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점 일 획도 감히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고려 태조 왕건의 이 훈요십조 제8항을 그대
로 옮기면 이러하다. 제군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 보기 바란다.
차현 땅, 즉 공주 차령산맥 이남의 땅 및 공주강(금강) 이남의 산형과 지세를 놓고 볼
때, (금강 유역이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여) 풍수학상으로 이것들은 모두 본주를 향해서
배역의 추세를 띠고 있다. 이러한 시방풍상 동, 서, 남, 북, 상, 하, 좌, 우, 하늘과 땅
의 지형 경치 생김새는 곧 그곳 사람들 마음이 반역의 뜻을 품었다는 징조니라.
그럴진대, 이 아랫녘 지방의 무리들인 관사노비 진역잡척, 즉 천한 백성의 후손들이 발
탁되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사돈을 맺어 국정을 잡는 날이 오게 된다
면, 반드시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가) 고려에 병탄당한 원한을 깊이 품고 백
제 유민을 꼬드겨서, 군왕이 출입하는 길을 침범하여 그 어떤 참해를 끼칠는지 감히 아무
도 모를 일이다. 또는 그들이 임금과 재상들에게 아첨하여, 간교한 말솜씨로 이익을 챙기
고 권력을 독차지하면, 정사를 어지럽힐 일들이 생길 것이다.
이들이 만일에 중용되어 농권난정, 제 분수에 맞지 않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남용
하거나, 정도에서 벗어난 어지러운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나라에 재변이 닥철 터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이곳 사람들은 결코 등용길을 열어 벼슬자리를 주지 말고, 각별
히 조심하라.
어떠한가.
이를 가히 군왕의 어질고 너그러운 대덕이라 할 말한가? 아니면 용렬하게 편협된 경계
심과 증오의 극치라 하겠는가.
이 글에는 소위 군왕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위선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옛글에 일찍이, 군왕은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을 태산과 같이 무겁게 하라고 하
였다. 왜냐하면 만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임금으로서 생살 여탈권을 쥐고 있는 막중
한 지존이, 아무 생각 없이 잠깐 미소 띄운 것을 보고, 신하들은 저마다 구구히 해석하여
아첨하거나, 뜻밖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그저 뜻 없이 문득 얼굴을 찌푸렸을
뿐인데도 모시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중신들은 그것으로 저마다 시시비비를 하다가,
급기야는 걷잡을 수 없이 억측이 번져 생각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뜻 없는 표정 하나에도 이처럼 전전긍긍, 일회일비, 우주가 움직일 지경으로 주변이
흔들리는데, 하물며 태조 대왕의 훈요십조 제8항 같은 말씀이랴.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문서로 박아서 쇠철에다 새긴들 이보다 더 강력하리오. 이것은 그대로, 고려 왕조가 계속
되는 한 철칙으로 뿌리박혀 여조 오백 년씩 요지부동 하였다. 나아가 그것은 민족의 잠재
정서가 되었다.
그러니 죄 없이 호남땅 전라도에 난 백성은, 대대손손 죄가 많아 전라도를 멍에로 지
고, 이 편협한 차별 박대를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받아야만 하였다.
오로지 백제의 옛땅이었던 탓에, 융창했던 백제가 멸망했던 탓에, 그 백제를 못 잊어
백제를 잃고도 몇 백 년씩 백제 사람 마음으로 살았던 탓에, 백제가 피먹지게 그리워서
끝내는 후백제 이름을 걸었던 탓에, 당해야만 하는 보복.
아아, 한 나라가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로잡으면, 이와 같은 사모와 사무침을 남길 수
있으리야.
신라가 되고도, 고려가 되고도, 백제는 살아서 백제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 회복 꿈이 되었던, 후백제의 서울 전주, 완산, 신라 경덕왕
때 전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끝끝내 이들의 옛이름 완산을 고집하는 땅.
반만 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단 반 세기, 오십 년이 채 못되는 몇 세월, 한 점 꽃잎처
럼 잠시 떴다가 진 수도였지만, 이같이 서럽고 아름다운 도읍은 고금에 다시 없으리.
그래서 고려 태조 왕건은 이 땅을 증오하였다.
그가 일생에 가장 꺼렸던 곳이 바로 전주, 완산이었다.
