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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17)

카지모도 2024. 12. 2.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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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건 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거상중에 몽둥이 찜질 같은, 아니할 일 하고

나면,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남의 말도 무서운 것이고, 돌아가신 백모님께 도리

도 아닌즉 체통을 잃지 마십시오."

흉억이 무너지는 이기채를 부축하여 사랑 축대로 오르던 기표는, 펀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 한 가닥에 번쩍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마루에 웅크린 뼈다귀 보자기를 쏘아보았다.

"형님, 이 투장은 저놈의 소행이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다른 놈 짓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산지기 박달이가 대보름날 밤에 제 눈으로 저놈을 산소에서, 산소에

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지 않어? 저놈 주동이로도 거기 다녀오는 길이라 이실

직고했다 허고."

"그래도 아닙니다. 무릇 투장이란, 제 발복하고자 제 부모와 조부모 유골을 남

의 명당 산소에다 몰래 쑤셔넣는 것인데, 춘복이란 놈을 둘러보면 형님도 아시다

시피 천애 고아로 에미 애비는 물론이고 일가 친척 하나 없는 황막 지경 아닙니까."

"애비 없는 자식이 어디 있어? 죽은 애비도 애비지."

"저놈 애비 죽은 것은 몇 십년 전 일이올시다. 투장도 뼈다귀 형체 있을 때 말

이지, 세월이 너무 오래어 버실버실 삭어서 흙 다 되디어 버린 뼈다귀를 삽으로

떠다가 투장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기표는 차마 손댈 염이 나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보자기에 싸인 뭉치를 풀어

누런 흙물 스민 백지를 헤치고 꿰뚫어지게 뼈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고갱이가

썩어 떨어지는 나무 토막들 같았다. 아니면 검붉은 녹이 슨 쇠붙이라고나 할까.

흉악하여 더 보기도 역겹다는 듯 이기채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기표는 그것을 꼼꼼히 날카롭게 살피면서

"나뭇가지를 가져오라."

시켜, 이리 저리 뒤적이며 헤집어 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몇 십 년 묵어 곰삭은 뼈가 아닙니다."

"몇 백 년 지나도록 수의조차 변색 없이 그대로 있는 시신도 있지."

"제 짐작이 틀리지 않을 겝니다. 저놈이 떠돌이로 거멍굴에 들어와 주저앉은

상놈의 자식이라, 그 어린 나이에 애비 무덤 자리를 영념허고 기억해 둘 처지도

아니었고, 상것들 무덤에 비석이 있습니까 표지가 있습니까, 세월 가면 잡초더미

에 맹감 넝쿨이나 우거지지 구분도 어려워서, 찾고자 해도 제 애비 뼈다귀는 찾

을 길 없게 마련이지요."

딴은 그럴 듯도 하여 이기채는 아까보다 심정을 누그리며 물었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자고로 당골네것들이 남의 산소에 투장하는 습관이 있으니, 불문곡직 거멍굴

에 백단이 만동이 푸네기들을 잡아다가 호되게 족치면 무슨 꼬투리가 잡혀도 잡

힐 것이오."

덕석말이했다가 만일에 아니라 할지라도 놓아보내면 그만이고, 짐작대로 거것

들 짓이 분명하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이 다스릴 일이었다.

기표의 말을 따른 이기채의 명으로 아까 춘복이를 잡아 왔던 머슴과 종들이

다시 거멍굴로 비호같아 내닫고, 그 통에 춘복이는 잠시 한쪽에 다 팽개쳐 부둥

크려 놓았다.

오오, 그런 일이 있었그만잉.

솟을대문 문간에 우중거리며 웅기중기 몰려 선 임서방과 어서방, 그리고 매안

의 호제들 틈에 끼어 기웃기웃 안쪽을 넘겨다보며 동정을 살피던 옹구네는, 우

례가 물어다 주는 귓속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부터 귀는 곤두서고 가슴속은 통게통게 두려운 듯, 불안한 듯,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오지게 재미난 사건 무슨 일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옹구네는 조바

심치며 들떠 있었다.

