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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15)

카지모도 2024. 7. 20.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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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의 높이는 구십 척, 웅대하고 화려하게 하늘을 찌르고, 둘레는 칠십 척,

부둥켜 안고 울려 해도 너무 넓었다.

조선에서는 본 적이 없는 형태의 풍요로운 관능이 차 오른 둥그런 몸통, 그

한가운데 타원형의 녹청색 조각 장식이 된 문이, 주금장식 된데다 ㅈ은 자주

속문에 겹치어 요염히 드러나고, 그것을 받친 석단의 네 모서리에 갈기 날리며

눈 부릅뜬 거대한 해태, 둥글둥글 한 켜씩 좁히며 쌓아올려 비애롭도록

장엄하게 뾰족이 솟구친 꼭대기의 정교 화려한 첨탑들은 라마교 양식이라는데,

하늘을 두른 탑의 어깨에는 풀이 나 있었다.

강모는 해가 질 때면 이 탑이 보이는 서창 앞에 내내 머물러 광대무변의 도시

너머 평원으로 지는 해와, 그 붉은 해를 등진 채 가슴으로 어듬을

받아들이며 한없이 큰 고적과 슬픔의 아름다움에 물드는 서탑을 홀린 듯이

바라보곤 하였다.

그럴 때면 이 석탑을 지키는 절, 서탑 호국 법륜사의 저녁예불 종소리가

길고도 서글프게, 황혼을 섞어 이국의 대지로 내려앉았다. 황혼을 밟고 강태가

들어선다. "어디 갔냐?" 방안을 휘이 둘러보며 강태는 거두절미

묻는다."모르겠어요. 대동양행이나 아세아양행에 갔겠지 뭐." 강태와 함께

동문사 인쇄창에서 모이는 독서구락부 형설학회에 가려고, 윗도리를 챙겨

입으며 단추를 채우는 강모를 향하여 강태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눈썹을 찡기며 혀를 찬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대관절 그 사람을 무슨 돈이 있어서 픽하면

대동양행이고, 픽 하면 아세아양행이냐? 그러다가 아주 만모백화점이나

기꾸야로 진추라는 거 아니냐?"

강모는 아무 대꾸도 하니 않는다. 그러나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늪속으로 잠긴다.

계신가요?접니다아."

마침, 고구마를 구웠다고. 김씨가 쟁반을 받쳐들고 건너 왔다. "사실은 내가 무어 하나

김히 의논할 게 있어서요."

주인집 김씨는 화덕에서 막 꺼내 뜨거운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기룸한 얼굴을 들어

진진한 낯빛으로 강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바쁘다는 신호로

일부로 팔목시계를 표나게 들여다볼까 어쩔까 하던 강태가 "저한테요?" 의아하다는

낯빛으로 붇는다. '할 말'이 아니라'의논'이라니? 나이도 많지 않은 청년이 고국 산천을

떠나, 타국땅 만리 객창에 빈 주먹으로 깃들어서, 비록 전문대학 과정이라 할 법률학관에

다니고는 있다고 하지만, 책상 놓을 방 한 칸 올바르게 차지하지 못하고, 서탑거리에서

밀려나 저만큼 우정국 너머 시칸방의 후미진 구석지 한 점을 겨우 얻어 살고 있는

강태에게, 나이 훨씬 연장인 토박이 김씨가 과연 의논할 일이란 무엇일까 싶었던 것이다.

단에는 봉천이고 서탑이고 아닉 낯설어서 파악조차도 다 되지 않은 처지라 더욱

그러했다. "두 분이서 다 같이 들어 보시요오. 어디 이게 쓸 만한 일인가 어떤가 궁리를

좀 해 주십사는 게지요."

김씨는 함께 앉은 강모를 향해서도 꼬리를 빼며 말했다. 아마 정작 김씨가 마음에 둔

사람은 강태였을 테지만, 자기한테는 인사로 저렇세 두루뭉수리 싸잡아 운을 떼는

것이려니, 짐작을 하면서도 강모는 김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말을 할 때면 거의 살랑거리는 느낌을 줄 만큼 상냥하고 가볍게 말꼬리를 쳐올리며 끌어

빼는 것이 김씨의 특징이었는데, 그것이 웬일인지 경박하게 들리자 않고 오히려 자기 말을

상대방한테 꼭 눌러서 박아 넣는 곡진함까지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였다.

만일에 그가 여자였다면 애교도 있었음직한 사람이랄까.