이는 완산이 바로 이가 갈리는 후백제의 오아도로서, 견훤의 거점이었고, 지난날 견훤
과 칼끝을 맞대고 싸울 적에, 왕건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많이 남긴 곳이었으며,
언제나 강박관념의 초점으로 불씨를 이글이글 안고 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후백제와 서른여섯 해 동안 겨루면서 참담하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었고,
그때마다 아까운 명장들과 수많은 군사를 헤아릴 수 없이 잃었으므로, 후백제인에 대한
공포심과 불신감이 대단했었다.
그러니 도무지 이 고장은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고려 창건 때부터 완산은 요주의, 위험한 곳이라 하여, 조정에서는 차가운 눈을 뜨고
감시의 고삐를 잠시도 늦추지 않았다.
예를 들면, 고려 현종 3년에 거란의 사십만 대군이 침략해 왔을 때, 오죽하면 도성 송
악까지 다 내주고 황급히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공주를 거쳐 전주, 완산부
성 문턱인 삼례역에 보도시 당도하여, 막 부성에다가 왕의 숙소를 차리려고 준비하는데
태조 훈요 제8조를 잊으셨나이까. 완산은 성조역악지라, 태조께서도 악독한 당으로 여
기어 피하신 곳이매 어가 머무심히 당치않은 곳입니다.
하는 박진의 상언을 받아들여, 즉시 하던 일을 중지하고 바로 곧장 장골역으로 행차하였
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비단 현종과 박진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려의 열성조를 통하
여 조정 안 상하간의 통념으로 절어 있었다.
임금과 재상의 행신이 이러할진대, 바람이 불면 나뭇잎 떨어지듯이, 위를 따라 이 생각
은 온 백성들의 생활 속으로 켜켜이 박혀들 수밖에 없었다.
완산부성을 놓고 풍수사와 지상가들이 말하기를, 행주형이라 한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
들과 재물을 한 배 가득 싣고서, 순풍에 돛을 달아 항로에 오른 배를 지그시 잡아매어 둔
형상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여 나무랄 데 없는 지형을 구비한 산수형국이니, 그야말로 백
대천손 길이 길이 만세를 살아가기에 참으로 알맞고 넉넉한 곳이란 얘기지.
이러한 땅에 풍광도 수려하고, 물산도 풍부하며,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과 물물의 왕래
가 빈번하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이 되는 전주 완산이, 그 어떤 면에서, 행정적으로나 정
치적으로나 조정으로부터 괄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그런 끔찍한 백안 외면을 당했
던 것이다.
그것은 꽃심을 가진 죄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의 꽃심을 지닌 땅.
그 꿈은 지배자에게, 근이 깊은 목의 가시와도 같아서, 기어이 뽑아 내버리고자 박해,
냉대, 소외의 갖은 방법을 다하게 했다.
이 억울한 땅 전주가 여러 백 년 견디다 못해, 앙금도 씨앗이 되는가, 이제 드디어, 뭉
친 세월의 고갱이가 익어서 왕재를 배태하였으니. 비로소 설분, 해원하였다 할까.
전주는 결국 왕을 낳았다.
왕의 관향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개창하여 새 나라를 세우자, 조정에서는 이 땅 전주를 왕가
의 발상지로 여기어 거룩히 섬기고, 주를 높여 부로 삼았다. 그뿐 아니라 왕가의 자제를
뽑아 전주로 보내서 숙위에 들도록 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예전에 고려 신종 때 전주사록 겸 장서기로 도임했던 이규보는 전주에 대하여 못마땅히
여기고 이렇게 말했다.
전주는 곧 완산이라고 부르는데, 옛 백제국이다. 인물은 번호하고, 가옥들은 즐비하여
고국지풍이 있다. 따라서 백성은 검소하지를 못하고, 모두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니,
그 거동이 가관이다. 그리고 완산이라 이름은, 근교의 작은 산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데 어
찌해서 고을의 이름이 되었는지 이상하다.
그는 고려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서거정은 공북루기에서
아조선근본지지(우리 조선의 근본이 되는 땅). 라 전주를 각별히 상서로운 곳으로 높여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아조종풍패지지, 이남국인재지연수야.
라 하여
전주는 이씨 조선의 발상지이며, 호남지방 인재의 못자리라.
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오백 년간, 전주는 왕조로부터 극진한 공경을 받았다. 왕의 조상
뼈가 묻힌 거룩하고도 신성한 땅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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