그네는 꼭 강실이 일을 들킨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을 '들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리라. 옹구네가 자진하여 펄렁거리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쥐덫 놓는 것처럼 소문을 놓았으니 누구라도 그 덫에 걸리

기 마련이었으며, 그 중에 가장 큰 덫을 이기채의 솟을대문 안쪽에다 은밀히 놓

았으므로, 결국 율촌샌님 이기채의 칼끝 성품 촉수도 이 소문을 덜컥, 물으려니

하고 있었다.

웅구네 생각은 한 갈래 외곬수가 아니었다. 복잡하였다.

내가 강실이 일 한쪽 귀영텡이 거들어 주고는, 성사되면 큰마느래 노릇 톡톡

히 험서, 이 원통허고 설운 분, 곁다리 아낙의 신세 무안하고 처량했던 것을 모

질게 갚어 주리라.

싶은 생각에 열심히 제 일마냥, 고리배미 비오리한테로 갔다가, 우례한테도 말을

묻히며 딴에는 춘복이 일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들키라고 서두르고 다녔다.

그러니까 동서남북 네 갈래 여덟 갈래 길에다가, 화르르, 부싯돌만 치면 불이 붙

어 삽시간에 타오르게끔 불쏘시개를 만들고 다닌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마음이 다가 아니었다.

야 이 웬수엣놈아.

아무리 문서 없이 오다 가다 만나서 더러운 맹세나마 한 마디 한 일도 없이

산다고는 허지만, 이것도 사능 것은 사능 거인디, 너도 참 낯빤대기 두껍기는 두

껍다. 문서가 없다고 심정도 없겄냐?

그리여. 나는 귀영머리 마주 풀고 찬물 바쳐 육리 갖춘 마느래도 아니고, 양반

의 따님으로 고귀하신 지체도 아니다. 거그다가 나이 에려 꽃 같고 달 같은 청

상에 생과부도 아니제. 너보돔 나이 많은 홀에미, 단물 빠진 늙다리, 자식끄장

딸린 년이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사람 박대를 이렇게 막 대놓고 헌단 말이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랬다는디, 만리장성을 고사허고, 몇몇 밤을 수

천 수백 번 고쳐 자도 돌아누우먼 나무도막 바웃뎅이 한가지로 무심정헌 것은,

나를 깔보는 탓이제. 어차피 아무껏도 아니라 이거이제. 우리는.

그런디 그게 꼭 그렁 거이냐? 내가 아순 년잉게, 정에 아순 년잉게, 내가 너를

붙잡고 늘어징게, 마지못해 몸 내미는 시늉을 험서나도, 싫으먼 아조 말제 왜 마

다고는 안했등고? 강실이 말 내기 전 끄장은.

그러다가 인자 와서, 머, 장개를 가?

아나, 장개. 하이고, 야야. 니가, 핑계야 어찌 되었든 달밤에 양반의 금지옥엽

강실이를 겁탈허고도 살어 남기를 바래? 꿈 같은 소리 허들말어라. 니가 헌 짓

이 밝혀지고도 니가 안 죽으먼 매안 이씨 서슬도 헛거이고, 끝내 이런 일 모르

쐬 넘어간다먼 매안 이씨 양반 자랑도 헛껍데기다. 잉?

옹구네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춘복이가 강실이를 남모르게 꿈꾸고 있을 때나, 그 일을 발설했을 때 치받던

심정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무서운 질투로 옹구네는, 훅, 훅, 불무질하는 속을 화

덕같이 끓이며 열화를 가누지 못하곤 하였다.

"아이, 그렁게 참말로 그 작은아씨를 어쩌기는 어쩠당가? 무단히 시방말로만

그러능 것 아니고? 아무리, 일이 그리 숩겄능게비?"

