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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71)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23.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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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 보다? 재밌을걸!”

“식모나 하나 두구서…… 오래잖어 명님이두 올라오구 할 테니깐, 동무삼아서…….”

“하하하! 누가 보믄 결혼했다구 그러게”

“헤, 괜찮어. 누이라구 그러지”

“누이라구 했다가 결혼은 어떡허나”

“어떻나…… 그런데 웃음엣말이 아니라, 언니 집에 있기가 마땅찮다면서 낼이라두 오게 하지”

“언니 띠어 놓구서 나 혼자 나오던 못 해요. 그러기루 들었으믄야 벌써 하숙이라두 잡구 있었게”

계봉이는 형 초봉이를 곰곰 생각하고 얼굴을 흐린다.

승재 역시 초봉이라면 한가닥 감회가 없지 못한 터라, 묵묵히 뒷짐을 지고서 계봉이가 앉았는 등뒤로 뚜벅뚜벅 거닌다.

계봉이는 이윽고 있다가 몸을 돌리면서 승재의 가운 자락을 잡고 끈다.

“저어어, 언니두 데리구 같이 오라구 하믄 오지만…….”

“언니두? 데리구”

“왜? 못써”

“아아니 못쓴다는 게 아니라…….”

“그런데 왜”

“아냐, 난 아무래두 괜찮지만…….”

“날 공부시켜 주느니 차라리 그렇게 해줬으믄 착한 남서방이지”

“그런 교환조건이야 머…….”

건성으로 중얼거리면서, 승재는 딴생각을 하느라고 도로 마루청을 오락가락한다.

승재는 초봉이가 그새 경난해 내려온 사정의 자세한 곡절이랄지, 더구나 시방 생사조차 임의로 할 수 없게끔 절박한 사세인 줄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계봉이가 한번 서신으로 대강 경과를 적어 보내 주기는 했었으나 지극히 간단한 졸가리뿐이어서 그걸로 깊은 정상을 짐작할 재료는 되지 못했었다. 그래 그저 막연하게 불행하거니 해서, 안되었다고, 종차 기회를 보아 달리 새로운 생애를 개척하도록 권면도 하고 두루 주선도 해주고 하려니, 역시 막연은 하나마 준비된 성의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막상 이날에 계봉이와 드디어 마음을 허하여 서로 맞터놓고 지내게 된 계제이자, 공교롭다 할는지, 동시에 가서 초봉이를 저희들의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문제가 생기고 본즉 승재로서는 더럭 불길스런 생각이 들지 않질 못했다.

만약 셋이서 그렇듯 그룹을 이루었다가 서로서로 새에 어떤 새로운 감정의 파문이 일어나 가지고, 그로 하여 필경 착잡한 알력이 생기든지 하고 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럴 날이면, 결국은 가서 일껏 구해 주었다는 초봉이한테 도리어 새로운 슬픔과 불행을 갖다가 전장시키게 될 것이 아니냐.

미상불 그러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캐고 보면, 그것도 그것이지만, 그와 같은 감정의 알력으로 해서 승재 저와 계봉이와의 사랑에 파탈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게 보다 더 절박한 불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번 더 그 밑을 헤치고 본다면, 또다시 미묘한 심경의 약한 이기심의 갈등이 얽히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승재는 초봉이에게 대한 첫사랑의 기억을 완전히 씻어 버리지는 못한 자다. 물론 그것은 욕망도 없고 미련도 아닌 한낱 가슴에 찍혀져 있는 영상(映像)일 따름이기는 하다. 하지만 소위 첫사랑의 자취라면 마치 어려서 치른 마마자국 같아 좀처럼 가시질 않는 흠집이다.

흠집일 뿐만 아니라, 가령 몸과 마음은 당장 이글이글 달구어진 새 정열의 도가니 속에서 다 같이 녹고 있으면서도 일변 첫사랑의 자취에서는 연연한 옛 회포가 제 홀로 한가로운 소요를 하는 수가 없지 않다.

