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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72)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24.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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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우”

“아냐, 아냐. 오해하지 말라구, 해해.”

“내, 시방이라두 집에 가서 언니 보내 주리까”

“아냐! 난 계봉이가 무어래나 보느라구 그랬어.”

“이거 봐요, 남서방!…… 머 이건 내가 괜히 지덕을 쓰는 것두 아니구 아주 진정으루 하는 말인데…… 난 죄꼼두 거리낄라 말구서 그렇게 해요!…… 언닌 아직까지 남서방을 못 잊는 게 분명하니깐 남서방두 언니한테 옛 맘이 남았거들랑 다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머 아무 걱정두 할라 말구서…….”

“아니래두 자꾸만!”

“글쎄, 아니구 무어구는 두구 봐야 하지만, 아무튼지 내 이야긴 참고삼아서라두 들어 봐요, 응…… 난 왜 그런고 허니 ‘오올 오어 낫싱’, 전부가 아니믄 전무(全無), 응? 사랑을 전부 차지하지 못하느니 조각은 그것마저두 일없다는 거, 알지요…… 그렇다구 내가 언닐 두구 질투를 하느냐믄 털끝만치두 그런 맘은 없어요. 사실 이건 질투 이전이니깐. 난, 난 말이지, 여러 군디루 분열된 사랑에서 한몫만 얻느니 치사스러 차라리 하나두 안 받구 말아요…… 사랑일 테거들랑올 하나두 빗나가지 않은 채루 옹근 사랑, 이거래야만 만족할 수 있는 거지, 그러잖군 아무것두 다아 의의(意義)가 없어요. 전체의 주장, 이건 자랑스런 타산이라우, 애정의 타산…….”

붙일성 없이 쌀쌀한 것도 아니요, 또 격해서 쏟쳐 오르는 폭백도 아니요, 열정은 혀밑에 넌지시 가누고 고삐를 늦추지 않아 차분하니 마침 듣기 좋은, 그래서 오히려 어떤 재미있는 담화 같다.

승재는 인제는 마음이 흐뭇해서 넓죽한 코를 연신 벌심벌심 입이 절로 자꾸만 히죽히죽 헤벌어진다. 건드려는 놓고도 이 얼뚱아기의 엉뚱스런 정열이 되레 흡족했던 것이다.

계봉이는 이내 꿈을 꾸는 듯 그 포즈대로 곰곰이 앉아 말을 잇는다.

“……삼 년! 아니 그 안 해 겨울부터니깐 그리구 내 나이 열여섯 살이었으니깐 햇수루는 사 년이겠지…… 허긴 그때야 철두 안 든 어린앤 걸 무엇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나! 거저 따르기나 했지. 그것이 나두 몰래, 남서방두 모르구, 우린 씨앗 하나를 뿌렸던 게 아니우…… 그런 뒤루 사 년, 내 키가 자라나구 지각이 들어 가구 그러듯이 그 씨앗두 차차루 자라서 싹이 트구 떡잎이 벌어지구 속잎이 솟아오르구 그래서 뿌리가 백히구 가지가 벋구 한 것이 시방은 한 그루 뚜렷한 남구가 됐구…… 그걸 가만히 생각하믄 퍽 희한스럽기두 허구!…… 신통하잖아요”

실상 동의를 구하는 말끝도 아닌 걸, 승재는 제 신에 겨워 흥흥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말이지요. 애정이라껀 ‘에네르기 불멸’두 아니구, 또 ‘불가입성’두 아니니깐…… 그샛동안 내가 남서방을 잊어버린다던지, 혹 잊어버리던 않었더래두 달리 한 자리 애정을 길른다던지 그럴 기회가 없으랄 법이 없는 것이지만…… 머 그랬다구 하더래두 그게 배덕의 짓두 아니구…… 그래 아무튼지, 내가 시방 남서방을 온전히 사랑을 하긴 하나 본데, 또 그렇다 해서 그걸 갖다가 무슨 자랑거리루 유세를 하는 건 절대루 아니구, 더구나 빚을 준 것이 아닌 걸 숫제 갚아달라구 부둥부둥 조를 며리가 있어요? 졸라서 받는 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니깐…….”