눈머리가 콧날 쪽으로 오목하게 파였으나 그 꼬리는 찢기워 위로 치켜진 김씨의 두

눈이 광채를 머금는다.

"단도직입으루요, 내가 이번에 이 제일면점을 늘려 가지구 잡화상점을 하나 채려 볼까아

합니다." "그 점방 자리에다가요?"

국수를 뽑아서 막대기에 빨래같이 널어 말리기에도 비좁을 가게 안을 얼른 떠올리며

강태가 물었다.

면점의 한쪽에서는 손길만 스쳐도 툭툭 부러지게 마른 국수를 짤막짤막 잘라서 한 묶음씩

다발로 만든 것을 좁은 진열대 위에 올려 놓아 팔고, 그 나머지 공간은 거의 대부분 면발

늘어진 가닥이 빼곡 들어차 처지하고 있는 형편인데, 잡화상점을 하겠다면 어디다, 어떻게,

또 무엇을. "옆집에서 점방을 내왔지 뭡니까" "남선상회요?" "예에에"

김씨의 대답 소리가 물결을 친다. 그것을 뻐기는 것도 같고, 흥겨운 것도 같고, 당연한

일을 당한 것도 같고, 신통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도 같으면서, 아직은 탐색의 기색을

거두지 않은 의심스러움을 깔고 있는 예에에 였다.

"그 집이 면적은 우리 면점보담도 더 크지요오? 그러니껜 그걸 벽을 터 가지고 두 자리를

하나루 맨들라치면 그것두 작진 않을 거구, 또 지금마냥 면점을 면점대로 두구선 그 옆에

자리에다가는 내가 계획해서 해 보려는 걸 해두 좋겠구요."

"그런데 왜. 그 남선상회는 잘 안됐던가요?"

가제고 집터고 흉해 나가는 집에 들어야 좋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얼핏 생각나서, 강태가

무심코 묻는다.

"뭐 그저 그랬지요, 겨우 밥술이나 얻어먹었달까, 하긴, 아주 잘 됐다면야 기왕에 자리

잡은 데서 눌러앉지 무엇 하러 신경까지 가겠어요오? 그 사람들은 신경으루 떠난다던데.

신경이 여기서 어디라고. 거긴 여기보단 훨씬 더 위쪽이구 춥죠오."

"일본이 아주 마음먹고 도로도 반듯반듯 시원하게 뚫고 건물 번쩍번쩍 깨끗하게 지어서,

과시용 국제 도시를 계호기적으로 만든 곳이라. 장사하기는 좋겠지요."

"거기다가 숫제 만주국 황궁까지 가짜로 지어서 위만의 수도로 삼았으니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아. 정말, 이름까지 새서울이다아 하구선 떠억 신경, 그래 왔으니,

서울은 무슨, 명색도 없는 부의를 꼬여서 꼭두각시 황제로 앉혀 놓고."

다혈질인데다 단호한 바도 있어 보이는 김씨는 매사에 참견할 일 또한 많았다. 그는 그런

일을 두고, 말로라도 꼭 한소리를 짚곤 하였다.

"그렇지만 장사가 아주 안되지도 않았지요. 얼. 목이 괜찮거든요. 장사란 게 목이 반절은

먹고 들어가잖습니까."

바느질할 때는 한 올을 다툰다 하지만, 그것을 장사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길목에 나란히

열린 가게라도 그 처마가 조금 앞으로 뻗쳐 나오느냐 들어가느냐, 혹은 진열대가 한 뼘

길목으로 나앉느냐 들어가 앉느냐, 또 사람들 왕래가 잦은 쪽에서 한 걸음 더 가는 곳이냐

덜 가는 곳이냐 하는, 별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것들에 뜻밖의 복병은 숨어 있다.

물룬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물건의 품질이나 종류.종업원의 친절도 모두 중요한

항목이겠으나 우선 먼저 장소를 잘 잡아야만 이문이 확실하다고 김씨는 역설하였다.

강모가 오유끼와 함께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김씨의 집 점방 '제일면점'은 목이 좋았다.

봉천역을 등지고 서서 바라보면,막힘없이 대로로 뚫린 길이 다섯 갈래이다. 그 길 모양을

공중에서 내려다본다면 커다란 'ㅈ'자로 보일 것이다. 아니다. 그 한글 자음으로는 네 갈래

길박에 그릴 수가 없다. 그러니 우선 아니 '불'자로 비유해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이

'불'자의 꼭대기에 점을 하나 찍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봉천역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글자를 모로 눕히어 ' ' 로 만들어 놓는다.

