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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다 마시자, 테플류도프는 언제까지 출정해야 하는가를 통지서에서 확인할 겸 공작 영양의 서신에 답장을 쓰려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로 가자면 아틀리에를 지나가야만 했다. 아틀리에엔 그리다 만 그림을 뒤집어 놓은 화가가 세워져 있었으며, 여러 가지 데생도 걸려 있었다. 그가 2년 동안이나 고심하며 그린 유화와, 여러 가지 데생과, 아틀리에 전체의 조망은 그림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무력감을 환기시켜 주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더욱 강하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감정을 너무나 섬세한 자기의 감수성 탓이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어쨌든 그 의식은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7년 전에 그는 자기가 그림에 대해 천부적 소질이 있다고 믿고 군복무를 내동댕이쳐 버렸으며, 예술가적 높은 견지에서 얼마간 경멸의 눈으로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을 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자기에게 그런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일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불쾌했다. 그는 침울한 마음으로 아틀리에 안의 모든 사치스런 시설을 둘러보고는 언짢은 기분이 되어 이내 서재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의 서재는 아주 뛰어난 장식과 안락과 편의를 두루 갖춘 넓은 방이었다.
통지서는 '지급'이라고 써 붙인 큰 테이블 서랍 속에서 곧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재판소에 2시까지 출두하라고 적혀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테이블에 앉아 공작 영양에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며 식사 전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가겠다는 답장을 썼다가 곧 그것을 찢어 버렸다. 너무 다정한 것 같았기때문이었다. 다시 한 장 썼으나 이번에는 지나치게 냉정하여 거의 모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찢어 버리고 벽에 붙은 벨을 눌렀다. 그러자 회색 앞치마를 걸친 시무룩한 표정의 나이 든 하인이 나타났다. 그는 구레나룻만 남기고 깨끗하게 면도질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부르게."
"네."
"그리고 저쪽에 코르차긴 댁에서 온 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오늘 밤 되도록 참석하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예의에는 어긋나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으니 별수 없지. 그러나 어차피 오늘 밤에 만나게
될 테니까.'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하면서 외투를 입으러 갔다.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나갔을 때에는 벌써 눈에 익은 고무바퀴가 달린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 나리께서 코르차긴 공작 댁에서 막 떠나신 후에 제가 마중을 나갔습죠." 마부는 루바시카의 흰 깃 속에서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목덜미를 반쯤 돌리며 말했다. "그랬더니 문지기가 방금 돌아가셨다고 일러 주더군요." '마부까지 나와 코르차긴 일가와의 관계를 알고 있구나.'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그러나 코르차긴 공작 영양과 결혼할 것인가 안 할것인가 하는, 최근의 그의 마음을 휘잡고 있던 미결된 문제가 다시금 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른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 역시 아무런 해결도 지을 수 없는것이었다.
대체로 결혼을 해서 이롭다고 생각되는 점은, 첫째로 결혼은 가정의 단란 이외에도 성생활의 불규칙성을 없애고 도덕적인 생활을 선도하는 가능성을 준다는 데 있다. 둘째로는 이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네플류도프는 가정, 즉 이들이 현재의 그의 무의미한 생활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있었다.
이것이 대체로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이미 젊은 시절을 넘긴 독신자들에겐 공통적인 현상인 자유를 박탈당하리라는 공포심과, 둘째로는 여자의 신비로운 본질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였다.
특히 미시(코르차긴 공작 영양 이름은 마리야였으나, 특정한 계층의 다른 모든 가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러한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와의 결혼이 이롭답고 생각되는 이유는, 첫째로 그녀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옷 매무새로부터 말솜씨라든가 걷는 모습, 웃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보통 처녀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특출난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품위가 있다'는 것이었다-그는 이런 특질을 표현할 만한 다른 말을 못 찾았으나 아무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둘째로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뛰어난 장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네플류도프로서는 그녀의 지성과 판단력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미시와의 결혼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첫째로 미시보다 훨씬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보다도 더 적합한 처녀를 만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로 그녀는 벌써 27세니까, 과거에 여러 번 연애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런 생각을 하면 네플류도프는 괴로웠다. 비록 과거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녀가 자기 이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장래에 자기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했는지 모르지만 전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긍정과 부정의 엇갈린 생각이 서로 비등했다. 그래서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비웃으면서 자기 자신을 '부리단의 노새'('재갈 물린 노새', 즉 결단성 없는 사람을 비유한 우화)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리단의 노새'를 면하지 못하고 두 더미 건초 중에서 어느 것부터 먹어야 좋을지를 몰랐다.
"어쨌든 마리야 바실리예브나(귀족 회장의 부인)로부터 회답을 받아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단 말이야."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듯 부득이 결심을 늦추어야 했고, 또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자, 그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어쨌든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의 마차가 소리도 없이 아스팔트로 포장된 재판소 앞 주차장에 닿았을 때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내가 평소에 하던대로, 그리고 의당 해야 한다고 여겼던 대로 성심 성의껏 사회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런 의무는 재미있을 때가 흔히 있단 말이야."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이르면서 수위 옆을 지나 재판소의 입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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