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산악이 무너지는 듯한 함성을 지르며, 두 눈을 부릅뜬 후백제 군사들이 도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황홀했던 요지경의 포석정은 삽시간에 피를 뿜는 아수라의 도륙장으로 변하였다. 견훤
군의 창검에 쓰러지는 비명 소리는 서라벌에 가득했다. 왕은 질겁을 하여 왕비와 후궁들
을 거느리고 성남의 이궁으로 도망갔으며, 시종들도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능욕하고, 재물과 보화를 약탈하였다.
이때, 견훤은 이궁에 숨어 있던 왕을 찾아내, 그 자리에서 자살케 하고, 왕비를 욕보인
즉, 도성은 순식간에 통곡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이에 견훤은 왕의 족제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분이 곧 서라벌 천 년의 사직을
마지막으로 지키던 오십육 대 경순왕이다.
견훤은, 백제 의자왕과 그 유민들의 설분을 해 준 셈이 되었다.
싸움에 이긴 견훤은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사로잡고, 오만가지 기술을 가진
공인들을 징발하여, 남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묶어서 열지어, 많은 보화 보물들을 바리
바리 싣고, 신라 왕도를 떠나 하늘을 찌르는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의 귀로에 올랐다.
때는 음 십일월, 동짓달 한겨울이었다.
견훤군이 대구 동쪽에 이르렀을 때, 뒤늦게 구원차 다다른 고려 태조 왕건의 정예부대
오천과 맞닥뜨려 피를 튀기는 한바탕 격전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경주 함락으로 사기
가 충천한 견훤의 날래고 용맹스러운 부대에 왕건 군사가 대적할 수는 없었다.
고려군은 풍비박산이 되도록 크게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려의 장군 신숭겸과 김락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왕건도 겨우 몸만 건져서 빠져 나와 탈출하였으나, 여기서 받은 타격으로 당분
간 재기의 힘을 얻지 못했었다.
견훤은 여세를 몰아 북으로 진격, 승승장구 무인지경을 치닫듯 천안을 공격하여 빼앗
고, 다음해에는 남방으로 군을 돌려 강주를 점령한 뒤, 또 이듬해에는 의성을 공격하여
이겼다. 그리고는 안동 병산으로 나와, 왕건 태조군과 격렬하게 부딪쳐 싸우다가 물경 팔
천 명의 아까운 군사를 잃었으나, 불굴의 견훤은 그 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 다시 이
겼다.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백성을 사로잡아 전주로 돌아오니, 서러운 세월, 이룰 수 없는
꿈을 잊지 못하던 부성 주민들의 환호성은 하늘을 뒤덮었다.
견훤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끌고 온 백공들을 시켜 전주에 왕업의 터를 닦으려
궁궐을 짓고, 견고한 성첩을 쌓았다.
완산부 도성을 토대로 한 백제 재건의 벅차고도 흥대한 꿈은, 난공불락, 도읍터를 다지
는 함성으로 가슴을 울렸으며, 토성을 곁들이어 쌓는 고덕, 동고, 남고 산성들이 산 몰랭
이에 까마득히 치솟아 오를수록 드높아졌다.
아아, 백제가 다시 일어선다.
그러나 이러한 웅도는, 당대 사십여 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하늘이 그의 왕업을 자손 만대에까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백제를
다시 찾아 일으키겠다는 꿈은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남을 정복하여 무력으로 천
하를 다스리는 패업을 성취하려 나선 왕자로서, 그는 인화 포용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
면 그는 혹 앞을 내다보는 통찰의 눈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교묘한 역사의 계
략에 빠져 지금까지도 모함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서전에서는 싸울 때마다 파죽지세로 왕건의 군사를 패주시키고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경순왕 8년, 고려 태조가 운주 홍성에 주둔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선발하여 공격했다
가, 고려 장군 금필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매, 견훤은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금필은 후
백제 군사의 머리 삼천여 개를 버히었다.
웅진 이북의 삼십여 성이 이에 대한 뜬소문만 듣고도 크게 놀라 왕건에게 항복해 버리
니, 견훤의 부하장수들조차 투항하는지라.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역전되어 힘들어
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훤이 결정적으로 몰락한 계기는 집안의 분란이었다.
왕가의 내분.
성품이 용맹할 뿐만 아니라 호탕했던 견훤은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리어, 배다른 자식
들 십여 명 아들을 두었는데.
이것이 재난의 씨가 되었다.
부왕을 도와 왕업을 일으키던 그의 용감한 아들들 중에 금강을 견훤은 가장 사랑하였
다. 키가 아홉 척이나 되었으며 지모가 놀라운 금강이 만일 장자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인가.
불행히도 그는 넷째였다.
첫째 아들 신검과 둘째 아들 용검, 그리고 셋째 아들 양검을 다 제치고, 넷째 아들 금
강에게 장차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견훤의 뜻에 반발한 세 왕자들은, 몹시 불안한 가운
데 질투와 시기로 속을 태웠다.
신라 경순왕 9년 삼월.
이찬 벼슬을 하고 있던 능환이 강주 도독 양검과 무주 도독 용검을 끼고 한 음모를 꾸
미었으니. 큰아들 신검으로 하여 금 침전에 든 부왕 견훤을 붙들어다가 금산불우, 곧 김
제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리게 한 다음, 아우 금강을 베어 죽이고 왕위에 오르라 부추겼
다.
참으로, 왕권이란 무엇이길래 이를 따른 신검은, 스스로 난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자기를 대왕이라 칭하며 보좌에 올랐다.
