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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25)

카지모도 2024. 10. 6.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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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호기심과 조롱으로 펄럭이며 불꽃 따라 너울대던 아낙의 날렵한 혓바

닥들은 어느새 시퍼런 비수처럼 곤두서고 있었다. 칼날은 베거나 찌르고 싶어한

다. 그들을 불너울 이쪽에서 힐긋힐긋 훔쳐보는 옹구네 검은 눈에도 비수 같은

불길이 파랗게 일었다. 장사 댕기는 예펜네가 이런 일에는 제 격이제. 지일이여.

이 집 저 집 문밖마동 말 뿌리고 댕기는 디는 이만헌 사람들이 없제이. 그네는

벌써부터 날 새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흥겹고도

음모에 가득 찬 밤이 한바탕 거꾸러지도록 징 치고 꽹과리 치며 놀고 싶은 들쑤

심을 감당히기 어려웠다.

"야는 어기 갔다냐."

공배가 춘복이 찾는 말 하는데 공배네는 옹구네를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고

리배미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와서 뒤설킨 솔밭 삼거리 비오리네 주막 앞, 달집

의 불길 주황빛에, 거멍굴 사람들도 흥이 실려 격의 없이 장단을 맞추는데, 으레

있어야 할 춘복이가 빗감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퍼자빠져 자든 안헐 거이고."

공배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것은 옹구네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남모르게 서로

어우러져 지내는 밤중의 농막에서야 그런대로 너냐 나냐 하지마는, 언제 한 번

남 앞에서 보란 듯이 터놓고 내외 시늉 해 본 일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늘

꼬꼬름하고 애석한 옹구네로서는, 이런 날에라도 좀 북 치고 장구 치고 같이 춤

도 추면서 신명나게 놀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춘복이는 머리카락 오라

기도 비치지 않았다. 안 오든 안헐 거인디. 타동네로 갔능가? 않든 짓을 귀끔맞

게 왜 허리라고? 느닷없이 급체 곽란이 났이까? 서성서성 불가를 맴돌던 옹구네

가 그만 역증이 나서, 에이, 빌어먹을 놈. 꼭 사람 애간장 말릴 일만 골라감서

허제. 아 왜 그렁고오. 시여언허게 좀 못해 주고. 사람 속 이렇게 감질나게. 감병

에는 약도 없는디. 먹고 잪고 갖고 잪고 보고 잪은 걸, 못 먹고 못 갖고 못 바서

애트는 병, 먹어야고 가져야고 바야만 풀리는 병을 다른 걸로 어뜨케 고쳐. 천하

망헐 놈. 이렇게 존 날, 동네방네 다 나와서 뛰고 놀고, 배곯은 개새끼도 달 보

고 짖는 밤에, 너는 어디 가서 멋 허고 노니라고 나를 이렇게 적막강산으로 맨

드냐, 맨들기를. 에에이. 토라진 중에도, 주말거리 평상에 옹게종게 모여 앉은 비

오리어미와 아낙들이 그네를 혹시라도 부를까 봐, 옹구네는 조바심이 났다.

"꿈에라도 나한테 들었다 소리는 마시요잉. 그러먼 나는 죽소. 살어서도 설운 세

상 죽을 때나 곱게 죽어야 저 갈 디로 가제, 매맞어 죽은 구신 봉두난발로 피투

셍이 칠갑을 허고 거리 중천 오갈 디 없이 중음신이 되먼, 내가 어디로 가겄소?

내가 인자 그렇게 되먼 이집 문짝에, 쌧바닥 빼물고 엿가래맹이로 짜악 붙을랑

게. 알어서 허겨. 잉? 어쩌겄어? 사단이 여그서 난 것을."

옹구네는 비오리어미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원 벨 놈의 지랄 같은 소리를 다 듣겄네. 재수없게."

"그렁게 내가 그러드란 소리는 허지 말란 말이요."

"아 그렁게 그 무선 말을 누가 허라간디. 무단히 지 발로 할랑할랑 찾어와 갖꼬

일을 지어 긍게? 허, 나 참."

"믿을 만헝게 했지라우."

"믿었으먼 되얐제, 멀 또 못 믿어서 토를 달고, 오금박고, 겁을 주어? 애초에 허

들 말제."

"말 못허고 죽은 구신이 씌였능갑소. 내가."

"걱정을 말어. 나도 술장시 주모 노릇에 단내가 벡인 년잉게."

"그것 믿고 나도 말 헝 거 아니요잉?"

"옹구네란 소리만 빼먼 다른 소리는 해도 갠찮응가?"

"그거사 알어서 헐 일이고."

