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7권
1. 검은 너울
"무릇 남자가 여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간사하고 혹은 연약해서 요사스
러운 짓을 많이 하고, 여자가 남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사납고 혹은 잔인
해서 일찍 과부가 되는 사람이 많아, 본디의 음양 풍수가 서로 뒤집히고, 명수가
각각 어그러지기 쉽다고 했느니."
그것이 어느 해 정초였던가, 청암부인은 큰방에 그득히 모여 않은 문중의 부
인들과 담소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며느리 율촌댁이 담옥색 명주 저고리에 물 고운 남빛 끝동을 달아 자주 고름
길게 늘인데다 농남색 치마를 전아하게 부풀리고 단정히 앉아 시어머니 청암부
인을 가까이 모신 좌우에 담황색 저고리, 등록색 치마, 진자주 깃 고름에 삼회장
저고리, 짙고 푸른 치마에 담청색 은은한 저고리며 북청색 치마에 녹두 저고리,
앵두색 저고리에 은회색 치마, 흑자주 긴 옷고름들이 이만큼 다가앉고 저만큼
물러앉고 저만큼 물러앉은 방안은, 묵은 해 벗고 새해를 맞이한 정초의 첫나들이
세배길이어서도 그러했고, 모처럼 일가 친척 문중의 부인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
인 흥겨움에 상기되어서도 그러했고, 너나없이 새옷이면 더욱 좋겠지만 입던 옷
이라도 새로 빨아 혹 물을 다시 들이거나 깨끗하게 손질하여 푸새와 다듬이질
홍두깨질.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손끝으로 바느질 정성껏 한 설빔들을 꾸
미고 떨쳐입었느지라, 그 어느 날보다 화사한 빛깔로 방안이 가득하였다.
그 자리에는 새앙머리 예장을 앙징맞게 한 계집아이가, 깐치동(색동)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를 받쳐입고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아 고개를 이쪽 저쪽 갸옷거
리며 눈을 반짝여, 하는 말들 담아듣기 바쁘기도 하고, 꾀꼬리색 저고리에 가지
색 치마 다소곳이 여미어 한쪽에 조아린 새댁도 있었다.
오류골댁은 단청의 녹옥색 은근히 돋아나는 저고리에 치자로 여러번 물을 놓
아 황정색 오련하게 깊은 치마폭이었고, 그 옆에 강실이는 홍두깨 곱게 올린 연
두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남다르게 솜씨 음전하고, 하나뿐인 여식에 대한 지성도 자별한 오류골댁이 벌
써 섣달 들어서면 설 쇨 준비에 여념 없는 가운데, 가장 마음을 쓰는 것이 강실
이 설빔이었다.
해마다 철마다 새옷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도 형편이었지만, 꼭 그래서라기
보다는, 손으로 짠 모시나 삼베 명주 흰 옷감에 풀과 꽃과 열매로 물을 들여 이
색 저 색 내 보는 것이 그네는 재미가 있었다. 흰 감은 희어서 새 물 들고, 물들
었던 감은 더 짙은 물을 놓아 들여 보거나 다른 빛 물감을 풀어 넣으면 뜻밖의
색을 얻게 되어, 남에게는 없는 저고리 치마를 해입힐 수 있었으니. 봄철이 난만
하면 생쑥 뜯어 으깨어서 쑥물을 내 보고, 봉선화꽃 장독대와 토방 아래 자지러
지게 피어날때는 그 꽃잎 따서 무명 저고리감 붉은 꽃물도 들여 보고, 오미자
치자는 상비로 두었으며, 쪽물 또한 놓치지 않고 들여 보았다. 심지어는 시금치
삶은 물도 써 보았다.
물들일 때 옷감은 그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가.
무엇보다 얼룩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물감이 풀린 그릇에 옷감을 넣을 때, 처음 담근 자리와 나중 넣은 자리가 자
칫하면 농담이 달라져 얼룩이 생기기 쉽고, 내고자 하는 색이 한 번에 물들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어서, 몇 번이고 뒤집고 뒤집으며 엷은 색으로부터 차츰
진하게 들여가는 물.
그러다가 드디어 올올마다 빛깔이 한 결로 고루고루 깨어나게 원하는 물 들여
진 다음에는, 풀을 먹여야 한다.
풀을 먹일 때는, 눅진하게 끓인 풀을 풀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꾹꾹 주무르며
응어리 없이 탑탑하게 풀어낸 물에다가 옷감을 넣고 치대어, 그 옷감에 풀이 고
루 스며들도록 먹인 다음, 너무 바짝도 말고 너무 축축하게도 말고 꾸들꾸들 말
리어서, 거기 다시 물을 뿜어 축이고는 빨랫보에 싸 가지고 방바닥이나 마룻바
닥 평평한 곳에 놓고, 한참 동안 잊어 버릴 만큼 밟아야 하는데.