결국 촌 가장자리에 유령이 나와서 배회하듯 ‘사랑의 유령’이지 별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승재는 아직도 망부(亡父) 아닌 그 사랑의 유령을 가끔 만나 햄릿의 제자 노릇을 일쑤 하곤 했었다. 그럴뿐더러 그는 제 마음을 미루어, 초봉이도 응당 그러하려니 짐작하고 있다.

이렇듯 제 자신이 저편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고, 저편에서도 그리한 줄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만약 초봉이와 한 울 안에서 조석 상대의 밀접한 생활을 하고 보면, 정이 서로 다시 얽혀 마침내 가장 불쾌한 결과를 보고라야 말게 되지나 않을까 이것이다. 즉 제 자신의 약점을 위험 앞에 드러내 놓기가 조심이 되어 뒤를 내던 것이다.

승재는 전에도 시방도 그리고 앞으로도 초봉이에게 대한 동정은 잃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이미 뭇 남자의 손에 치어, 정조적으로 순결성을 잃어버린 여자, 초봉이를 갖다가 결혼의 상대로 삼을 의사는 꿈에도 없을 소리다. 하물며 계봉이를 두어 두고서야…… 사내 쳐놓고 고만한 결벽이야 누구는 없을까마는 승재는 가뜩이나 그게 더한데다가 일변 소심하기 또한 다시 없어, 이를테면 시방 해변가의 놀란 조개처럼 다뿍 조가비를 오므리는 양이다.

계봉이는 종시 오락가락 서성거리는 승재를 잡아다가 제자리에 앉혀 놓고 안존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 언니가 서울로 올라오다가 중로에서 박제호를 만나 가지구…….”

이렇게 거기서부터 시초를 내어…….

초봉이는 제가 치르던 전후 풍파를 그 동안 여러 차례 두고 동생한테 설파를 했었고, 그래서 계봉이는 그것을 다 그대로 승재에게다 되옮겨 들려주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는 직접 제 눈으로 보아 온 터라 장형보의 인물이며, 그와 초봉이와의 부자연한 관계며, 송희에게 대한 초봉이의 지나친 애정이며, 또 요즈음 들어서는 바싹 더 절망이 되어 사선에서 헤매는 정상이며, 그의 심경, 그의 건강, 그리고 송희를 두고 느끼는 형보의 위협과 해독, 이런 것은 차라리 초봉이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이상으로 세밀하게 그러나 요령 있게, 잘 설명을 할 수가 있었다.

한 시간이나 거진 이야기는 길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

“그러니깐 암만 보아두 눈치가, 송흴 갖다가 장가 녀석의 위협이며 해독에서 구해 낼 겸, 그 앤 내게다 맽기구서 자긴 죽어 버릴 생각인가 봐!”

하고 목맺힌 소리로 끝을 맽는다.

승재는 마침내 크게 격동이 되지 않질 못했다. 견우코 미견양(見牛未見羊)의 그 양을 본 심경이라 할는지, 좌우간 해변가의 소심한 조개는 바스티유 함락같이 형세 일변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승재의 거동은 요란스러웠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가 절절히 감동을 했다가 주먹을 부르쥐고 코를 벌심벌심했다가 마루가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리하다가 마침내 초봉이가 헐수할수없이 자결이라도 하지 않지 못하게 되었다는 대문에 이르러서는 그만 참지 못해,

“빌어먹을 놈의!”

볼먹은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금시로 굵다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놈을 커다란 주먹으로 꾹꾹 씻으면서 두런두런,

“그런 놈을 갖다가 그냥 두구 본담! 마구 죽여 놓던지…….”

계봉이는 같이서 흥분하기보다도, 승재의 흥분하는 양이 우스워서, 미소를 드러내고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가로 흔든다.

“그래두 육법전서가 다아 보호를 해주잖우? 생명을 보호해 주구, 또 재산두 보호해 주구…… 수형법(手形法)이라더냐 그런 게 있어서, 고리대금을 해먹두룩 마련이시구…… 머, 당당한 시민인걸! 천하 악당이라두…….”