“자알 알았습니다…….”

승재는 슬며시 쥐고 주무르던 계봉이의 손을 다독다독 다독거려 주면서,

“……그리구 나두 시방은 계봉이처럼, 응? 저어 거시키…….”

헤벌씸 웃는 승재의 얼굴을 짯짯이 보고 있던 계봉이는 딴생각이 나서 입술을 빙긋한다.

역시 기교가 무대요 사람이 진국인 데는 틀림이 없으나, 그 안면근육의 움직이는 양이 어떻게도 둔한지 바보스럽기 다시 없어 보였다.

그러니 그저 사범과 출신으로 시골 보통학교에서 십 년만 속을 썩힌 메주같이 생긴 올드 미스가 이 사람한테는 꼬옥 마침감이요, 그런 자리에다가 중매나 세워 눈 딱 감고 장가나 들 잡이지 도시의 연애란 과한 부담이겠다고,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혼자 웃던 것이다.

계봉이는 신경도 제 건강과 한가지로 건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현대적인 지혜를 실한 신경으로 휘고 삭이고 해서 총명을 길러 간다.

만약 그렇지 않고서 지혜에 좀먹힌 말초신경적인 폐결핵 타입의 영양(令孃)이었다면 (하기야 그렇게 생긴 계집애는 아직은 없고 이 고장의 지드나 발레리의 종자(從者)들이 쓰는 소설 가운데서 더러 구경을 할 따름이지만, 그러므로 가사 말이다) 그렇듯 우둔하고 바보스런 승재의 안면 근육은 아예 그만한 풍자나 비판으로는 결말이 나질 않았을 것이다.

분명코 그 아가씨는 템씨나, 또 동물원의 하마(河馬) 같은 걸 구경할 때처럼 승재에게서도 병든 신경의 괴상한 흥분을 맛보았기 아니면, 야만이라고 싫증을 내어 대문 밖으로 몰아 냈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 계봉이는 그러면 마치 엊그제 갓 시집온 촌색시가 중학교에 다니는 까까중이 새서방의 다 떨어진 고쿠라 양복을 비단치마와 한가지로 양복장 속에다가 소중히 걸어 놓듯 그렇게 촌스럽게 승재를 위하고 그가 하는 짓은 방귀도 단내가 나고 이럴 지경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 둔한 떠받이도 아니요, 또 말초신경적인 병적 감상도 아니요, 계봉이는 극히 노멀하게 비판해서 승재의 부족한 곳을 다 알고 있다.

안팎이 모두 고색이 창연하고, 우물우물하고 굼뜨고, 무르고, 주변성 없고, 궁상스럽고, 유치하고 그리고 또 연애라니까 단박 결혼 청첩이라도 박으러 나설 쑥이고…… 등속이다. 이러해서 저와는 세기(世紀)가 다른 줄까지도 계봉이는 모르는 게 아니다. 그렇건만 계집아이의 첫사랑이라는 게 (첫사랑이 풋사랑이라면서) 그게 수월찮이 맹랑하여, 길목버선에 비단 스타킹 격의 무서운 아베크를 창조해 놓았던 것이요, 그놈이 그래도 아직은 (남들이야 흉을 보거나 말거나) 저희는 좋아서 희희낙락 대단히 유쾌하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초봉이의 일 상의를 하느라 이야기는 다시 길어서, 여덟시가 지난 뒤에야 둘이는 같이서 종로까지 나가기로 자리를 일어섰다. 근처에서 매식이 변변칠 못하니 종로로 나가서 저녁도 먹을 겸.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 길로 초봉이를 만나러 가기로…….