"백여시."

"어찌 천여시는 못되고?"

"에라이"

그랬으나 이 순간에 눈이 마주치면 비오리어미가 옹구네를 가리키며

"저그 있네, 저그 있어, 저 사람한테 들었잉게로 직접 불러서 물어 보드라고, 아

이, 옹구네 이리 와 봐."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한테 호기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고, 자리 떠야제

못쓰겄다. 고운 님도 없는디, 혼자 보는 꽃귀경이 무신 재미냐. 은근히 불안하기

도 하고, 춘복이가 종내 나타니지 않는 것이 허출하기도 하여 그네는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솔밭 삼거리에서 빠져 나올 때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공연히 미

적 거렸지만, 일단 그 어귀를 벗어난 옹구네는 벌에 쏘인 사람처럼 뒤도 안 돌

아보고 내달았다. 고리배미 온 마을이 풍물 소리와 함성과 일렁이는 달집의 불

길, 그리고 얼어붙은 하늘에 무수한 금박 불티 날리며 흩어지는 폭죽들로 뒤설

레어 매암돌고 있는 이만큼은 너무나도 교교하였다. 풀벌레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엄동의 한산에 서리 같은 달빛이 내려 산 그림자는 더욱 검은데, 거멍굴로

난 소롯길은 푸르도록 흰 가리마를 달빛 아래 드러내니. 명절은 사람들의 것이

지 산천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거멍굴은 더더욱 교교하였다. 근심바우 웅크리

고 앉은 동네 어귀로 들어섰지만, 달빛이 쓸어 내리는 찬 손길에 지붕을 맡기고,

집집마다 모두 집을 비워 택주네도, 공배네도, 평순네도, 당골 백단이네도 지게

문이 굳게 닫힌 채 불빛이 없었다. 빈 마당에 깔린 달빛은 밤새 쌓인 눈처럼 사

람 스친 흔적이 없고, 고샅길도 숨서리조차 달빛에 빨리워 창호지보다 창백하였

다. 옹구네는 이토록 숨막히게 비어 있는 마을을 처음 보았다. 그럴 일이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대보름 달맞이를 가거나 달집 태우는 풍물

놀이를 구경가거나, 마을 사람들 다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오게 되었디,

이렇게 옴시레기 비어 버린, 제 숨소리가 메아리로 울릴 지경인, 괴괴한 마을은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네는 왈칵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다들 어

디 갔능고? 금방 그 사람들과 함께 있다 오는 길이건만 옹구네는 등줄기를 훑는

소름에 진저리를 치며, 아까보다 더 잰 걸음으로 내달렸다. 농막으로 가는 걸음

이었다. 그러나 농막도 비어 있었다. 으아, 참말로 환장허겄그만잉. 이놈의 인간

이. 문짝을 열어제치며 됫박 같은 방안을 아무리 씻고 들여다보아도 사람 그림

자 없는것에 힘이 빠진 그네는, 엉덩이를 방 문턱에 걸치고 앉아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마당을 바라보았다. 무어 마당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냥 좀 평평한 한

데에 불과한 그 한 뙈기 마당이 그네에게는 둠벙만하게 느껴졌다. 쭈그리고 앉

은 그네는 볼따구니가 얼얼하였지만 방으로 들어갈 생각도 바깥으로 나갈 생각

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막막하기만 하였다. 이 세상에 참말로 나는 혼자구나. 하

는 하염없는 서글픔이 무서움도 삼키고, 추위도 삼키고, 집에서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옹구도 삼키고, 달빛으로만 허기를 채우며 텅빈 마을의 텅 빈 집들을 하나

하나 둘러 삼키었다. 그리고 아직도 심연나게 불가에서 맴돌 고리배미 삶들의

겨운 몸짓이 아득하고 눈물나는 세상의 멀고 먼 그림자 시늉인 것만 같아서, 고

개를 떨구었다. 나만 혼자구나. 너는 어디로 가서 누구랑 놀고 있능고. 허기사

나는 아무껏도 아닝게. 옹구네 수그린 고개 뒷덜미로 싸르락 싸르락 달빛이 내

려앉았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던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춘복이를 포기하

고, 시린 모가지를 움츠리며 우선 저 사는 오두막으로 돌아왔던 옹구네가, 결국

은 다시 두루치자락을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내달린 농막에, 춘복이는 아까 같

은 꼴을 하고 와 있었다.

"하이고오. 오사네"

들이당짱에 팍 꼬부라진 침을 놓으며 침을 놓으며 주질러 앉는 그네를, 춘복이

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얼핏 비친 달빛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얼굴은 푸르

게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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