옹구네가 옆구리를 질러도 보고 눙쳐도 보고 감겨서 물어도 보았지만, 그때마

다 춘복이는 묵묵부답 별 대꾸도 하지 않은채

"여러 말 시기지 마시오."

할 뿐이었다.

"왜, 내 말에 때 타? 오매불망 아까우신 작은 아씨가?"

"씨잘디없는 말을 자꼬 해쌍게 안 그러요?"

"던지러라, 이놈의 신세. 말도 지대로 못허고."

"아 언제 옹구네가 헐말 못허고 살었간디 말끝마동 매달고 꼭 신세타령을 헌

당가요? 딩기 싫게. 나는 내 한 몸 신세도 무건 놈잉게 넘으신세까지는 못 짊어

져요. 알어서 지시오. 이든지 메든지."

오냐, 알었다. 니 속이 그런 지 내 인자 다 알었다.

어금니 사이로 배어 오르는 눈물을 ㅉ쯔레 삼키며, 옹구네는 쫓겨나는 심정으

로 어둠 속에서 긴 눈을 흘겼다.

그리고 겉으로는 강실이와 강모, 춘복이의 일을 싸잡아 멀리 소문내어 부채질

까지 활랑활랑 하면서, 두 사람 일이 꼭 성사되기 바라는 것처럼 일부러 생색내

며 춘복이한테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부디 어서 이 일이 매안에 알려지고, 강실이의 부모 오류골댁 내외

가 알게 되고, 수천샌님 기표가 알게 되고, 드디어는 원의 이기채가 알게 되어,

드르르 문중회의가 열리면서 두 연놈을 잡아다가, 중인환시리 안팎 반상 백일하

에 꿇어 앉히어, 한 년은 갈갈이 찢기는 것이 더 나은 똥칠 망신을 주고, 한 놈

은 머릿박이 쪼개지고 다리몽생이가 분지러지게 뚜드려 맞아 초죽음이 되는 꼴

을 꼭 이 눈으로 보아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아.

옹구네는 혼자 앉아 있다가도 치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아까 춘복이 잡혀 갈 때도 가슴이 덜컥한 중에 은근히 쾌재도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춘복이를 뒤따라 허겁지겁 매안으로 쫓아 올라올 때,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 토담을 지나면서,

흥. 뿌랭이 썩는지 모르고 꽃 좋다제.

하고 비웃었다.

그 토담 안은 인기척 한 낱 없이 괴적하였다.

오류골댁은 위에 큰집 사랑이 소란한 것을 염려할 겨를이 없었다.

반닫이에서 강실이 혼수로 마련해 두었던 비단 명주와 아련한 빛깔 스며나오

는 화장수며 꽃핀, 비취비녀 같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어루만져 보다

가, 고개를 무겁게 흔들며 다시 집어 넣었다가, 또 다시 꺼내어서 보자기에 싸는

오류골댁 손에 눈물이 흥건하였다.

니가 이 길로 집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우리라.

내 새끼야...

전생에 무슨 죄 지은 일 있었던가.

갚을 일 많아서, 이대도록 가슴 미어지는 세상을 어미한테 부리고는, 정처없는

인생에 가는 길도 모르고 헤매일 때, 가시로 저미는 저것 발걸음을 한평생에 어

찌할 것인고.

질부 효원의 말로는 봇짐 메고 다니는 황아장수가 모레 온다고 했었는데, 그

모레가 바로 내일 아닌가.

내일이라니.

기가 막혀 흉중을 가누지 못하는 오류골댁은, 남도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사돈

의 동네 깊은 산속 어드메 이름 모를 절간에다 딸을 버리는 어미의 설움으로 후

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누워 있는 강실이 여윈 손을 감싸쥐었다..

"아가, 에미한테 말 못헐 게 무어 있냐. 기왕에 이리 된 일, 속이나 알게 말 좀

해 봐라. 어찌된 연유인지, 알기나 해야 짐작을 허지."

강실이는 그 간곡한 말에도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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