초봉이와는 셋이 앉아 미리 당자의 의견도 듣고 상의도 하고 그런 뒤에 형편을 보아, 그 당장이고 혹은 내일이고 승재가 형보를 대면하여 우선 온건하게 담판을 할 것, 그래서 요행 순리로 들으면 좋고, 만약 안 들으면 그때는 달리 무슨 방도로 구처할 것, 이렇게 얼추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다.

무름하기란 다시 없는 소리요, 그뿐 아니라 온건히 담판을 하겠다고 승재가 형보한테 선을 뵈다니 긴치 않은 짓이다. 형보가 누구라고 온건한 담판은 말고 백날 제 앞에 꿇어앉아 비선을 해도 들어줄 리 없는 걸, 그러고 완력다짐을 한댔자 별반 잇속이 없을 것인즉, 그 다음에는 몰래 빼다가 숨겨 두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승재까지 낯알음을 주어서 장차에 눈 뒤집어쓰고 찾아다닐 형보에게 들킬 위험만 덧들이다니…….

이 계책은 대체로 계봉이의 의견을 승재가 멋모르고 동의한 것이다. 계봉이는 물론 승재보다야 실물적으로 형보라는 인물을 잘 알기 때문에 좀더 진중하고도 다부진 첫 잡도리를 하고 싶기는 했으나, 섬뻑 좋은 꾀가 생각이 나지를 않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선 그렇게 해보되 약차하면 기운 센 승재가 주먹으로라도 해대려니 하는 아기 같은 안심이었던 것이다.

어깨가 자꾸만 우줄거려지는 것을 진득이 누르고, 승재는 가운을 벗고서 양복 저고리를 바꿔 입는다. 갈데없는 검정 서지의 쓰메에리 양복 그놈이다.

계봉이는 바라보고 섰다가 빙긋 웃는다. 승재도 그 속을 알고 히죽 웃는다.

“저 주젤 언제나 좀 면허우”

“응, 가만있어. 다아 수가 있으니…….”

승재는 모자를 떼어다 얹고 나서고 계봉이는 그의 어깨에 가 매달리면서,

“수는 무슨 수가 있다구!…… 그러지 말구, 응? 이거 봐요.”

“응.”

“선생님 됐으니깐 나한테 턱을 한탁 해요!”

“턱을 하라구…… 하지, 머.”

“꼬옥”

“아무렴!”

“내가 시키는 대루”

“응.”

“옳지 됐어…… 인제 시방 나간 길에 양복점에 들러서 갈라 붙인 새 양복 한 벌 맞춰요, 응”

“아, 그거…… 건 글쎄 한 벌 생겼어.”

“생겼어? 저어거!…… 그런데 왜 안 입우”

“아직 더얼 돼서…… 여기 강씨가, 이거 병원 같이 하는 강씨가, 고쓰가이 같다구 못쓰겠다구,

헤에…… 그래 축하 겸 자기가 한벌 선사한다나? 헤.”

“오옳아…… 난두 그럼 무어 선살 해예지? 무얼 허나? 넥타이? 와이샤쓰”

“괜찮아. 계봉인 아무것두 선사 안 해두 좋아.”

“어이구 왜 그래!”

“그럼 꼭 해야 하나? 그렇거들랑 아무거구 값 헐한 걸루다가 한 가지…….”

“넥타일 할 테야, 아주 훠언한 놈으로…… 하하하하, 넥타이 매구 갈라 붙인 양복 입구, 아이 그렇게 채리구 나선 거 어서 좀 봤으믄! 응? 언제 돼요? 양복.”

“내일 아침 일찍 가져온다구 했는데…….”

“낼 아침? 아이 좋아!”

계봉이는 아기처럼 우줄거린다. 승재는 나갈 채비로 유리창을 이놈저놈 단속하고 다닌다.

“그럼 이거 봐요, 낼, 낼이 마침 나두 쉬는 날이구 허니깐, 응”

“놀러 가자구”

“응…… 새 양복 싸악 갈아입구, 저어기…….”

“저어기가 어딘가”

“저어기 아무 디나 시외루…….”

