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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1)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6.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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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濁流)

 

채만식

 

 

1 인간기념물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한강(漢江)이나 영산강(榮山江)도 그렇기는 하지만--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 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이 제주도(濟州島)를 건너보고 뜀을 뛸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蘆嶺〕와 지리산(智異山)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長水)로 진안(鎭安)으로 무주(茂朱)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永同) 근처에서는 다시 추풍령(秋風嶺)과 속리산(俗離山)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西北)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좌우도(忠淸左右道)의 접경을 흘러간다.

그리고 북쪽 줄기는, 좀 단순해서, 차령산맥(車嶺山脈)이 꼬리를 감추려고 하는 경기(京畿) 충청(忠淸)의 접경 진천(鎭川) 근처에서 청주(淸州)를 바라보고 가느다랗게 흘러내려오다가 조치원(鳥致院)을 지나면 거기서 비로소 오래 두고 서로 찾던 남쪽 줄기와 마주 만난다.

이렇게 어렵사리 서로 만나 한데 합수진 한 줄기 물은 게서부터 고개를 서남으로 돌려 공주(公州)를 끼고 계룡산(鷄龍山)을 바라보면서 우줄거리고 부여(扶餘)로…… 부여를 한 바퀴 휘돌려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메〔論山〕, 강경이〔江景〕까지 들이닫는다.

여기까지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熊津〕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百濟)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빗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潮水)까지 섭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하기야 가끔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그러나 항구라서 하룻밤 맺은 정을 떼치고 간다는 마도로스의 정담이나, 정든 사람을 태우고 멀리 떠나는 배 꽁무니에 물결만 남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갈매기로 더불어 운다는 여인네의 그런 슬퍼도 달코롬한 이야기는 못 된다.

벗어붙이고 농사면 농사, 노동이면 노동을 해먹고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이 득하기

는 일반이로되,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도 또 달라 ‘명일(明日)’이 없는 사람들…… 이런 람들은

어디고 수두룩해서 이곳에도 많이 있다.

정주사(丁主事)도 갈 데 없이 그런 사람이다.

정주사는 시방 미두장(米豆場 : 米穀取引所, 期米市場) 앞 큰길 한복판에서, 다 같은 하바꾼(절치기꾼)’이로되 나이 배젊은 애송이한테, 멱살을 당시랗게 따잡혀 가지고는 죽을 봉욕을 당하는 참이다.

시간은 오후 두시 반, 후장(後場)의 대판시세 이절(大阪時勢二節)이 들어오고 나서요, 절기는 바로 오월 초생.

싸움은 퍽 단출하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도 않는다.

지나가던 상점의 심부름꾼 아이 하나가 자전거를 반만 내려서 오도카니 바라보고 섰는 것이 그림의 첨경(添景) 같아 더욱 호젓하다.

휘둘리는 정주사의 머리에서, 필경 낡은 맥고모자가 건뜻 떨어져 마침 부는 바람에 길바닥을 대그르르 굴러간다. 미두장 정문 앞 사람 무더기 속에서 웃음 소리가 와아 하고 터져 나온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海岸通)이니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

이 대동맥 군데군데는 심장 가까이, 여러 은행들이 서로 호응하듯 옹위하고 있고 심장 바로 전후 좌우에는 중매점(仲買店)들이 전화줄로 거미줄을 쳐놓고 앉아 있다.

정주사는 자리하고도 이런 자리에서 봉변을 당하는 참이다.

그러나 미두장 앞에서 일어난 싸움이란 빤히 속을 알조다. 그런 싸움은 하루에도 으레 한두 패씩은 얼려 붙는다.

소위 ‘총을 놓았다’는 것인데, 밑천 없이 안면만 여겨 돈을 걸지 않고 ‘하바’를 하다가 지고서 돈을 못 내게 되면, 그래 내라거니 없다거니 하느라고 시비가 되어, 툭탁 치고 받고 한다.

촌이라면 앞뒷집 수탉끼리 암컷 샘에 후두둑후두둑하는 닭싸움만치나 예삿일이다.

해서 아무리 이런 큰길바닥에서 의관깨나 한 사람들끼리 멱살을 움켜잡고 얼러붙은 움이라도 그리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사람이 아니면 별반 구경하는 사람도 없다.

다 알고 지내는 같은 ‘하바꾼’들은 싸움을 뜯어말리기커녕, 중매점 처마 밑으로 미두장 정문 앞으로, 넌지시 비켜 서서, 흰머리가 희끗희끗 장근 오십의 중늙은이 정주사가 자식뻘밖에 안 되는 애송이한테 그런 해거를 당하는 것을 되레 고소하다고 빈정거리기만 한다.

--밑천도 없어 가지고 구성없이 덤벼들어, 남 골탕 멕이기 일쑤더니, 그저 잘꾸사니야!

