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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13)

카지모도 2025. 2. 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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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심을 지닌 땅

 

(돌이킬 수 없다.)

강모는 오직 그 생각만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몹시 추운 겨울날, 뭉뭉한 황토흙 아랫목 잘 익어서 올라오는 구들냇내 가득히 훈김으

로 들어찬 방안에 앉아 있다가, 벌컥 문 열고 나가면서 준비없이 바깥 바람을 수욱 들이

켤 때. 날카로운 얼음칼 꼬챙이로 폐부를 꿰뚫어 찌르는 것 같던 공기. 그 공기의 비수.

그것은 급습이었다.

그럴 때면 강모는 한동안 더 숨을 들이쉬지 못한 채, 금방 삼킨 비수의 얼음이 저절로

다 녹아 온도 없는 물이 되기까지, 찬 바람에 찔린 가슴을 웅크리곤 하였다.

스르릉 미끄러지다가 덜컹, 서는 기차 칸에 앉은 강모의 심정이 꼭 그 바람칼 느닷없이

삼킨 것처럼 아프고 시리었다. 이것은 뜻밖이었다.

검은 빙괴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던 겨울밤이 새벽빛을 받으면서 한쪽부터 푸릇 퍼릇 얼

음비늘 일으키는 시각.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 강태와 함께 전주역 구내를 빠져

나갈 때만 해도 강모는, 역사의 천장에 오색으로 단청을 물린 사방연속 꽃무늬를 유정하

게 바라보며, 다시는 못 올 곳을 버리고 떠나가는 남자의 비장함과 연민을 휘감듯이 느꼈

으나, 개찰구에서 문득 뒤돌아본 골기와 문묘 같은 정거장 건물의 검은 지붕과 붉은 두리

기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모는 흉증을 치는 회오리에 우욱, 울음이 치밀었다.

더운 울음이었다.

그런 줄을 몰랐었는데, 전주역은 강모에게 매안의 정거장이나 마찬가지로 근원정서의

출입문, 지울 길 없는 시간의 자자 바늘이 먹점 묻히며 드나든 대문이었던가.

아니면 어머니.

언제 누가 지었는지, 단청 물린 주칠 기둥에 아롱아롱 휘황한 천장무늬가 흡사 어느 궁

궐이나 사찰 같은 느낌을 주는 전주역의 고풍 창연한 역사는 장엄하리만큼 육중한 골기와

지붕 때문에 더더욱 웅장해 보였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고 어디선가 돌아오는 보따리와 가방을 이고 지고 든 나그네들의

바람 섞인 경박성을, 지그시 재워 누르는 품성이 전주역 정거장에는 깊이 배어 있었다.

떠나거든 돌아오너라.

골기와 정거장은 그렇게 소리 없이, 개찰구를 빠져 나가는 뭇아들의 뒷등에 묻어, 낮은

소리로 스며들며 말했던 것일까.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발길이 머뭇머뭇 남루하게 고향의 문간에서 주춤거릴 때나, 분망

한 원로에 보란 듯이 일하고 올 때나, 정거장은 이만큼 마중나온 어머니처럼 낡아서 깊은

품을 벌리어

어서 오라.

안으며 맞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전주역이 유독 이처럼 사람을 품어 들이는 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철도와 기차라는 신식 개화물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당연하게 자신의 자

리를 잡은 조선식 건축물, 전주역.

마한에서부터 백제 넘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연한 빛을 자랑해 오던 고래의 고도여서

그러했을까.

어떻게 이곳 사람들은 저 쇳덩어리 시커먼 물체가 들고나는 철로와, 팔도의 모산지배처

럼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고 모여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합집산 마당에, 이와 같은 한옥을

천연스럽게 지어 앉힐 수가 있었는지. 정거장은 전주와 시람들과 기차와 하도 알맞게 어

울리어, 강모는 그 광장에 들어설 때마다 서러운 부랑이 위무를 받는, 흡습을 느끼곤 하

였다. 그것은 눅눅한 듯 쓸쓸하고 의연한 의무였다.

강모가 이 전주역 역사를 맨 처음 본 것은 전주고보에 시험을 치르러 가던 해, 겨울끝

이었다.

그때, 싸르락, 낯선 공기가 끼치는 객향의 첫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전주역의 지붕이었

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한쪽에 희끗희끗 잔설이 남아 막 저무는

석양을 비스듬히 받고 있던 기와지붕과, 아, 추녀.

집에서도 얼마든지 보았던 처마와 요마루, 그리고 호성암과 범련사 눈에 익은 단청, 붉

은 칠 훤칠한 두리기둥 들이 그의 뇌리를 두드렸다. 마치 저녁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퉁기

어 딩, 둥, 두둥, 울리는 소리처럼.

그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외지에 나갔었다.

그것도 자신의 관향이며, 이씨 조선 오백 년을 낳은 태조 이성계의 아득한 곳으로부터,

몇 백 년 뒤 후손인 이태조의 사대조인 목조 안사에 다다르기까지, 십팔 대를 두고 면면

히 선조 대대로 부성의 이름난 토호로서 전주 인근을 누르며 살아왔던, 임금의 선영 요람

지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여나믄 살 어린 소년 마음에도 조상의 땅을 찾아가는 감회가 자

못 남달랐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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