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70년대식 친구들과 21세기 술마시기 (1,4,3,3)

카지모도 2021. 1. 1. 04:24
728x90

 

-잡설-

 

<70년대식 친구들과 21세기 술마시기>

 

***동우***

2010.03.21

 

2010년 3월 19일 지난 금요일 밤.

모처럼 오래 묵은 친구들과 어울려, 모처럼 오래 묵은 대취(大醉)가 찾아 왔다.

1970년대식 친구들.

봄 밤.

중국요리 안주하여 홍경천주라는 중국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들러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고, 어울려 2차를 마시고, 어떻게 헤어져 어떻게 돌아왔는지 필름이 끊겨 버렸다.

박상곤, 조낙영, 왕성규, 김황근 그리고 나.

1970년대초.

그 무렵 우리 다섯은 참 많이도 어울려 많이도 마셔 댔었다.

자갈치의 선창, 옛 시청앞 어름에 있었던 김황근의 아트리에, 서면의 막걸리집 이층, 남포동의 마산집 양산집, 당감동 시장통, 영도의 동그랑땡집, 그리고 서울 명동의 오비스캐빈, 신설동 골목 막걸리집.

때로 조만도씨도 어울렸는데, 울산대학 교수로 있다가 젊은 나이에 이미 세상을 떠버렸다.

중구난방 뿜어대는 예술론과 어줍잖은 사변들은 참 유치했을 터이지만 70년대식 입맛에는 그런대로 훌륭한 안주감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이랄까 이념같은 것이 젊은놈들 의식 속으로 틈입하기에 시대는 너무나 편협하게 삼엄하였지만, 독재개발이 외치는 잘 살아보세의 구호 따위는 이른바 딜레당뜨적 데까당에게는 기분학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삐딱하여 못마땅하였고.

자유는 자유를 손질해 자유를 불렀지만 그것은 필경 착각의 자유.

사랑은 짐짓 말랑말랑하여 공연히 쑥스러워 짓는 위악적인 몸짓.

차라리 홍등가의 붉은 빛 아크릴 간판이 진리인양 정다움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짠! 하고 나타나는 기병대는 없었고, 우리의 청춘은 대체로 열등감이었고 혼돈이었다.

우리 곁에 도회적인 선율(旋律), 김승옥의 언어가 있었지만 그것은 안개와 같은 궁핍한 꿈이었다.

두루 우리는 세상과는 수월하게 소통되지 아니 하였다.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데모가? 데모를?” -김승옥의 소설, 1964년 겨울->

이 세리프를 곧잘 읊었지만, 늙어 회상하니 사실 우리는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익명의 기호였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우리끼리 익명의 사랑이었을는지 모르겠다.

40여년의 세월 지나 늙은 마음들에 그 사랑, 어떤 사무침 있으런가.

그렇게 우리는 한시절 살아내면서, 이렇게들 늙어간 것이다.

 

박상곤.

‘움직이는 관’이라는 70년대식 시나리오(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아류냄새 물씬한)를 썼었고, 16mm영화를 만들었었다.

그다운 품성처럼 담백한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데, 지금도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에 달려드는 열정이 있기는 하지만 작금의 상곤이, 양산 모처에 유럽의 무슨 성(城)과 같은 모텔을 지어놓고 21세기 일종의 섹스산업에 기여하며 돈을 벌고 있다.

지아비보다 호탕한 아내의 손길에 좀 잡혀있는 편.

왕성규가 서울서 내려와 며칠 농땡이 쳤는지 엊그제는 함께 하지 못하였다.

 

조낙영.

나에 버금가는 술꾼의 풍모.

그러나 나보다는 대륙적, 선비적인 모습 약여한 그의 술마시기에 나의 술마시기는 때로 주눅이 들기도 한다.

서라벌예대 문창과.

소설을 썼지만 문단에 이름께나 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2010년도에도 시큼한 바 없지 아니하다.

<"앵굽이치는 파도./ 북양으로 가자, 북양으로 가자. / 손님, 이 배는 몰락자만을 태웁니다.">

낙영이도 이제 외손녀를 갖고 있는 할애비다.

 

왕성규.

인천(부평)서 내려와 엊그제 함께 어울린 것이다.

오래 전 충무로판을 떠났지만 70년대 김수용(金洙容)감독의 조감독.

그 옛날 보들레르의 아포리즘에 밑글을 달아 서로 돌려보기를 하였었는데, 큰 키에 반듯한 용모로 가끔 당디의 폼을 잡기도 하지만 나는 그가 용호동 촌놈 밑천임을 훤히 꿰뚫어 알고 있지러.

같은 영문과 미인을 꿰차 아내를 삼았는데, 엊그제 내 손녀 자랑에 보여준 카메라 속 성규의 딸내미(어릴적 보았었지만)는 눈 번쩍 뜨이게 하는, 엄마를 닮은 굉장한 미인이 되어 있었다.

 

김황근.

동양화가인데. 모모한 사건으로 고등학교 미술선생에서 짤리고, 십여년전 중풍을 맞고부터 붓과는 멀어졌다.

내게 몇점의 황근이 그림들이 있는데, 내 어줍잖은 그림보는 안목에도 그닥 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10여년전 어느날 홀로 집에 있다가, 갑자기 엄습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다가, 우연히 들른 상곤이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아직도 말씨가 어눌하고 행동거지가 어정쩡하다.

그래도 한사코 친구들 모이면 술자리 함께 하려 하지만 예전 불같은 성격도 그림에 대한 열정도 확연히 옴츠려 들고, 점점 기력이 쇠하여 지는듯 하여 친구들은 그것이 안타깝다.

 

상곤 낙영 성규 황근아.

오래들 살라.

21세기, 좋은 세상 아닌가.

늬들도 이제 슬슬 인터넷이라는 것도 익혀 보려무나.

 

20세기 우리가 익명의 고독이었다면, 21세기 늙마의 소통은 기적처럼 내게 찬란하다.

<70년대식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 그 어름에 전화로 2000년대식 친구들(연령대를 말하는게 아니라 나와의 교유(交遊)의 연조(年條)가 그렇다는 말이다)의 목소리를 돌려가며 들었다.

서울서 모임 중인 책부족 사람들.

미국서 귀국한 서민정님. 제주 후니마미님. 부군되시는 조교수님. 서울의 호호야님. 굿바이님. 차좋아님. 향편님. 청주의 도치님. 외과의 민욱아빠님. 남아공에서 잠시 나오신 심샛별님...>

 

70년대 묵은 벗들아.

오래들 살자.

좌우당간.

오래들 살자꾸나.

 

-길상에서 가져 온 글-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내고 싶다

-최윤화-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은 얼마일까.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 내련다.

 

소싯적 오색 빛 꿈이 세월이 흘러

의지와 무관한 방향으로

풀어져 가는 실타래일 지언정

 

낯선 길을 걸으며 때로는 암운이 되고

때로는 방황이 되어

질곡의 세월을 만들 지언정

 

바라며 살아가는 삶보다는

나만의 선율을 연주하듯

자신의 내면에서 하염없이

퍼 올리며 살아 가련다.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