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해도 죽인다는 말은 마시오. 부모 말이 문서라는데."
"문서 아니면 저년이 살어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만 알고 나만 알고 감쪽
같이 숨겨질 일이라면 나도 귀신을 꾀어서라도 감추어 보고 싶지마는, 그렇게
될 일이 아니잖은가 말이오. 벌서 우리말고도 진의원이 아는데다, 그 입은 또 어
떻게든지 막어 본다 허드라도 저 배를 어쩔 것인가. 저 배를"
거기까지 말하던 기응이, 다시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가누지 못하고 주먹을 부
르쥐었다. 갑자기 아까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처참한 배신감에 휩사인 그
의 턱이 덜덜 떨린다. 그의 전신을 뒤집으며 어오르는 것이 증오인지. 억울함
인지, 원통함인지, 그는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뒤범벅을 모조리 뒤집어쓰고도 다
른 말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오욕스러움이 기응을 사로잡아 뒤흔들었다.
"저것이 말을 해야 사정을 알지."
"기왕에 저질러진 일인데, 어떻게든 수습을 해 봐야 안허겄소? 아무러면 사람 사
는 세상에 무슨 수가 있어도 있지 죽으란 법만 있을랍디여? 내일 저 애 정신 들
면 차근차근히 물어서 사람 살릴 궁리를 해 봅시다. 부모가 나서서 소문 내는
꼴 짓지 말고,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지요. 까닥 잘못허면 줄초상 날 일이
니. 온 집안 문중에도 다 망신이고."
"똥칠이지."
똥칠, 이라는 말은 기표에게도 선명하게 들렸지만, 두 내외 주고받는 말은 두런
두런도 아닌 낮은 소리에, 은 한숨과 진 눈물이 섞여 있어서 토담 너머 사립
문간 고샅에서에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짐작으로 참괴할 일이 생긴 것
만은 알 수가 있었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평소의 성품대로라면 성큼 마당 안으
로 들어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대뜸 정면으로 물어 볼 일이었으나 그는 애써 참고 발길을 돌린다. 지금
저 두 내외의 하는 양으로 부아 말로 못할 충격이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은 분명
하지만, 야밤중에 시숙이, 울고 있는 제수씨 앞에 내정돌입처럼 들어서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탓이었다. 기응이야 동생이니 무관히 여긴다 하더라도. 내일
불러 물어 보리라. 기표가 수천댁으로 걸음을 떼어 옮길 때, 안서방네는 은밀히
건넌방에 들었다. 뒷마루로 소리 없이 올라와 문고리를 당긴 그네는 아직 잠들
지 않고 있는 효원에게 귓속말로 오류골댁 정황을 일러 전하였다. 효원은 무겁
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신중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안서방네, 오늘 밤에는 잠들지 말고 작은댁 좀 자꾸 내려가 보게. 새벽까지. 절
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되네."
고개를 수그리고 한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알았다는 시늉을 하고는 중마당을
벗어나 중문을 나서고 바깥마당을 벗어나 솟을대문을 나서서, 공연히 하늘 천기
를 살피려는 사람인 양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시 행랑으로 들어오고, 그랬다가
잠시 후에 또 나가 보고, 무슨 발자국 소리 인기척이 고샅에 나지 않는가. 안서
방네는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그야말로 온몸의 터럭을 모두 바늘같이 곧추세운
것이다. 그러면서 칠흑의 밤이 겨우 한 겹 벗기어져 먹빛 속에 검푸른 새벽이내
가 귀기로 돋아날 무렵, 지금 막 일어나서 밥하러 나간다고 하기에도 이른 시각
인데, 대문간에 나와 서서 위이 고샅을 한번 둘러보고, 오류골댁 희미한 사립문
간과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살구나무 검은 가지에 눈을 주던 안서방네는
얼핏 무슨 흰 그림자 같은 것이 눈에 스쳐, 저수지 청호로가는 쪽을 직감으로 바
라보았다. 어슴푸레 희마한 윤곽만을 반공에 드러내며 잠에서 깨지 않은 지붕돠
