는 정말 영원한 부르조아야. 쁘띠 도련님."
"한심하시겠지만, 그것이 내 방법입니다." "마약보다 농담을 택해 줘서
고맙다, 힘들거든, 계속 그렇게 까불면서 넘어가거라."
강태는 칼끝 같은 입술을 차갑게 다물고, 강모는 강태가 던져 버린 신문지
조각을 집는다. 마늘 나뭇잎같이 삭은 종이의 촉감.
열렬하고도 환상적인 찬사로 범벅이 된 '다미(일본 백성이 자기들을 스스로
친근하게 지칭하는 말)의 편지 끝에, 그 개척단이 머무는 마을 근교의 소식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강모가 강태 들으라고 아예 소리 내어 읽는다.
분촌 마을 안에 '독서신사'가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일망천리 평원에 우뚝
솟은 미나미 기소야마 산 중허리에도 독서신사 분사를 지었다.
다미들은 이 미나미 기소야마에 올라 신사 참배를 마친 후, 무리지어 놀다가
산 중턱에 패인 대포 구멍을 보고, 이전에는 여기가 전쟁터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저 '토룡산 봉기'를 진압한 일본군의 용맹스러운
대포 자욱인 것을 모르고, 다미들은 놀라서 여기 비적이 있었다고들 말했다.
이 구멍을 보고 다미들은 너무나 놀라, 지금껏 마음 놓고 부리던 것과는
달리, 집안일에 '쿠달리(힘든 일울 허눈 중국인)'를 쓸 생각이 없어졌다.
어떤 다미 집에서는 아내도 없는 오십이 세 중국 남자와 그의 딸 그리고 고아
소년, 세 사람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증이 일어났다.
모든 중국인들이 비적같이만 여겨져서 마음이 안 놓이는 탓이었다.
그러나 노동력이 없으니까 무섭지만 할 수 없이 쿠달리를 고용하는 것이였는데,
그들이 고된 일을 모두 하므로, 다미들은 일체 아무런 잡역도 하지 않았다. 물
길러 가는 일도 안했다. 그러다가 개척단 생활에 점점 익숙하게 적응하면서,
미나미 기소야마 산 구멍들이 사실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일본 황군의
대포자욱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 같이 환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다미들의 가슴에서 한순간에 두려움을 몰아내고, 안심과 감사,그리고 커다란
긍지를 느끼게 해 준 대포 구멍은, 오늘도 여전히 이들을 지키고 있다.
소화16년, 1941년 현재, 만주 개척지 '독서 분촌'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은 이백여 호 팔백 오십여 명에 달한다
"대포 구멍에 안심과 감사, 그리고 긍지라." "기가 막히군."
"지독한 풍자 아닙니까." 강모는 촌보를 휙 집어던진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의 묵은 기록이 오늘도 유효한 신문,
"우리는 그런 곳에 와 있는 것이다." 순간 강모의 가슴패기를 얼음 덩어리로
메다박던 봉천역 바람이 갈기를 일으킨다.
조선에서도 한강 이남 저 아래 남쪽의 매안 둥지 사람이 기습적으로 휘몰아친
강풍에 놀라, 입이 붙어 버린 기억이 살아난 것이다.
"영하 삼십 도, 정말 어마어마했지." 거기다가 그 바람이라니.
말로만 듣던 북국의 도시에 첫발을 내렸을 때, 한겨울 새벽이 트이는 남의
나라 하늘을 무심코 바라보건데, 무거운 회색 덩어리로 왈칵 가슴을 치며
달려든 것은, 구우웅 우와앙.
울부짖는 바람이었다, 바람 소리는 갈기를 날리는 맹수처럼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고 강모한테로 덤벼들었다. 강모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문득 그 바람
소리가 물어뜯은 가슴팍이 시리게 벌어져,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곤
하였다. 떠나 왔구나. 하는 서러운 실감과 불안, 그리고 결국은 버리지 못한 채
부둥켜 안고온 그림자들이, 그 벌어진 자리의 절벽 한쪽에 웅크린 냉기로 얼어
엉긴 탓이었다.
이렇게 멀리 도망을 와도 그만큼 더 멀리 따라오는 사람. 정녕 내 살아서는
지울 수가 없을 것인가. 삭풍은 좋았다.
대룩의 빙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원을 후려치며 짐승같이 울어 울어,
울음으로 날선 칼 휘몰아 지평선을 난도질하다가, 사람이고 지붕이고 여지없이
날려 버리는 힘. 울음의 힘. 겨울 내내 봉천의 황막한 하늘에서, 바람은 허공의
례정을 뒤집으며 막힘없이 무너지게 울었다.
그리고 쒜앵, 쌩 냅다 칼질을 하였다. 강풍에 쏠린 지붕들은 바람을 못 이겨
덜컹덜컹 흔들리다가, 통째로 홀랑 벗겨져 공중으로 날아갔다.
드디어 며칠 전 신문에는 "요녕성 개현진의 툰자향 박가촌 촌장집 황소가
바람에 날아갔다." 고 났다. 봉천은 바람막이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서탑은
조선 사람의 둥지예요."라고, 강모가 거처를 정한 집 주인 김씨는 말했다. 그는
절을 "덜."이라고 발음해서 처음에는 무순 말인가 못 알아들었던, 나이 한
사십된 평안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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