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허공의 절벽
이야기는 좀체로 쉽게 끝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문밖 출입이 거의 없는 남
평 이징의까지 근심스러운 걸음으로 올라온 종가댁 큰사랑에는, 중참이 기울 무
렵, 어제 일이 하도 놀라워서도 그렇고, 오래간만에 강호가 왔다는데 얼굴도 볼
겸 바깥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자 문중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절이 흉흉허니 나라에나 집안에나 전고에 없던 일이 연이어 꼬리를 물고,
만징패조가 그치지를 않는구만, 도무지 살아 있다는 것이 욕이 돼서... "
이기채는 그 한 마디를 겨우 깨물어 넘기듯 말하고는 아까부터 시종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어머니를 여읜 것만 해도 원통한데, 치장한 지 몇 날 되지도 않은 어머니의
청청하신 몸 옆에, 말 그대로
"웬 놈의 뼈다구인지도 모를 뼈."
가 나란히 누워 킬킬거리고 있었는데, 자식이란 작자는 그것도 모르고 조석 상
식만 극진히 올리면 천하에 다시없는 효성이나 바치는 양 슬픈 얼굴로 영연 앞
에 서 있었으니.
어리석은 자신의 소행이 참담하여 이기채는 자괴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 더럽혀짐에 이를 갈았다.
"참륙을 해서 목을 삼동으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을 끌어다가 덕석말이를 하여 선지가 낭자하도록 몰매를 쳤지만, 그는 분기가
풀리지 않았다.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덕석에 말리어 살이 터지고 뼈가
쪼개지도록 맞은 것보다 더 갈갈이 몸이 상하여, 도무지 심신을 가누기가 어려
웠다.
사랑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이기채의 안색이 질려 푸르누른 것에 놀라면서도,
누워 쉬라고 말만 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어제의 참황과 강호의 귀향이 깍지를 끼고 맞물리어 일어설 수가 없는 탓이었다.
"아이 , 붙들아. 안직도 모다들 그러고 지시지야? 이얘기허고?"
큰사랑 토방과 댓돌 위에 신발들을 가지런히 챙기며 방안 기척에 흘금흘금 귀
를 기울이는 붙들이를 콩심이가 손짓하여 불러내리더니 귓속말로 묻는다.
"얼릉 안 끝나실 것맹인디?"
"긍게 얼릉이고 나중이고 그것이 중헌 게 아니라 꼭 놓치지 말고 사리반서방
님한테 새아씨 전갈을 말씀 디러야여. 알었제?"
"몰랐제."
"요거이 기양."
몇 번씩이나 사랑 쪽으로 나와 붙들이한테 다짐하는 콩심이를 보고, 붙들이는
일부러 눙을 친다. 집 안팎이 어수선하고 어른들은 침중하지만 열댓 살 이쪽 저
쪽인 두 것들은 아직 철딱서니없는 티를 못 벗었는지라. 이 총중에도 엇대답하
며 놀릴 틈이 나는 것이다.
"너 이따가 붙들이한테 가만히 일러서, 사리반서방님 좀 내가 뵈옵잔다고 여쭈
어라."
아까 효원은 콩심이가 전하는 말을 찬찬히 다 듣고 난 다음, 한참 동안 미간
을 좁히고 있더니, 그렇게 말했었다.
"예에... 근디 어디로 오시라까요잉?"
아무리 소견머리 모자라는 콩심이지만, 시숙뻘 되는 사리반서방님 강호를 효
원의 건넌방으로 들라 할 리는 천만 없고, 율촌댁이 거처하는 큰방으로 오라시
는 것도 아닐 터여서 묻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안채 안마당에 덩그러니 서 계시
게 할 수도 없는 일이요, 헛간이나 뒤안으로 모신다는 것 또한 말이 안되는 소
리 아닌가.
"후원으로 모시고 오너라."
효원은 짤막하게 끊어 말하고 일어섰다.
그런데 큰사랑에서는 해가 넘어가도록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새아씨 효원의 심중을 짐작하는 콩심이는 애가 바터서 자꾸만 붙들이를 불러
세운다. 해가 서산 노적봉에 아직은 싸래기만큼 걸려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지만,
저거싱 눈꼽재기만해지다가 그대로 툭, 떨어져 버리면, 매안 마을은 순식간에 벼
락을 치듯이 어두워져서 금방 밤이 오고 말아, 속이 타는 콩심이가 솔가지 분질
러 군불을 때는 사랑 아궁이에 솥뚜껑을 떠그럭, 떠그럭, 열었다 닫았다 한다.
마치 그것이 무슨 신호이기나 한 것처럼 큰사랑 방문이 덜크덕, 열리더니 이
헌의가 먼저 누마루로 나서고, 뒤미처 강호가 따라 나왔다.
"아이고, 야, 야, 붙들아아."
콩심이가 솥뚜껑 잡은 손을 놓고 숨소리로 붙들이를 불렀다.
물담살이 붙들이는 군불 아궁이의 솥단지마다 물을 부어 놓아야 하니, 물지게
를 지고 지금 막 중마당 쪽으로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니가 어쩌든지 요랑껏 잘 말씀 사롸잉? 동계샌님이 꾸지람 안허시게에. 무
단히."
"하앗따아. 너 인자 나중에 뚜부집으로 시집갈랑갑다이?"
"어디로 가든지 니 물지게 타고 갈랑게 질이나 잘 바 뒤. 가매꾼 노릇 야물게
헐라먼."
"나 원, 선녀가 두름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신부가
물지게 타고 시집을 갔드란 말은 너한테 첨 듣는다."
"두룸박을 타고 올라갔냐? 내레왔제."
"아 첨에는 낼오고 나중에는 올라가고 안 그랬냐아. 낼왔응게 올라갔제. 저 왔
든 디로. 도로 갔어."
"잘 알었는디, 새살떨지 말고 살째기 지키고 섰어 어서. 대문에."
"참 너도. 아 사랑 방문 나서는디 그렇게 쉽디야? 인사허고 또 허고, 누마루끄
장 나섰다가 도로 돌아스고, 댓돌에 , 토방에, 층대에, 한 걸음 내딛다 말고 또
인사허고. 인자 대문에끄장 갈라먼 오밤중 될 거이다. 머 한두번 저껐능게비
네. 점심밥 자시고 방문 나선 발이 새참 끝나고 오드락 아직 대문에 못 닿능
것 암시롱."
"너 까불다가 코 깬다잉?"
"코 깨먼 니가 꼬매 주겄지맹. 니 심바람허다가 그랬응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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