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번이나 물은 말이었지만 그때마다 강실이는 눈감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에미가 남이냐. 니가 살인 죄인이 되었다 허드라도 나는 에미고, 너는 내 새
끼지, 에미한테도 말 못허는 그 속이 오죽이나 상했으면 사람이 이 지경이 된단
말이냐.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그저 니가 약헌가, 약헌가만 했었
지. 언제부텀 무슨 일이 생겨서 누구허고 어쨌는지, 이 세상에 나라도 알고 있으
면 니가 좀 덜 무섭지 않겄냐. 아가."
오류골댁의 눈물 맺힌 말에, 강실이는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혹시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오류골댁은 숨을 죽이고 강실이
입시울을 더듬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실이는 들이쉰 숨을 여리고 길게 내뿜
을 뿐, 입을 끝내 열지는 않았다.
다만 대답 대신 눈귀에 찐득한 눈물 한 점이 배어 나ㅗ아 흐르지도 못한 채
머물러 번지었다.
누가누가 큰소리를 쳐도 자식 가진 사람만은 큰소리 할 수 없다고, 예점부터
말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것은 나므이 말일 따름이었지 오류골댁 앞에 그
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저것이 웬수지 어찌 자식일꼬."
기응은 온 방안에 담배연기가 진이 박이도록 자욱하게 곰방대를 빨아, 한숨을
거멓게 뱉어내며 말했다.
"강실이란년 저것이 죽을라고 방죽가에 허청허청 갔던 것인지라, 눈 깜빡할 사
이에 또 어떤 일 사참하게 저지를지 알 수도 없으러니와, 수천서방님이 목도를
허셨으니 사단이 다 드러나, 여기서는 어느 구석으로 더 숨을 방도도 없지 않소
잉? 인제 마른 하늘에 날벼락맞을 일만 남었는데, 앉은 방석을 못 돌리고 벼락
을 맞느니, 우선 죽을 구멍 모면이나 해 보게, 대실 질부 말을 한 번 따러 봅시다."
오류골댁은 기응에게 사정조로 말머리를 꺼냈다.
다 똑같이 강실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였지만, 아들도 마찬가지나 특히 딸자식
훈육은 어미의 책임이어서, 오류골댁은 기응의 앞에 죄 지은 옹가슴을 펴지 못
하고 더듬거렸다.
"대실 질부는 사람이 대차고 사리 분별이 남달라, 강실이한테 해로운 일 시키
지는 않을 것이요. 그날도 나는, 혼절헌 종시매를 이부자리에서 걷어 일으켜 집
으로 내려가라 헐 때, 참 야속 무정허기 짝이 없더니만, 부모보다 먼저 속을 짚
은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몰아 집으로 내려가게 해 주어, 그나마 식구끼리만 일
을 당헐 수가 있잖었소?"
"장허구만. 식구끼리만 일을 당해서."
"나는 면목이 없소. 내가 죽어서 일이 괜찮어진다면 골백번이라도 머리를 바우
에 깨뜨려 죽어리다만, 나 죽는다고 불쌍헌 저년이 낫어지는 게 없는 마당에, 어
쨌든 죄 많은 부모에 죄 많은 자식이나 살려 놓고 봅시다. 예?"
오류골댁이 간신 간신히 이어가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기응은, 아무리 생
각해도 기가 막힌지, 허어어, 소리만 내뿜었다.
"비단 지고 댕기는 황아장수, 그 왜, 얼굴 나붓허니 찬찬허게 생긴 아낙. 당신
은 못 보셨는가 모르겄지만 나도 알고 있는 그 황아장수 아낙이 사람 믿을 만허
다 하니, 내 보기에도 빈말 허고 여시짓허는 상호는 아닙니다만, 그 편에 편지
한 장 쓰고 딸려 보내면 질부 친정 사가에서 전후 살펴 주리라 허드마는."
"참말로, 자식 키워서 이런 꼴을 보지 말어야는 것이여."
그것은 연전에, 진예를 그리다가 끝내 못 잊는 상사로, 생떼 같은 강수를 잃었
던 동녘골양반이 자식을 내다 묻으며 한 말이었다.
그 말을 이제 판박은 듯 기응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참, 세상에 어뜬 불출 위인이 자식 농사를 망치는가 했더니만, 넘의 흉보
아서 죄 받는 것인가."
천지에 이런 흉이 있어, 그래.
기웅이 오류골댁 간청에 쓰다 달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 반승낙으로 알고,
그네는 강실이 보낼 준비를 허둥허둥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차분히 물목 차려 준비할 수 있는 일이리요.
실신할 정도로 기진하여 쇠약한 딸자식이, 몸에 뜻밖의 수치스러운 태기를 담
고, 외갓집도 아닌 큰집 오랍의댁 친정길, 낯설고 물 선데다 꺼끄럽고 어렵기 민
어 가시 같은 사돈네 마을 어디 어디를 헤매며 비칠비칠 걸어갈 뒷모습이 가슴
에 밟혀, 오류골댁은, 잘잘못 가리고 따져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오직 가
련하고 불쌍한 '새끼' 한 마리를 그만 부둥켜 끌어안고 통곡을 하고 말았다.
꺽, 꺼억, 목이 치받치는 울음 소리에 큰집 사랑마당 덕석 속에서 비명을 토하
는 춘복이 울음이 핏빛으로 섞여들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큰죄 지은 자를 모질게 덕석말이 할 때는, 그냥 두르
르 사람을 말아서 몰매로 내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황소를 풀어 마구 짓밟게 하
는데, 천하 없는 장사라도 황소한테 밟히면 배가 터지거나, 가슴이 짓뭉개지거
나, 목줄이 눌리어 죽고 말기 쉬웠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는 마주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덕석에 사람을 말아 놓고 황소를 풀면, 황소는 마
당에서 커다란 눈방울을 뒤룩거리며 뒷발굽만 찰 뿐 좀체로 그덕석 가까이에 가
려 하지 않았다.
"소는 영물이라 어질어서, 그 속에 사람 든 걸 아는 것이지."
전에, 남평 이징의는 말했었다.
이징의는 춘복이가 잡혀 와 아까부터 덕석말이 몰매 맞는다는 남평댁의 전갈
에 이맛살을 깊이 찡그리며
"죽은 뼈다귀 때문에 생사람이 죽겠구나. 다 쓰고 죽은 몸, 어디에 묻히면 어
떻고, 좋은 자리 함께 나누어 묻히면 또 어떤고. 모두 부질없는 일, 헛짓들이다.
망상이야. 살아 있는 동안에, 받은 정기 잘 갊아서 손상시키지 않도록 환히 밝혀
태우다가, 그 정신만 원전으로 가지고 가면 그만이지. 생명 정기 다 빠진 빈 몸
뚱이 헛된 물질 뼈다귀 하나에 산사람 인생을 의탁하여, 운명을 개조해 보자는
게 애초에 어리석은 일 아닌가."
혼자말을 하였다.
"설혹 못난 사람이 미련해서 그런 짓 좀 했다기로서니, 꾸짖어서 나무래고 그
만두지 상중에 몰매, 비명이라니. 어어 참, 피비린내 고약하다."
이징의는 그 피비린내가 방안에 진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찌푸린 이마를 더욱
골 파며, 검푸른 쪽물에 붓을 적셔 휘익, 비백의 남죽을 쳤다. 마치 그 푸르다
못해 검은 빛 바다밑 같은 궁청 쪽빛 대나무 한 폭이, 종가에 낭자히 차 오르는
비명, 흉을 몰아내는 부적이기나 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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