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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26)

카지모도 2024. 10. 8.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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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다 왔대?"

재차 물어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겁고 깊은 한숨을 토하였다.

어찌 보면, 그가 힘없는 창호지처럼 펄럭 쓰러지지 않는 것은 뱃속에 삼키고 있

는 그 한숨의 무게 때문인 것도 같았다. 춘복이는 제 한숨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왜 이러까. 자꾸만 몸 속에서 진기가 연기같이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손금

사이로 힘없이 새는 속 기운은, 주먹을 쥐어도 모아지지 않고 그만 스르르 풀리

며 흩어져 버리었다. 다리에도 힘이없어, 깍지를 끼고 모아 세운 무릎이 픽 모로

쓰러지려 하였다. 꿈인가. 안 그러먼 내가 헛것이 씌여 도깨비한테 홀렸이까. 그

게 아니라먼 그런 일이 대관절 어뜨케 그렇게 꿈맹이로, 참말로, 똑 거짓꼴맹이

로,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잉가. 그러나 그것은 꿈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며, 참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믿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믿기에는 너무나 엄

청난 일 아닌가. 맨 처음 강실이의 이름을 가슴 밑바닥에 새겨 박을 때, 그 아픔

과도 같고 전율과도 같던 절실함이 서러운 천골의 뼛속까지 울리게 하였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쇠끝에서도 싹이 트는 것일까, 거꾸로 박힌

끌 같은 그 이름에서, 들키면 큰일나는 소원이 이파리 돋고 그것은 점점 자라

가지 벋으며 무성해졌으니. 죄. 죄라고 하여도 할 수없었다. 이미 염념불망, 오직

한 생각에 사로잡힌 그 자신을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던 회오리의 나날이, 드

디어 제 몸을 제가 감아 무섭게 응집되는 것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었으리. 그

엉기고 뭉친 기운은 하늘도 풀 수 없고, 하늘 아래 그 누구도 풀 수 없었다. 오

로지 단 한 사람, 강실이만이 그 울혈을 풀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춘복이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소원을 이룬 것이다. 나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런디 내가

왜 이러까. 그는 무너지게 허탈하였다. 온몸을 절박하게 채우고 있던 울혈이 멍

든 덩어리째 울컥울컥 쏟아져 버리던 순간, 춘복이는 핏줄마다 고이고 막힌 설

움까지 함께 토하며, 울었다. 아비와 할아비와 그 윗대의 할아비 때부터 질기게

도 꼬여 온 핏줄의 동아줄이 툭, 소리를 내며 장쾌하게 끊어져 풀리는 것을 그

는 느끼었다. 그는 속박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켜켜이 버캐 끼어 바위보다 무거

워진 누대 천골을 뼈째로 토해 내며, 그는 가벼운 몸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

위에 뜨는 무중력의 나뭇잎마냥. 그러나 어인 일인가. 원한으로 짓뭉개어 덩어리

진 무거움을 폭죽같이 터뜨려 쏟아버리고, 쑥대강이 부엉머리 머리털마다 깃털

이 돋아나 나부끼며 가벼웁게 날아야 할 몸뚱이가, 이윽고 헐렁한 바지 저고리,

허울만 펄럭이는 가랑잎처럼 바스러지려 했던 것이다. 농막으로 돌아오는 그의

투박한 발은 제대로 땅을 눌러 딛지 못하고, 허청허청 허공을 밟고 있었다. 지하

수만 리, 지상으로 아득히 구만 리까지도 우람하게 뿌리 벋고 가지 벋은 나무의

무성하고 실거운 가지에다, 목마른 입술을 붙이고, 수액 진진한 젖을 빨며 저 하

늘 끝 끝 상상에 물오르는 나뭇잎이 아니라, 제 이파리 미천한 엽맥의 수분마저

도 그 나무한테 모조리 흡입당해 버린 채, 기진하여 그만 하릴없이 떨어져 날리

는 가랑잎. 한낱 가랑잎 한 장. 이상하게도 그는 강실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멀

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토록이나 응어리지게 바라던 순간은 그의 오래고 오랜

간절함을 비웃으며 너무도 어이없이 지나가 헛본 듯하고, 소원을 이루었다 하나,

실은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으니. 그가 정욕에 마음을 두었다면 모르겠거

니와, 한 사람의 한세상을, 뿐만 아니라, 가지 끝에 접붙어 묵은 몸 껍질을 깨뜨

리고 새 잎사귀로 태어나, 그 거대한 나무의 뿌리부터 가지 꼭대기까지 온 그루

를 내 것으로 하고자 탐내었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떠밀려난 무참함으로 그는 허공을 딛으며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그저 거기 접

붙어서 그 거목의 수천 수만 잎사귀 가운데 명색 없는 이파리 하나 되는 일조차

도 언감생심 참람하게 생각되어,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몸 가진다고 다 되는 것

이 아니여. 작은아씨가 참말로 내 사람 되야, 내 자식 낳고 사는 그런 일이 내

앞에 당허는 날이 오까. 그는 다시 어찌해 볼 길 없는 나뭇가지 꼭대기를 올려

다보는 심정으로 정월 대보름 빙천의 흰 달을 시리게 우러러 보았다. 아까 동산

날망에 올라 늑대같이 울부짖으며

"달 봤다아아."

