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여러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코르차긴가의 상냥하고 뚱뚱한 문지기가 영국제의 돌쩌귀가 달린 참나무 대문을 소리 없이 열면서 말했다. "지금 식사중이십니다만, 공작님만은 모시라는 분부셨습니다."
문지기는 층계 쪽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연결된 벨을 눌렀다.
"누가 와 계신가?" 네플류도프는 외투를 벗으면서 물었다.
"콜로소프 씨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씨, 그 외에는 모두 집안 식구들뿐입니다."
층계 위에서 연미복에 하얀 장갑을 낀 말쑥한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공작님, 어서 올라오십시오. 방으로 모시라는 분부십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층계를 올라가서, 이제는 익숙해진 호화롭고 넓은 홀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자기 방에서 한번도 나와 본 적이 없는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을 제외한 전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식탁의 상석에에는 코르차긴 노인, 그와 나란히 왼쪽에는 의사, 그 반대편에는 전에 현의 귀족 회장이었으며 지금은 은행 중역으로 있고 코르차긴의 자유사상의 상대역이 되고 있는 이반 이바노비치 콜로소프가 손님으로 앉아 있었다. 그에 이어 왼쪽에는 미시의 어린 누이동생의 가정 교사로 있는 미스레데르, 그 다음에는 네 살 난 미시의 어린 누이동생, 오른쪽 맞은편에는 미시의 남동생이며 코르차긴 집안의 외아들이고 중학교 6학년생인 페챠(이 아이의 시험 때문에 가족 전체가 이 도시에 남아 있다.),
가정 교사인 대학생, 그 왼쪽에는 40세가 된 노처녀이며 격렬한 슬라브주의자인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그 맞은편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또는 미샤체레긴이라고도 불리는 미시의 사촌 오빠가 앉아 있었으며 맨 끝 자리에는 당사자인 미시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주인 없는 빈 자리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마침 잘 왔군. 자, 앉으시오. 막 생선 요리를 들려던 참인데."하고 코르차긴 노인이 충혈되고 흐릿한 눈으로 네플류도프를 쳐다보며 의치로 조심스럽게 음식을 씹으면서 말했다.
"이봐 스테판!"하고 그는 입 안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 뚱뚱하고 풍채가 좋은 주방장에게 빈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네플류도프는 코르차긴 노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식사 때도 여러 번 본 일이 있었는데도 오늘은 어쩐지 이 노인으로부터 몹시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
먹기에 바빠서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그 혈색 좋은 얼굴도, 조끼에 끼운 냅킨도, 기름도 목덜미도, 특히 살이 찐 장군 타입의 모습이 끔찍스럽게 생각되었다. 네플류도프는 문득 이 노인의 잔인성에 대하여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가 왜 그랬는지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그는 집안도 좋고 부자였으므로 근무상 입신 출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어느 지방 장관으로 있을 때 사람들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고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네, 곧 가져갑니다. 각하!"하고 스테판이 은쟁반이 가득 진열된 천장에서 스푼을 꺼내면서 구레나룻을 기른 말쑥한 하인에게 눈짓을 하자 그 하인은 냉큼 미시 옆에 놓여 있는 주인 없는 나이프와 포크들과, 그 접시 위에 문장이 한가운데로 돋보이도록 맵시 있게 접혀 있는 풀먹인 냅킨을 바로놓았다.
네플류도프는 거기 있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식탁을 한 바퀴 돌았다. 그가 옆으로 왔을 때, 코르차긴 노인과 부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한번도 말해 본 적도 없지만 이렇게 식탁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과 악수를 한다는 것이 오늘 그에게는 유달리 불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늦게 온 데 대하여 사과하고 미시와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사이의 빈 자리에 앉으려고 했으나, 코르차긴 노인은 보드카를 마시지 않으려면 새우, 어란, 치즈와 간 청어가 담긴 작은 접시들이 놓여 있는 식탁으로 가서 좀 먹으라고 권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다지 시장하지는 않았으나, 치즈를 얹은 빵을 먹다 보니 도중에 그만두기도 뭣해서 억지로 집어먹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회의 기초를 흔들어 놓으셨습니까?"하고 콜로소프는 배심원 제도를 공격한 보수주의 신문의 논조를 빌려서 비꼬는 투로 말했다. "법인은 무죄로 만들고, 죄없는 사람은 유죄로 만들어 놓으셨겠지요?"
"사회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단 말이야... 사회의 기초를..."하고 자유주의의 동지인 친구인 기지와 학식에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는 노공작도 낄낄 웃으면서 되풀이했다.
네플류도프는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콜로소프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때마침 나온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이이가 천천히 잡수실 수 있도록 놔두세요."하고 미시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녀는 '이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친근함을 알렸다.
콜로소프는 그 동안에도 커다란 소리로 그를 분개시킨 배심원 제도를 공격한 신문의 논문 내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조카인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 신문에 실린 다른 논문에 대해서 얘기했다.
미시는 여느 때와 같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마 몹시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시장하시지요?" 그녀는 입 속에 든 음식을 씹어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네플류도프에게 말했다.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화랑에 가셨던가요?"
"아니에요, 다음으로 미루었어요. 저희들은 살라마토프 씨 댁으로 잔디밭에서 하는 테니스를 치러 갔었어요. 크룩스 씨는 정말 잘 치시더군요."
