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7권 (46)

카지모도 2025. 1. 9. 05:12
728x90

 

"아니 왜 여기가 있어? 사랑에 올라왔으면 의당 안채로 인사하러 들어올 줄

알고 내내 기다렸는데. 궁금헌 일 많어서. 물을 것도 있었고. 그런데 그냥 그렇

게 핑허니 갔는가 부다, 일본에 가 공부허드니만 신식이 되어 버렸는가, 서운하

게 생각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법인가 그래? 어두운 데서 수숙간에 수군수군."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무슨, 나 들으면 안되는 말을, 둘이서만 꼭 숨겨서 나눌 일 있었는갑지?"

"아닙니다. 제가 그만 앞 뒤 분별을 못했습니다."

"저녁 밥 때가 지나서 오밤중이 되도록까지 사람이 어디로 가서 뵈이들 안허

니 안팎으로 찾을 수 밖에. 너 밥 안 먹냐?"

율촌댁은 효원에게 어서 안으로 썩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핀잔을 하는 대신 돌

려서 말하고 먼저 돌아섰다.

강호가 곤혹스러워하며 내려가는 것을 배웅하고는 큰방으로 들어온 율촌댁은

며느리 효원을 마주앉혀 놓고 드디어 참았던 역정을 터뜨렸다.

"너 하는 일이 요즈막에 도무지 종횡무진 네 멋대로여서 내가 갈피를 잡을 수

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이냐? 내 집 마당 장꽝에서 쓰러져 혼절한 종시매를, 의원

불러 놓은 야밤중에 일으켜 세워 쫓아내지를 않는가, 시조모님 상중에 있는 손

부가 어느 때보다도 몸가짐 근신허고 있어야 할 참에, 날은 저물어 깜깜해지는

데 밝은 대낮 다놔두고 무슨 밀정 갈 일 났다고, 아무리 집안간이라 하지만 남

녀가 유별헌 사이게 후원 둘아 뒷담 아래 옹크리고 서서 밀담을 나누지를 않는가."

율촌댁은 바트게 치미는 숨을 끊는다.

"그러고, 내 참, 입에 올리기도 해괴헌 말이라 헛본 것이지 싶은데, 내 눈으로

봤으니 봤달 수밖에. 둘이서 왜 양손을 부여잡고 놓지를 못했는냐. 입 있으면 말

해 봐라."

"잘못 보셨습니다."

"뭐? 잘못 보아?"

"예."

"아니 너 시에미 눈에다가 명태 껍질을 붙인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아마 쓰러지려 했던가 봅니다. 얼결에 놀란 사리반

서방님이 붙잡아 부축해 준 것이지요."

이 말에 율촌댁이 쓴웃음을 삼키며 목청을 돋운다.

"거 참 변괴가 날 뻔했구나, 네가 몸체가 작으냐아 기혈이 모자라느냐. 앉고

서는 것에 흔들이는 일 한 번도 없어서 장중 태산 같은 네가 어인 일로 느닷없

이 쓰러지려 해? 그것도 내외하여 마땅한 남 앞에서."

효원은 얼른 말을 잇지 못한다.

"그게 무슨 수작이냔 말이다."

(수작이라니 당치 않소. 어머님. 당신의 아드님이 천 리 만 리 머나먼 삭방 북

국에까지 못 잊어 이끌고 간 계집이 있다고 합니다. 같이 살고 있다고 그럽디다.

그 말을 듣고 내 잠시 어지러워 그리하였으나, 내 입으로는 그런 소식 말씀 드

리고 싶지 않습니다.)

"말 안할래?"

"애비 안부 몇 마디 듣다가 좀 과민해졌던 모양이에요."

"무슨 안부길래 네가 쓰러질 지경이 되어?"

율촌댁이 뜻밖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여 날카롭게 묻는다.

"어디가 아프대?"

급박한 효원은 율촌댁 반문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율촌댁은 애가 탄다.

안 그래도 시각이 좀 이슥해지면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에 이기채한테서 강모

의 소식을 소상히 들어 보려고 바작바작 마음을 졸이고 있는 터인데, 어지간한

흉보가 아니고서야 그 담력과 판별이 남다른 효원이 그처럼 말 들을 일 할 리가

없으리라, 싶어서 일부러 더 파고들며 그네는 짐짓 억지 소리를 박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더니만, 너는 남의 남정네 손을 잡고도 할

말이 있단 말이냐?"