“거, 좋지!”

“하하, 새 양복 입구 ‘아미’ 데리구, 오월달 날 좋은 날 시외루 놀러가구, 하하 남서방 큰일났네!”

“큰일? 거 참 큰일은 큰일이군…… 그러구저러구 내일 그렇게 놀러 나가게 될는지 모르겠군.”

“왜”

“오늘 낼이라두 언니 일을 서둘게 되면…….”

“그거야 일이 생기믄 못 가는 거지만…… 그러니깐 봐서 낼 아무 일두 없겠으믄 말이지…… 옳아 참, 언니두 데리구 송희두, 송흰 남서방이 업구 가구, 하하하하.”

계봉이는 허리를 잡고 웃고, 승재도 소처럼 웃는다. 조금만 우스워도 많이 웃을 때들이기야 하다.

승재는 진찰실 문을 밖으로 잠그느라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겨우 돌아선다.

“내가 애길 업구 간다…… 건 정말루 고쓰가이 같으라구? 헤헤.”

사실은 그렇게 하고 나서면 고쓰가이가 아니라 짜장 초봉이와 짝이 된 애아비의 시늉이려니 해서 불길스런 압박감이 드는 것을, 제 딴에는 농담으로 눙치던 것이다.

이렇게 소심하고 인색스런 데다 대면 계봉이는 오히려 대범하여, 그런 좀스런 걱정은 않고 노염도 인제는 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승재의 그 말을 받아 얼핏,

“고쓰가이 같은가? 머, 애기 아버지 같을 테지, 하하하.”

하면서 이상이다. 계봉이가 이렇게 털어놓는 바람에 승재도 할 수 없이 파탈이 되어,

“애기 아버지면 더 야단나게? 누구 울라구”

하고 짐짓 한술 더 뜬다. 그러나 되레 되잡혀,

“날 울리믄 요옹태지!…… 난 차라리 우리 송희가 남서방같이 착한 파파라두 생겼으믄 좋겠어!”

“연앨 갖다가 게임이라더니 암만해두 장난을 하나 봐!”

승재는 구두를 꺼내면서 혼자 두런거리고, 계봉이는 지성으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왜? 소내기 맞었수? 무얼 자꾸만 쑹얼쑹얼허우”

“장난하긴 아냐!”

“네에, 단연코 장난이 아닙니다아요! 되렌님.”

“그럼 무어구”

“칼모틴형이나 수도원형이 아닐 뿐이지요. 칼모틴형 알아요? 실연허구서 칼모틴 신세지는 거…… 또, 수도원형은 수녀살이 가는 거.”

“대체 알기두 잘은 알구, 말두 묘하겐 만들어 댄다! 원 어디서 모두 그렇게 배웠누”

승재는 어이가 없다고 뻐언히 서서 웃는다.

“하하하…… 그런데 그건 그거구, 따루 말이우, 따루 말인데, 우리 송희가 남서방 같은 좋은 파파가 있다믄 정말 졸 거야! 인제 이따가라두 보우마는 고놈이 어떻게 이쁘다구!”

“그런가!”

“인제 가서 봐요! 남서방두 담박 이뻐서 마구…….”

“계봉이두 그 앨 그렇게 이뻐하나”

“이뻐하기만!…… 아 고놈이 글쎄 생기기두 이쁘디이쁘게 생긴 놈이 게다가 이쁜 짓만 골고루 하는 걸, 안 이뻐허구 어떡허우!”

“그럼 이쁘게두 생기덜 않구 이쁜 짓두 하덜 않구 그랬으면 미워하겠네”

“그거야 묻잖어두 이쁘게 생기구 이쁜 짓을 허구 하니깐 이뻐하는 거지, 머…… 우리 병주 총각 못 보우? 생긴 게 찌락소 같은 되련님이 그 값 하느라구 세상 미운 짓은 다아 허구 다니구……그러니깐 내가 그 앤 어디 이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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