이윽고 밟는 사람 발에서 번진 온기가 빨래에 골고루 퍼질 만하면 이제 다듬
이질을 시작하였다. 빨랫보를 벗겨 내고 깨끗한 다듬이 보자기에 옷감을 바꿔 싸서,
차고 매끄럽고 단단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은 뒤 박달나무 방망이 두 개로.
딱 딱 딱 딱, 또드락 똑 딱,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 딱
두드리는 음향은, 설을 앞둔 매안 마을 섣달의 등잔불 아래 이 집 저 집 처마
마다 밤 깊은 줄 모르고 울리었다.
이렇게 두드린 옷감을 다시 홍두깨에 편편하게 말아서 홍두깨틀에 얹고, 틀
아래 다듬잇돌을 받쳐 놓아 방망이질을 하노라면, 다듬잇돌 위에서 홍두깨는 방
망이를 맞으며 저절로 조금씩 돌아가게 마련인데.
두들겨 맞은 방망이 자리마다 옷감에는 구름 무늬, 물결 무늬, 햇살 무늬, 이
내 무늬, 아른아른 아련한 얼이 어리는 것이다.
맞으면서 제 살결에 피어나는 무늬.
그 무늬를 사람들은 얼이라 하였다.
그것은 색실로 수놓은 매화나 모란, 화조같이 한눈에 도드라져 뜨이는 것 아
니면서, 빛깔도 없이, 속으로 번지는 것 같으나 그윽하고 휘황한 아른거림으로
피어나 추상의 문양을 이룬다.
움직일 때마다 결이 달라져 보는 이를 사로잡는 그 정취.
무심한 피륙이 홍두깨에 감기어 다듬잇돌 위에 얹힌 채, 단단하기 바위도 쪼
갤 만한 방망이를 온몸에 맞으면서, 맞은 자리마다 피멍이 비명을 토하는 대신
저토록 고운 얼을 무늬로 이루는 것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강실이는 그 얼이 비치는 명주 저고리 애달픈 연두와 연분홍 치마를 입고 있
었던 것이다.
그리고 효원은 궁청 바다밑보다 푸른 진남색 비단 치마를 드리운 위에 새각시
눈부신 진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 빛깔이나 모습은 구긴 데 감춘 데 없
이 정대하고 당당하였다.
연치와 항렬 따라 아랫목부터 윗목까지 자리한 부인들이 눕히거나 세운 무릎
의 치마폭 흘러내린 자락 끝에 주름이 물결을 이루는데, 그 밑으로 숨겨진 듯
드러나는 버선발이 희고도 날렵하였다. 현란하고 우아하고 그윽한 온갖 빛깔들
잔치 속에 그 흰 빛은 은장도처럼 단호해 보였다. 그리고 마치 그 은장도로 금
을 그은 것처럼 버선발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는 수눅 바느질 자국은 머리카
락 한 올 빗나가지 않은 가리마 같았다.
"동정 귀 어긋난 년, 버선 수눅 틀어지거나 뒤바뀌게 신은 년, 가리마 비뚤어
진 년, 낭자머리 뒤꼭지에 머리카락 삐친 년."
은 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매안 부인들의 불문율이었다. 부녀자 용모의
미추나, 입은 옷의 비단 무명을 가리어 그 격이 높고 낮은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저고리를 입었으면 마땅히 동정 귀가 그린 듯이 맞물려 맞아
야 하고, 버선을 신었으면 두말할 것 없이 버선 수눅 꿰맨 솔기가 발등 한복판
에 반듯해야 하고, 왼발에 신은 버선 수눅 시접은 왼쪽 바깥으로 누워야 하며
오른발에 신은 버선 수눅 시접은 오른쪽 바깥으로 누워야 하는, 너무나도 기본
적인 이 차림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사람이란, 오직 게으르거나 어려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그런 것을 언제 돌아볼 틈도 없이 마구 범벅으로 살아
야 하는 상것들일 뿐인즉, 축에 끼워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반상을 막론하고 그 동아리에서 벗어난 별난 사람
이 있는지라. 노비 중에도 그 성깔이나 번절이 반가의 효열보다 더 매운 종이
있는가 하면, 양반의 집안에 귀녀로 난 따님도 선머슴 못지않게 건성인 사람 또
한 있어서. 매안으로 시집온 새댁 하나가, 지금은 중년으로 접어들어 그도 벌써
시어머니가 되었지만, 그네가 아직 새각시였을 적에, 시어머님 앞에 무심코 드러
낸 발등 때문에 벼락을 맞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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