그 말을 듣는 순간, 효원은 제가 뒤집어쓰는 억지 소리가 억울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만큼이나 가 있을는지, 제대로 길을 따라 안행사 암자에 무사 도착하

였는지, 알 수 없는 강실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대도 참 가련한 사람이요, 백옥 같은 인생에 모자랄 것 없을 터이언만, 못

만날 사람 만난 죄로 베갯속이 썩도록 울고 울다가, 몹쓸 병 깊어지고, 종당에는

상놈의 아이까지 배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떳떳치 못하고, 부모를 우러러 얼굴

들 수 없으며, 집안 친척 일가붙이 동네사람 오가는 행인한테조차 하소연할 길

꿈에도 없는 그대. 나를 보기 얼마나 민망하였으리.

허나, 그대의 불우가 곧 나의 아들 우리 철재한테도 큰 어둠 될 것이어서, 나

는 그대를 숨기려 했던 것뿐이요. 그대 흉이 가문에 먹칠을 하면, 이 가문의 종

손인 우리 철재, 무슨 낯으로 종손 노릇을 하겠소.

그렇게 죄 많아서 이제는 영영 쫓겨나다시피 뒷모습 보이며, 물 설고 산 설은

객지 타향 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버렸으나, 그대를 그리하도록 만든 사람은 대

륙으로 떠나서 어여쁜 계집과 더불어 아들도 낳고 딸도 낳으며, 그대도 나도 잊

고 살아갈 것인가 보오.

그대는 죄 많은 아이를 배어 황량한 세상의 덤불에 걸리고 찢기며 속병 드는

데, 오유끼는 님 곁에서 몸 부닐고 수발도 받게 생겼소.

가련한 그대.

효원은 웬일인지 자꾸만 강실이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강실이 가진 아이가 춘복이의 아이라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당치 않

았다. 그 아이는 어쩐지 꼭 강모의 아이인 것만 같았다.

(애비가 누구이든지 그대는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효원이 골똘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쏘아보던 율촌댁이

"너 내 말 안 들리느냐?"

재우쳐 묻는다.

"어머님, 자세한 말씀은 사리반서방님께 직접 들어서요. 그게 나으실 것 같그

만요."

"내가 네 그 성질이 마음에 안 들었느니라. 처음부터. 여자란 본디 소견도 깊

어야 하지만 우선 성품이 온화해야 다순 바람 불고 집안에 훈김 도는 법인데.

네가 아무리 옳다기로서니, 성질 꼿꼿한 것만 내세워.지금 네 허는 소행머리를

보면 누구라도 네가 시에미 무시헌다 소리 꼭 헐 것이다. 너ㅎ테는 남편의 일이

지만 나한테도 자식의 일인데 네가 들은 말 있으면 묻지 않아도 곧바로 내게 와

일러 주어야 순서지. 이렇게 사람 애간장 끓게 궁금증만 일으키고는, 허튼 젓 하

고. 뭐? 사리반서방님한테 들으라고?"

율촌댁 눈꼬리에 꼿꼿한 모가 선다.

"그래. 네 말대로 사리반서방님 불러서 물어 보마."

나가거라.

율촌댁은 두 말도 더 보태지 않았다.

그리고는 효원이 대청을 건너가 건넌방 문 닫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율촌댁은

안서방네를 불렀다.

"가서 사리반 새아씨 좀 내가 보잔다고 해."

"지금이요?"

"마땅한 시각에 올라오라고 그래. 할 일 다 해 놓고. 나는 늦어도 관계찮으니."

"예."

안서방네는 앞치마를 벗어서 손에 감아쥐고 단걸음을 놓으며 사리반댁으로 달

아간다. 그네의 발걸음이 빠르면서도 불안하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7권 (45)  (0) 2025.01.08
혼불 7권 (44)  (0) 2025.01.06
혼불 7권 (43)  (0) 2025.01.05
혼불 7권 (42)  (0) 2025.01.03
혼불 7권 (41)  (0) 2025.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