폐장이 터져 나가게 소리 질러 그 희고 맑은 달을 가진 뒤, 온몸을 구부리고 엎

드리어 빌었던 소원이 아직도 저 둥근 얼굴 어디엔가 흔적이나마 묻어 있기를

빌면서. 내가 왜 이렇게 울고만 싶단 말이요? 달님. 내가 무얼 잘못했소? 천만

없소. 그러는 춘복이에게 끼쳐드는 또 다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어떻든 사단이

났으니, 매안이 뒤집히고 일이 벌어지기는 벌어질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작은 숙

덕거림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로. 그 회오리의 복판에 춘복이가 눈구

녁 뜨고 서 있었다. 그께잇 거 끄집혀 가서 디지게 뚜드러 맞고 빽다구 뿐질러

지는 거이 내가 겁나겄냐. 덕석몰이 개 잡디끼 몽뎅이질 헌대도 나는 안 무섭다.

그대로 대그빡 쪼개져 죽는대도 나는 겁 안 난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는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며 뼈가 바스라지는 형장에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혹독한 태질이라도 못 당할 춘복이가 아니었으니. 그

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형체가 없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잡을 수도 없는, 운명의 속 깊은 아가리에서 끼쳐 오는 그 어떤 기운일

는지도 몰랐다.

"일은 저질렀지마는."

춘복이는 옹구네를 바라보지 않은 채 한숨처럼 겨우 그 말을 밀어냈다. 옹구네

한테 말하기는 정말 싫은 일이었으나, 아무래도 그네가 알아야 할 일인 까닭이

었다.

"머?"

느닷없는 그 말에 옹구네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같이 낯색이 질리면서 입을 쩍

벌렸다. 순간, 그네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섰다. 그리고 저고리 앞섶이 부르

르 떨렸다.

"하이고, 가만 있어 바."

그런 중에도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옹구네가 목에 걸린 침을 삼켰다. 거르르

륵, 바튼 목을 깎으며 숨이 넘어갔다.

"찬찬히 이얘기해야 내가 알제."

"더 들을 말이 머 있다고?"

"아 왜 없어어?"

옹구네가 주먹을 들이대듯이 턱을 바싹 춘복이 턱밑으로 들이밀었다. 억누른 목

소리에 날이 서 앙칼졌다.

"왜 이러요?" 모르는 일도 아님서 같이 궁리해 놓고."

춘복이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이고매.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선 옹구네 머리 속은 펀득펀득 생각들이 한꺼번에 번개를 쳤다. 그랬

그만잉. 그러니라고 그랬그만잉. 아이고, 너는 그러고 댕기니라고 없엇그만잉?

그런 너를 찾니라고 나는 언 발에 감발허고 헤맸그만잉? 무신 열녀 났다고, 너

는 지집 품고 딩구는디 나는 여그, 느그 집 문턱에 걸터앉어, 들으가도 나가도

못허고 쭈그리고 앉었었다. 이놈아, 아이고오, 내 팔짜야. 내가 어쩌다 너를 만나

이 수모를 당헌다냐. 머? 모르는 일도 아님서? 오냐, 내가 안다. 아는 일이다. 우

리 서로 대가리 맞대고 궁리헌 일잉게, 이런 날 닥쳐오는 거이 당연허고말고. 허

나 사램이 그러능 거 아니다. 아니여. 내가 아능 거 달르고 당연허리란거 달르

고, 니가 나한테 허는 인사가 또 달른 거이다. 니가 나를 암만 무시헌다드라도

이러먼 못쓰는 거이여. 나 불질러서 너한테 졸 거이 없제. 오늘만 살고 내일 죽

을 거 아닌 담에야. 응? 지내가는 홰냥년을 데고 자도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

는다는디. 이건 머 만리장성을 쌓는 거이 아니라 쌓든 만리장성도 말 한 마디로

허물어 부리네. 긍게. 싸가지 없이. 정 띨라고 작정을 했그만, 나 볼일은 끝났다

그거여, 시방? 안될걸? 그렇게는 안되야. 너만 사램이고 나는 사람 아니냐? 하이

고오, 기가 맥헤서 참말로.

"춘복이 재주 좋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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