그때 동요 한 수가 항간에 유행되었나니
가련완산아
실부비련주
가엾도다 완산의 아들
아비 잃고 눈물 흘리네
무심한 아이들은 무엇을 미리 알고 그와 같은 노래를 불렀으리.
하늘이 징조를 누설하지 않았고서야.
허망한 일이로다. 일장춘몽이라더니 견훤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하루 핀 무궁화의 영
화. 남아의 한세상을 걸고 풍운 속에서 전복을 벗을 날 없었으나, 말년에 이르러 털 빠진
사자가 된 채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견훤.
그는 석 달 동안을 함정에 빠진 늙은 맹수처럼 성난 울음 소리 뒤흔들어 커다랗게 으르
렁거리면서 외떨어진 금산사 절에 갇혀 있다가.
음 유월 폭염에 독한 술을 빚어, 수금된 견훤을 지키고 있던 병졸들 삼십여 명한테 모
두 다 취해 떨어지도록 먹이고는, 막내아들 능예와 딸 쇠복, 그리고 애첩 고비만을 데리
고, 가까스로 유폐지를 빠져 나와 금성(나주)으로 달아났다.
싸움터가 모자라게 평생토록 종횡무진 거침없이 내닫던 천하의 용장 불세출의 무적 영
웅이, 남도 아닌 제 자식을 피하여 적진으로 도망하는, 어이없는 비운이여.
이와 같은 일이 어찌 개인의 운수리오. 차라리 국운이었으리라.
나주에 이른 견훤은 사람을 보내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유금필과 만세로 하여금 뱃길까지 나아가 정중히
맞아들이게 하였다.
왕건은 견훤이 도착하자 예의로써 후하게 대접하고, 나이가 자기보다 십 년이나 연장이
므로 견훤을 상부라고 문무백관 위에 높여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를 송악(개경)의 남궁
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면서 극진히 섬기는 한편, 양주 땅을 그의 식읍으로 내려 주고 노
비 사십 구와 말 아홉 필 등을 하사하였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온 하늘을 얻고자,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천하를 걸고서 일진일퇴 징
패전을 벌이던 방패와 창이, 오늘은 이와 같이 마주 앉은 것이다...
이때 견훤의 사위, 장군 박영규는 그 아내인 공주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대왕이, 지난 사십여 년 간 애써서 이룩했던 공업을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이 일으킨 화
로 잃어버리고, 실지하여, 고려에 항복하게 되고 말았소. 대저 정절 높은 여인이 두 지아
비를 섬길 수 없고, 충신은 두 임금을 받들 수 없는지라. 만약에 우리가 자기 임금을 버
리고서, 아비를 죽이고자 반역한 아들을 받든다면, 어찌 얼굴을 들어 천하의 의로운 이를
대할 것인가. 그러나 마침,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너그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인심
을 얻고 있다 하니, 이는 아마도 하늘의 계시인가 하오. 그는 장차 반드시 삼한의 통일주
가 될 것이니, 글을 보내어 우리 임금을 안위하고, 겸하여 왕공에게 은근한 뜻을 보여서
장래의 복을 꾀하지 않으려오?
그의 아내는 대답하였다.
이에 천복 원년, 곧 고려 태조 19년 이월에 영규는 사람을 고려에 보내어 태조에게 의
사를 전하였다.
만일 왕께서 의로운 깃발을 들어 후백제를 치신다면, 기꺼이 내응하여 왕사를 돕겠나이
다.
태조는 기쁜 빛이 가득하여, 심부름 온 사람한테 선물을 후히 주어 돌려 보내며, 영규
에게 사례하여 말했다.
만일 은혜를 입어 우리가 하나로 합치고, 가는 길에 막힘이 없다면 먼저 장군을 찾아뵌
후, 당상에 올라가 부인께 절하고 공을 형으로 섬기며 부인을 누님으로 높이겠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끝까지 변함없이 지키며, 꼭 헌신적으로 보답할 것을 천지 신명에게 맹세하
겠습니다.
또 그해 유월에 와서, 견훤도 태조 왕건 앞에 진언했다.
오늘날 늙은 이 몸이 전하께 몸을 의탁해 온 까닭은, 전하의 위세에 의지하여 역적 자
식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요.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을 내어, 그 반란을 일으킨 적들을
토멸케 해 주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왕건은 때가 온 것을 간파하였다.
내가 토멸의 뜻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를 기다린 것뿐이오.
드디어, 태조는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에게 보병과 기병 십만의 대군을 주어 천안
부에 이르게 한 다음, 구월에 삼군을 호령하여 몸소 이끌고 천안까지 나아가, 선발 부대
와 합세해서 질풍같이 진격하여 신검을 치니.
그때 일선 선산에 있던 신검은 왕건의 군세에 그만 놀라 달아나다가, 선산 동쪽 일리천
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필사적인 결전을 벌이었으나. 세궁역진, 기세가 꺾이고 힘이 다하
여 가까스로 머리터럭만 건지어 달아났다.
이때 견훤은 태조와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이 모습을 관병하였다...
황산타령 연산에 이르러 신검이 군사들을 살펴보매, 살아 남아 따라온 자들은 겨우 양
검, 용검 두 아우와 장군 부달, 소달, 그리고 능환 등 불과 사십여 명의 무리들뿐이었다.
마성 땅에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기진맥진 도망하던 신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
무 관료 잔병 사십여 명과 함께 왕건에게 몸을 던져 부복하며, 그만 항복해 버리고 말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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