--정주산지 고무래주산지 인제는 제발 시장 근처에 오지 말래요.

--저 영감님 저러다가는 생죽음하겠어!

--어쩔라구들 저래!

--두어 두게. 제 일들 제가 알아서 할 테지. 때애가면 둘 다 콩밥인걸.

정주사는, 멱살을 잡은 애송이의 팔목에 가 대룽대룽 매달려 발돋움을 친다. 목을 졸려서 얼굴빛은 검푸르게 죽고, 숨이 막혀 캑캑 기침을 배앝는다.

낡은 맥고모자는 아까 벌써 길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당목 홑두루마기는 안팎 옷고름이 뜯어져서 잡아 낚는 대로 주정뱅이처럼 펄럭거린다.

“여보게 이 사람, 여보게!”

“보긴 무얼 보라구 그래? 보아야 그 상판이 그 상판이지 별것 있나…… 잔말 말구 돈이나 내요.”

“글쎄 여보게, 이건 너무 창피하지 않은가! 이걸 놓고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세그려, 응? 이건 놓게.”

“흥! 놓아 주면 뺑소니를 칠 양으루? 어림없어…… 돈 내요. 안 내면 깝대기를 벳겨 놀 테니…….”

“글쎄 이 사람아! 이런다구 없는 돈이 어디서 솟아나나”

“요-런 얌체 빠진 작자 같으니라구! 왜, 그럼 돈두 없으면서 덤볐어? 덤비기를…… 그랬다가 요행 바루 맞으면 올개미 없는 개장수를 할 양으루…… 그리구 고 꼴에 허욕은 담뿍 나서, 머? 오십 전이야 차마 하겠나? 일 원은 해야지…… 고런 어디서…… 아이구! 그저 요걸 그젓…….”

애송이는 뺨을 한 대 갈길 듯이, 멱살 잡지 않은 바른편 팔을 번쩍 쳐들어 넓죽한 손바닥을 들이대면서 얼러 멘다. 정주사는 그것을 피하려고 고개를 오므라뜨리면서 엉겁결에 손을 내민다. 그 꼴이 하도 궁상스럽대서 하하하 웃음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그때 마침 ××은행 군산지점(群山支店)의 당좌계(當座係)에 있는 고태수(高泰洙)가, 잠깐 다니러 나왔는지 맨머리로 귀 위에 철필대를 꽂고 슬리퍼를 끌고 미두장 앞을 지나다가 싸움 열린 것을 보더니 멈칫 발길을 멈춘다.

그러자 또, 미두장 안에서는 중매점 ‘마루강(丸江)’의 ‘바다지(場立)’로 있는 곱사 장형보(張亨甫)가 끼웃이 밖을 내다보다가, 태수가 온 것을 보고 메기같이 째진 입으로 히죽히죽 웃는다.

“자네 장랫장인 방금 죽네, 방금 죽어, 어여 쫓아가서 말리게. 괜히 소복 입구 장가들게 되리!…… 어여 가서 뜯어말리라니깐 그래!”

모여 섰던 사람들은, 태수를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 모두 돌려다보면서 빙긋빙긋 웃는다.

태수는 형보더러 눈을 흘기면서도 함께 웃는다.

그는 형보 말대로 싸움을 말려 주고는 싶어도 형보가 방정맞게 여럿이 듣는 데서 그런 말을 씨월거려 놔서 차마 열적어 선뜻 내닫지 못하는 눈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요, 형보한테 빙긋 한번 더 웃어 보이고는 싸움 열린 길 가운데로 슬리퍼를 직직 끌고 건너간다.

“이건 무얼 이래요!…… 점잔찮게스리. 이거 노시오.”

태수는 정주사의 멱살을 잡은 애송이의 팔목을, 말하는 말조보다는 우악스럽게 훑으려 쥔다.

정주사는 점직해서, 안 돌아가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고, 애송이는 좀 머쓱하기는 하면서도 살

은 놓지 않는다.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나이깨나 좋이 먹어 가지구는…….”

“노라면 놔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태수는 쥐었던 애송이의 팔목을 잡아 낚는다.

“……잘잘못은 누게 있던지, 그래 댁은 부모도 없수? 젊은 친구가 나이 자신 분한테 이런 행패를 하게.”

몰아 대면서 거듭떠보는 태수의 눈살은 졸연찮게 팽팽하다.

애송이는 할 수 없이 멱살을 놓고 물러선다.

“그렇지만 경우가 그렇잖거던요!”

“경우가 무슨 빌어먹을 경우람? 누구는 그 속 모르는 줄 아우? 하바하다가 총 놨다구 그러지…… 여보, 그렇게 경우가 밝구 하거던 애여 경찰서루 가서 받아 달래구려!”

“허어 참!”

애송이는 더 성구지 못하고 돌아서서 미두장 정문께로 가면서, 혼자 무어라고 두런두런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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