승재는 두 팔을 탁자 위에 세워 턱을 괴고 앉아서 앞을 끄윽 바라다본다. 얼굴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양미간으로 주름살이 세 개 굵다랗게 팬다.

육법전서가 보호를 해준다고 한 계봉이의 그 말이 방금 승재한테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라 마르세유’처럼 분명하진 못해도 마치 박하(薄荷)를 들이켠 것 같아 아프리만큼 시원했다.

승재는 머릿속이 그놈 박하 기운으로 온통 어얼얼, 화아해서 시원하기는 하나, 어디가 어떻다고 꼭 집어낼 수가 없었다. 시방 이맛살을 찌푸려 가면서 생각하기는 그의 중심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계봉이는 무얼 저리 생각하는가 싶어 그대로 두어 두고서 저 혼자 손끝으로 탁자 복판을 똑똑, 박자 맞추어 몸을 앞뒤로 가볍게 흔든다.

이윽고 침묵이 계속된 뒤다. 갑갑했던지 계봉이가 승재의 팔을 잡아당긴다.

“응”

승재는 움칫 놀라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어 거기 계봉이가 있음을 웃고 반긴다.

“……무얼 그렇게 생각해요”

“머어, 별것 아냐…… 헌데에…… 자아 언닐 위선 일러루라두 데려 내오는 게 좋겠군”

누가 만만히 놓아 준대서까마는 그런 건 상관없고 승재의 말소리며 얼굴은 자못 강경하다. 가슴에 묻은 불이, 아직 그를 바르게 어거해 나갈 ‘의사’가 트이지 않아, 종잇조각 투구에 동강난 나무칼을 휘두르면서 비루먹은 당나귀를 몰아 풍차(風車)로 돌격하는 체세이기는 하나, 초봉이를 뺏어 내어 괴물 장형보를 퇴치시킴으로써 (단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육법전서에게 분풀이를 할 요량인 것만은, 승재로서는 제접한 발육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아이 고마워라!”

계봉이는 좋아라고 냉큼 일어서더니 아까처럼 승재의 등뒤로 가서 목을 싸안는다.

“……우리 착한 되련님, 하하하.”

“저어 이렇게 하더라구”

“응, 어떻게”

“위선 언니더러 그렇게 하자구 상읠 하구서…….”

“좋아서 얼른 대답할걸, 머…… 다른 사람두 아니구, 남서방이 들어서 다아 그래 준다는 데야

…… 아이 참! 이거 봐요…… 언니가아 시방두우, 응? 남서방을 못 잊겠나 봐”

“괜헌 소릴!”

“아냐, 더러 말말끝에 남서방 이야기가 나오구, 그런 때믄 낯꽃이 여간만 다르질 않아요, 정말…….”

“그럴 리가 있나!”

승재는 그렇다면 필경 야단이 아니냐고 잊었던 제 걱정이 도로 도져서 혼자 땅이 꺼진다.

그러자 계봉이가 별안간,

“오오, 참…….”

하면서 승재의 어깨를 쌀쌀 잡아 흔든다.

“……그렇다구 괘애니, 언니허구 둘이서 도루 어쩌구저쩌구 해가지굴랑, 날 골탕멕였다만 봐…… 머, 난 몰라 몰라! 머…….”

“뭘! 계봉인 나허구 결혼두 할는지 말는지, 그렇다면서”

“뭐어라구”

보풀스럴 것까지는 없어도 방금 응석하던 음성은 아니다.

계봉이는 승재의 가슴에 드리웠던 팔을 거두고 제자리로 와서 앉는다. 승재는 이건 잘못 건드렸나 보다고, 무색해서 히죽히죽 웃는다. 그러나 승재를 빠끔히 들여다보고 있는 계봉이의 얼굴은 하나도 성난 자리는 없다. 장난꾸러기 같은, 또 어떻게 보면 시뻐하는 것 같은 미소가 입가로 드러날 뿐 아주 천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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