네플류도프가 여기 온 것은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집에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유쾌했었다. 그것은 그의 감정에 유쾌한 영향을 주는 고상하고 사치스러운 환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제넘지 않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아양과 응석의 분위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이 집의 모든 것이 불쾌하게만 여겨졌다. 문지기로부터 넓은 계단, 꽃들, 하인들, 식탁 위의 장식들을 비롯하여 미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러했다.
오늘 밤의 미시는 어쩐지 매력이 없었으며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저 콜로소프의 자유주의자인 척하는 자신만만하고 저속한 말투도 불쾌했으며, 코르차긴 노인의 황소같이 자만심에 차고 미련스럽게 육감적인 모습도 불쾌했다. 남녀 가정 교사가 모두 쭈뼛거리는 모습도, 그리고 자기를 가리켜 '이이'라고 부른 대명사가 무엇보다도 불쾌했다.
네플류도프는 미시를 대하는 태도에서 항상 두 가지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즉 어떤 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아니면 달빛 아래서 보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 때는 싱싱하고 아름답고, 총명하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갑작스레 마치 밝은 햇빛 아래서 보듯이 그녀의 결점이 모조리 드러나 보였다. 오늘 밤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잡혀 있는 잔주름을 모조리 보았고, 흐트러져 일어선 머리칼이며, 삐죽 튀어나온 팔꿈치를 보았다. 특히 자기 부친의 손톱을 연상케 하는 엄지손가락의 커다란 손톱이 눈에 띄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게임이지요."하고 콜로소프는 테니스 이야기를 했다. "그런 것보다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하던 라프다(공놀이의 일종)가 훨씬 재미있지요."
"아니에요. 당신은 해보지 않았으니까 모르시는 거예요. 참으로 재미있는 게임이에요." 미시가 반박했으나, 네플류도프에게는 그 '참으로'란 말의 발음이 유난히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졌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도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도 모두 그 논쟁에 한몫 끼였다. 다만 가정 교사 두 사람과 아이들만은 입을 다물고 따분한 듯이 앉아 있었다.
"밤낮 논쟁이 그칠 새가 없다니까!"하고 코르차긴 노인은 껄걸 웃더니 조끼에서 냅킨을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의자를 덜거덕거리면서(하인이 얼른 그 의자를 붙잡았다.)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서 양치질할 물그릇과 향기 높고 따뜻한 물이 놓여 있는 조그만 테이블로 가서는 양치질을 한 다음 다시 흥미도 없는 논쟁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으세요?" 미시는 네플류도프를 돌아다보았다. 게임을 할 때만큼 그 사람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적은 없다고 하는 자기 의견에 동의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네플류도프의 표정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비난하는 듯하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물어 보고 싶었다. 미시는 평소에도 그의 그런 표정을 두려워했었다.
"글쎄, 모르겠군요. 그런 문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어머니께 가볼까요?"하고 미시가 물었다.
"네, 그럽시다." 그는 담배를 꺼내면서 대답했으나,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말없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자신도 좀 민망스럽게 여겨졌다. '남의 집에 와서 다른 사람들의 기분까지 잡치게 하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일이지...'하고 그는 자기 스스로 반성했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상냥하게 하느라고 애쓰면서 공작 부인이 만나 주신다면 기꺼이 가 보겠다고 말했다.
"그럼요. 어머니께선 무척 반가워하실 거예요. 거기서도 담배는 피우실수 있어요. 이반 이바노비치도 거기 가 계세요."
이 집의 주부인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은 늘 자리에 누워 사시는 환자였다. 벌써 햇수로 8년째나 손님이 있건 없건 레이스와 리본과 비로드에 싸여서 금박과 상아와 청동과 꽃 속에 누워 있었다.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고,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다만 '자기의 친구'만을 방에 들어오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의견에 의하면 그 친구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 했다. 네플류도프도 이 친구 중의 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총명한 까닭도 있었으며, 미시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엇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의 방은 크고 작은 두 객실 저쪽에 있었다. 네플류도프 앞에 걸어가던 미시가 큰 객실에 들어서며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금칠을 한 조그마한 의자의 등받이를 잡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미시는 무척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고, 또 네플류도프라면 알맞은 배우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가 좋았으므로, 저 사람은 내 것이 되리란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자기가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녀는 정신병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의식중에 집요하고 교묘한 꾀를 부려서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법정에서 우연히 카추샤를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붉혔다.
"네, 있었습니다." 그는 솔직하려고 애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기묘하고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게 그걸 말씀해 주실 수 없으세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발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 일에 대해서 아직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니까요." 그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제게는 말씀 못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고 그녀가 붙잡고 있던 조그마한 의자가 약간 뒤로 밀려났다.
"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녀에 대하여 그가 이렇게 대답하다는 것은 자기 신변에 일어난 일이 그야말로 매우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자신에게도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가보실까요?"
그녀는 마치 부질 없는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앞장서서 여느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미시가 눈물을 참느라고 부자연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녀에게 괴로움을 주었다는 것이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여기서 조금만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게 된다는, 즉 꽁꽁 묶이고 만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공작 부인의 내실로 가면서도 말없이 그녀 뒤를 따라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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