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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73)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25.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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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박절하잖나! 동기간에…….”

“딴청을 하네! 동기간의 정은 또 다른 거 아니우? 미워해두 동기간의 정은 있는 거구, 남의 집 아이면은 정은 없어두 이뻐할 순 있는 것이구…….”

“그럼 그 앤…… 머, 이름이 송희”

“응, 송희…… 송흰 내가 이뻐두 허구, 정두 들었구, 두 가지루 다아…… 그러니깐 글쎄 그걸 알구서, 언니가 그 앨 날만 믿구, 자기는 죽는다는 거 아니우”

“허어!”

승재는 새삼스럽게 감동을 하면서, 우두커니 섰다가 혼자 말하듯,

“쯧쯧!…… 그래, 필경은 그 애를, 자식을 위해선 내 생명까지두 아깝덜 않다! 목숨을 버려 가면서라두 자식을! 응, 응…… 거 원, 모성애라께 그렇게두 철두철미하구 골똘하단 말인가!”

“우리 언닌 사정이 특수하기두 하지만, 그런데 참…….”

계봉이는 문득 다른 생각이 나서,

“세상에 부모가, 그 중에서두 어머니가, 어머니라두 우리 어머닌 예외지만…… 항용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거란 퍽두 끔찍한 건데, 그런데 말이지, 그런 소중한 모성애가 이 세상의 일반 인간들한텐 과분한 것 같어! 도야지한테 진주라까”

“건 또 웬 소리”

승재는 문을 열다가 돌아서서 계봉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대체 너는 어쩌면 그렇게 당돌한 소리만 골라 가면서 하고 있느냔 얼굴이다.

“어서 나가요! 가믄서 이얘긴 못 하나”

계봉이는 제가 문을 드르릉 열고 승재를 밀어 낸다.

집 안보다도 훨씬 훈훈하여 안김새 그럴싸한 밤이 바로 문 밖에서 잡답한 거리로 더불어 두 사람을 맞는다.

이 거리는, 이 거리를 끼고서 좌우로 오막살이집이 총총 박힌 애오개 땅 백성들의 바쁘기만 하지 지지리 가난한 생활을 고대로 드러내느라고, 박절스럽게도 좁은 길목이 메워질 듯 들이 붐빈다.

승재와 계봉이는 단둘이만 조용한 방 안에서 흥분해 있다가 갑자기 분잡한 거리로 나와서 그런지 기분이 헤식어 한동안 말이 없이 걷기만 한다.

“그런데 저어 거시키…….”

이윽고 승재가 말을 내더니 그나마 떠듬, 떠듬,

“……저어 우리 이얘길, 걸, 어떡헐꼬”

“무얼.”

“이따가 집에 가서 말야…….”

“언니더러 말이지요? 우리 이얘기 말 아니우!”

“응.”

“너무 부전스럽잖어? 더 큰 일이 앞챘는데…….”

“글쎄…….”

승재도 그걸 생각하던 터라 우기지는 못하고 속만 걸려 한다.

초봉이가 요행 이런 눈치 저런 눈치 몰랐다 하더라도, 승재를 마음에 두거나 그럼이 없이 오로지 장형보의 손아귀를 벗어져 나올 그 일념만 가지고서 계봉이와 승재 저희들의 권면과 계획을 좇아 거사를 한다면은 물론 아무것도 뒤돌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초봉이가 저희들 승재와 계봉이와의 오늘의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일변 승재의 단순한 호의를 잘못 해석을 하고서 그에게 어떤 분명한 마음의 포즈를 덧들여 갖든지 하고 볼 양이면, 사실 또 그러하기도 십상일 것이고 하니, 그건 부질없이 희망을 주어 놓고서 이내 다시 낙망을 시키는 잔인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대서, 그래 승재는 아까와 달라 제 걱정 제 사폐는 초탈하고 순전히 초봉이만 여겨서의 원념을 놓지 못하던 것이다.