가닥이 모여 있는 중심점에서 아래로 법은 오른손 편으로 가면 모래산과 혼하가 있는

남쪽이요. 위로 뻗은 외손 편으로 가면 북쪽, 서탑이 있는 서탑거리가 나왔다. 그리고

가슴팍 복판을 지르며 직선으로 뻗쳐 나가는 갈과, 그 길의 왼쪽 빗금으로 백계 로서아

거리. 오른쪽 빗금으로 평안좌 일본인 거리가 훤칠하게 열려 있었다.

봉천역에서 보아 크게 다섯 갈래 길이지 그대로 더 달려 나가면 백계로서아 거리도,

남북으로 꿰뚫린 계획 도로의 교차로를 여러 번 만났다. 그 교차로마다 광장이 둥그렇게

꽃판같이 벌어져 꿀벌처럼 사람들을 모아 들이며 흥성스럽게 번창하엿으니.

백계 로서아 거리가 첫 번째로 만나는 교차로는, 일본인들이 향수를 달래고 긍지를

느끼도록 일본의 오사까 거리를 그대로 본떠다가 축소하여 길목이며 상점의 건물 모양,

그리고 파는 물건, 입구와 가로수 종류 배치까지도 영락없이 판박이로 만들었다는, 일본인

상점 거리'춘일정'의 화려한 소를 흐으러지게 이루면서, 동북간방으로 장쾌하게 흘러, 두

번째 교차로 광장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틀었다. 이 광장은 드넓었다.

한가운데 왕릉 같은 잔디 동산을 새파랗게 인공으로 만들어 놓고, 가장자리에는 철따라

형형색색 온갖 꽃들을 심을 광장은 늘 뒤설레었다. 광장이 바라다 보이는 각 귀퉁이마다 선

것을 특별한 건물이었다. 맹수의 발톱같이 매섭고 다부지게 지은 삼릉상사는 네거리의 서쪽

모서리에 서 있었고, 청동빛 녹의 서슬이 시퍼렇게 돋은 지붕 꼬대기 봉천 경찰서는 북쪽

모서리에, 그리고 "일본에서 황태자가 만주로 시찰을 오면, 다른 데서는 절대로 안 묵고

반드시 여기사만 묵는다." 는, 그 유명한 '햐마또 호떼루'는 남쩍 모서리에 대리석 궁전을

방불케하는 위용과 호화조움을 삼엄하리 만큼 뽐내며 서 있었다.

이 대화호텔이 있는 쪽으로 난 길은 그대로 더가면, 흐르던 혼하의 한 자락이 막히어

호수가 된 남호, 혹은 장호라고도 불리는 '나가누마'호수에 이른다.

평안좌 거리가 동남간방 빗금으로 흐르다가, 광장에서 나가누마를 향하여 거침없이

똑바로 흘러내려오던 도로를 받아 교차로로 한 바퀴 빙그르르 맴을 도는 곳에, 작은 광장이

또 하나 생겨났다. 이곳은 기념관 광장이다. 일본이 각처에서 승전을 할 깨마다 그

용맹스러은 황군의 전투 모습을 감격적으로 찍은 사진이나 아니면 전리품, 혹은 설명문

같을 것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전쟁기념관이 바로 이 광장 로터리에 서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를 '기념관 광장'이라고 불렀다.

야마또 호텔이 있는 것이라 해서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대화혼을 상징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북쪽의 큰 광장은 '야마또 광장'이라고 하였다.

야마또 광장에서 기념관 광장까지 내려오는 신작로 양쪽에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일본인의 관공서나 학교, 공공건물들이었다. 그래서 혹 일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조선 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은 그 근처에 가기도 전부터 미리 오금이 붙어 앉은뱅이 걸음을

하였는데, 야마또 광장 로터리의 동쪽 갈래 골목만한 길 안쪽에 호젓하게 들어앉은 것은

낭속여중이었으며, 큰 길가, 야마또 호텔이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곳에 자리잡을 것은

남만주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이었다. 그리고 그 병원 바로 옆에는 소방대가 불자동차를

새빨간 탱크처럼 주야로 즐비하게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까 봉천역

가슴팍에서 직선으로 받은 가운뎃길이, 창대마냥 위쪽에서 뻗쳐 오는 교차로를 맞받아 훌쩍

건너면 충령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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