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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24)

카지모도 2024. 10. 5.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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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남의 님

 

"자알 했그만. 잘 했어. 하이고오. 이뻐서 등짝을 패 주겄네 기양. 아조 쪼개지

게 패 주겄어어."

휘유우. 옹구네는 시퍼렇게 심지 박힌 음성을 어금니로 짓갈아 응등그려 물면서

그렇게 비꼬고는, 외마디 한숨을 토했다. 춘복이는 주빗주빗 뒤엉켜 부수수 일어

선 부엉머리를 봉분만하게 이고 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질 같이 뻗세

게 쑤실쑤실 휘감아 솟구친 눈썹도 웬일인지 숨이 죽어 시커먼 빛이 가시고, 낯

색도 해쓱하여 여윈 듯한 모습이 도무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춘복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두 팔로 무릎을 깍지 끼고 앉은 채 꺼부정한 등허리를 구부리고 있었

다. 그는 입술조차 퍼르스름 핏기 없이 질린 빛이었다.그는 푸른 물이 묻어난 백

지장같이 얇아 보였다.

"아니, 얼빠졌능게비. 정신채려어. 도깨비한테 홀렸능가, 왜 이리여? 밤새드락 어

디 논으로 밭으로 끄집헤 댕겠어? 씨름 허니라고? 안 그러먼 왜 그러고 너엇허

고 앉었당가? 사람 들와도 왔냐 소리도 안허고?"

옹구네는 아까, 벌컥 지게문을 열어제치고 농막으로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달

빛에 드러나는 춘복이를 한눈에 훑어보며 대꼬챙이를 박았다. 대보름 휘영청한

달빛은 여한도 없이 밝아서, 벌써 밤이 깊어 삼경이 기우는데도 대낮같이 환하

여, 지게문 남루한 부들자리 궤짝 같은 농막 속을 시리도록 푸르게 물들여 주었

다. 그래서 춘복이는 물 속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어데 갔다 왔대?"

문짝을 잡아당겨 덜크덕 닫으며 옹구네가 춘복이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춘복이

는 움찔하며 조금 비키는 시늉을 하였다.

"내동 찾었그마는.""

무명 수건목도리를 풀어 탁, 방바닥에 던지는 옹구네 음성이 앵돌아 졌다. 딴에

는 며칠 전부터 궁리를 거듭하여 벼르고 벼르던 일을, 오늘 밤에 드디어 큰마음

먹고 해낸 끝인지라, 비오리네 주막에서 나오는 걸음으로 주막 앞 솔밭 삼거리

달집 사르는 언저리에서 두근두근 어정거리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춘복이가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애를 태우고 발싸심을 했었다. 옹구네는 비오리한테

강실이 이야기를 한 것이며, 비오리와 그 어미의 반응이 어떻더라는 말을 어서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보라,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너와 나는 한 패다, 그러니 너는 절대로 나를 버려서는 안된다, 는

것을 그네는 춘복이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그네의 예상대로 비오리어미

는, 달집이야 무시무시할 만큼 검붉은 불너울로 하늘을 뒤덮으며 타오르든 말든,

몇몇의 아낙들과 떡장수 곤지어미, 방물장수 서운이네와 호물호물한 서운이 할

미, 나무장수 부칠이네, 나막신 깎어 파는 모갑이네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조

름조름 주름잡힌 입시울로 은밀하고 더운 입김을 불어, 또하나의 불너울을 일으

키고 있었다. 속이 있는 옹구네 눈에는 그것이 여실히 모였다. 비오리어미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슬쩍슬쩍 스치며 붙인 불길이 화르르 화르르 붙다가, 이윽고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둥그러미를 이루며 그 노파를 에워싸고 모여들어

한순간에 세찬 바람을 얻는 것이. 화염. 그들의 혀는 무서운 소리로 타오르는 불

꽃이었다. 널름이는 혓바닥이 달집 타는 화광에 비쳐, 잘린 듯 어둠 속으로 숨어

들었다가 놀리듯이 날름 꼬리를 세우곤 하였다. 달집을 에워싸고 갱개갱개 갱개

갱개 꽹과리 치며 날라리 드높이 불고 덩그덩그 덩더구꿍 덩그그끙 덩그덩덩 덩

궁덩궁덩궁 더궁더궁더궁더궁, 접가락 장구를 두드리는 옆에서 열두 발 상모를

절묘하게 휘둘러 달빛의 혼을 뽑아 풀었다 감고 감았다 푸는데. 으쓱으쓱 둥덩

실 어깨춤을 추는 이, 누런 이빨 다 빠진 입속을 불길에 드러내어 잇몸으로 웃

는 이, 그리고 번개같이 불에 구워낸 콩을 까먹는 아이들과 막대기를 추켜들고

공연히 우우우우 몰려 다니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비오리는 처창하게 목을 놓

아 '홍타령'을 불렀다. 꿈이로다 꿈이로오다 세상은 모오두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오 이것이 모두 꿈이로다 꿈 깨인 또 꿈이요 이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

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새앵 부질없다아아 네가 꾼 꿈을 두고서 무엇을

헐끄나아 아이고오 데고오 허허어나아아 성화가 나았네에 에에에에. 서럽게 허

망하고 흥건한 홍타령이 굽이굽이를 치며 달집의 불속으로 서려들고, 달집은 대

나무 튀는 터뜨리어 찬란한 비명을 달빛 얼은 반공에 수놓을 때.

"아이고,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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