덩치 큰 나그네, 자동차 한 대가 염치도 없이 이 좁은 길목으로 비비 뚫고 부둥부둥 들어오는 바람에 승재와 계봉이는 다른 행인들과 같이 가게의 처마 밑으로 길을 비껴서서 아닌 경의를 표한다. 문명한 자동차도 분명코 이 거리에서만은 야만스런 폭한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자동차를 비껴 보내고 마악 도로 나서려니까, 이번에는 상점의 꼬마동인지 조그마한 아이놈이 사람 붐빈 틈을 서커스하듯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다가 휘파람을 쟁그랍게 휘익,

“좋구나!”

소리를 치면서 해뜩해뜩 달아나고 있다.

승재는 히죽 웃고, 계봉이는 고놈이 괘씸하다고 눈을 흘기면서,

“저런 것두 ‘독초’감이야!”

하다가 그 결에 아까 중판멘 이야기끝이 생각이 나서,

“……아까 참, 모성애 그 이야기하다가 말았겠다…… 이거 월사금 단단히 받아야지 안 되겠수! 하하.”

“그래 학설을 들어 봐서…….”

“하하, 학설은 좀 황송합니다마는…… 아무튼 그런데, 그 모성애라께 퍽 참 거룩허구, 그래서 애정 가운데선 으뜸가는 거 아니우”

“그렇지…….”

“그렇지요…… 그런데, 가령 아무나 이 세상 인간을 하나 잡아다가 놓구 보거던요? 손쉽게 장형보가 좋겠지…… 그래, 이 장형보를 놓구 보는데, 그 사람두 어려서는 저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구 자랐을 게 아니우…… 자식이 암만 병신천치라두 남의 어머닌 대개 제 자식은 사랑하구 소중해하구 하잖어요? 되려 병신일수룩 애차랍다구서 더 사랑을 하는 법이 아니우”

“그건 사실이야…….”

“그러니깐 장형보두 저이 어머니의 살뜰한 사랑을 받었을 건 분명허잖우? 그런데 그 장형보라는 인간이 시방 무어냐 하믄 천하 악인이요, 아무짝에두 쓸데가 없구 그러니 독초, 독초라구 할 것 밖에 더 있수? 독초…… 큰 공력에 좋은 비료를 빨아먹구 자란 독초…… 그런데 글쎄 이 세상에 장형보말구두 그런 독초가 얼마나 많수? 그러니 가만히 생각하믄 소중한 모성애가 아깝잖어요…… 이건 참 죄루 갈 소리지만 우리 언니가 그렇게두 사랑하는 송희, 생명까지 바치자구 드는 송희, 그 애가 아녈 말루 인제 자라서 어떤 독초가 안 된다구는 누가 장담을 허우”

“계봉인 단명하겠어!”

승재는 말을 더 못 하게 것지르면서 어느새 당도한 전차 안전지대로 올라선다. 그건 그러나 아기더러 끔찍스런 입을 놀린대서 지천이지, 그의 ‘육법전서’ 연구에 돌연 광명을 던져 주는 새 어휘(형보 같은 인물을 ‘독초’라고 지적한), 그 어휘를 나무란 것은 아니다.

승재와 계봉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려, 바로 빌딩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계봉이도 시장은 했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모처럼 둘이 마주앉아서 먹는 저녁이다. 둘이 다 같이 군산 있을 적에 계봉이가 승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 준다는 게 생쌀밥을 해놓고, 그래도 그 밥이 맛이 있다고 다꾸앙쪽을 반찬삼아 달게 먹곤 하던 그 뒤로는 반년 넘겨 오늘 밤 처음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둘이는 저녁밥을, 한 끼의 저녁밥이기보다 생활의 즐거운 한 토막을 누리었다.

둘이 다 건강한 몸에 시장한 끝이요, 또 아무 근심 없이 유쾌한 시간이라 많이 먹었다. 승재는 분명 두 사람 몫은 실히 되게 먹었다.