돌담 토담들이 끝나는 곳에서 휙 돌아가는 모퉁이로, 그 흰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 모퉁이는 저수지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작은아씨. 그러먼 그렇제
내 이러실 중 알었제. 안서방네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손에다 쥐어들고
정신없이 그 그림자를 뒤따라 쫓아갔다. 발걸음이 공중에 떠서 헛디뎌지는데다
후둘후둘 다리가 떨려 모르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잡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 밤을 꼬박이 긴장하여 새운 끝에, 참으로 그런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 염려하고 지키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려 하니. 온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고, 누구 하나 깨워서 데꼬 올 것을. 나 혼자 어쩌꼬. 내가
이렇게 걸음이 늦은디, 나보다 저렇게 앞서 가시다가 아차 물에 빠져 버리먼, 내
가 혼자 어치케 건져야 옳이여? 아 이렇게 따러만 가먼 멋 헐 거이냐. 이런 미
련 곰통이. 헐 수 없제. 인자는. 어서어서 놓치지 말고 따러가는 수배끼. 안서방
네는 숨이 턱에 차서 모퉁이를 잡아 돌고,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내달렸으나, 강
실이는 벌써 물안개 오르는 저수지 제방에 아득히, 사람 아닌 것처럼 희미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부르먼 놀래서 외나 더 일을 빨리 저질르실랑가도 모
릉게로, 하이고, 이놈의 다리, 야, 야, 얼릉 갖, 얼릉 가. 안서방네가 걸음을 땀이
나게 재촉하고 잇는데, 강실이는 허이연 넋이 물가에 안개로 어린 것같이 스러
질 듯 망연히 서서, 멀고 먼 물 언저리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네의 눈앞
에 청호의 저수지 무섭게 고요한 물빛은 수면을 하늘에 두어 하늘을 그대로 되
비치고 있으니. 이 물에 들면 그곳은 하늘이 될 것인가. 강실이는 제방에 선 채
로 물끄러미 희부윰하게 트여오는 노적봉과 벼슬봉 능선 너머 하늘을 바라보다
가, 그 산 능선 그림자 어둡게 잠기어 깨어나는 호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인
월 아짐 이 물 속에 몸을 던지시던 그 순간은 어떠하셨을까. 강실이는 인월댁의
흰 무명 소복을 떠올려 생각하였다. 평생토록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애오라지
기다려 서러운 옷 흰 치마 흰 저고리 입고 사는 아짐. 떳떳하신 아짐. 그분이 이
곳에 몸을 던진 것은 나같이 더럽고 처참한 욕 아니시었으리라. 살아 쓸데없다
하고 목숨이 부질없어 버리려 하셨을 뿐이리라. 허나 나는 살어서는 안되어서
나를 버리려 하니. 내 비록 죽는다 하여도 이 욕이 씻기지는 않을 것이지만, 살
아 당하면 더 큰 욕이어서 나는 지우려 하는 것이라. 청암 할머니, 열아홉에 홀
로 되시서 이 집안 이씨 문중으로 시집오신 후, 그 한세상을 기울려 이루어 놓
으신 저수지. 이 장하고 깊은 물에 나는 나의 쓸모 없는 몸을 던져, 그 맑으신
뜻을 더럽히게 되겠구나. 살아 생전 그토록 강실이를 귀애하시던 청암 부인의
얼굴이 호면에 떠오른다. 정월 초하룻날 세배를 하러 원뜸에 가면 완자살창 은
은한 안방에서 모반에 엿이며 강정 정과들을 담아 내주시던 할머니. 그리고 나
붓이 분홍치마 자락 봉긋하게 부풀리며 세배를 올릴 때, 그다지도 어여뻐하여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거두지 않던 청암부인. 아아, 할머니. 나 죽으라, 미리 알
고 이 깊은 저수지를 파 놓으셨더이까. 강실이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흘러내리게 둔 채로 두 발을 담았던 신을 벗어 한쪽에 나란히 놓은 뒤, 흰 버선
발을 곱게 모으고 섰다. 그리고 두 손을 맞잡아 이마까지 올린다. 누구에게 하는
절일까. 호면에 비친 청암부인, 아니면 이승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니면 저승의
알 수 없는 사자, 아니면 떠올리기 서러운 그 어떤 이름. 그도 아니라면 비록 짧
았으나 그 몸을 빌려 이승에 머물다 가는 자기 자신에게 하직인사로, 또 그도
아니라면 그저 다만 이제 자신의 목숨을 받아 줄 이 푸른 물에게일 것인가. 강
실이는 청호 저수지 푸르고 음산한 물가에서 처연히 누구에겐가 마지막으로 큰
절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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