그리 급히 서둘 것도 없고 천천히 저녁을 마친 뒤에, 또 천천히 거리로 나섰다.

배도 불렀다. 연애도 바깥의 트인 대기에 인제는 낯가림을 않는다. 거리도 야속하게만 마음을 바쁘게 하는 애오개는 아니다.

훈훈하되 시원할 필요가 없고 마악 좋은 오월의 밤이라 밤이 또한 좋다. 아홉시가 좀 지났다고는 하나 해가 긴 절기라 아직 초저녁이어서 더욱 좋다. 승재와 계봉이는 저편의 빡빡한 야시를 피해 이쪽 화신 앞으로 건너서서 동관을 바라보고 한가히 걷는다.

제법 박력 있이 창공으로 검게 솟은 빌딩의 압기를 즐기면서, 레일을 으깨는 철(鐵)의 포효와 도시다운 온갖 소음으로 정신 아득한 거리를 유유히 걷고 있는 ‘연애’는 외계가 그처럼 무겁고 요란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마음 아늑했다. 더구나 불빛 드리운 포도 위로 앞에도 뒤에도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으로 늘비하여 번거롭다면 더할 수 없이 번거롭지만, 마음이 취한 두 사람에게는 어느 전설의 땅을 온 것처럼 꿈속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승재나 계봉이나 다 같이 남은 남녀가 쌍지어 나섰으면 둘이의 차림새에 그다지 층이 지지 않아 보이는 걸, 저희 둘이는 승재의 그 어설픈 그 몰골로 해서 장히 얼리지 않는 콤비라는 것도 모르고 시방 큰길을 어엿이 걷고 있는 것이다. 항차 남의 눈에 선뜻 뜨이는 계봉이를 데리고 말이다.

동관 파주개에서 북으로 꺾여 올라가다가 집 문 앞 골목까지 다 와서 계봉이가 팔걸이시계를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아홉시하고 마침 반이었었다.

계봉이가 앞을 서서 골목 안으로 쑥 들어서는데 외등 환한 대문 앞에 식모와 옆집 행랑사람 내외와 맞은편 집 마누라와 이렇게 넷이 고개를 모으고 심상찮이 수군거리고 있는 양이 얼른 눈에 띄었다.

남의 집 드난살이나 행랑사람들이란 개개 저희끼리 모여 서서 잡담과 주인네 흉아작을 하는 걸로 낙을 삼고 지내고, 그래서 이 집 식모도 그 유에 빠지질 않으니까 그리 고이타 할 게 없다면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집 식모는 낮으로는 몰라도, 밤에는 영 어쩔 수 없는 주인네 심부름이나 아니고는 이렇게 한가한 법이 없다.

저녁밥을 치르고 뒷설거지를 하고 나서, 그러니까 여덟시 그 무렵이면 벌써 제 방인 행랑방에서 코를 골고 떨어져 세상 모른다. 역시 심부름을 시키느라고 뚜드려 깨우기 전에는 제 신명으로 밖에 나와서 이대도록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논다는 게 전고에 없는 일이다.

계봉이는 그래 선뜻 의아해서 주춤 멈춰 서는데, 인기척을 듣고 모여 섰던 네 사람이 죄다 고개를 돌린다.

과연 기색들이 다르고, 식모는 당황한 얼굴로 일변 반겨하면서 일변 달려오면서 목소리를 짓죽여,

“아이! 작은아씨!”

하는 게 마구 울상이다.

“응! 왜 그래”

계봉이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그대로 뛰어들어가려다가 말고 한번 더 눈으로 식모를 재촉한다. 사뭇 몸을 이리 둘렀다 저리 둘렀다 어쩔 줄을 몰라한다. 원체 다급하면 뛰지를 못하고 펄씬 주저앉아서 엉덩이만 들썩거린다는 것도 근리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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