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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26)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7.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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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은 이제 막 정성을 들인 아주 영양이 풍부한 저녁 식사를 끝마친 후였다. 그녀는 자기가 식사하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항상 혼자 먹곤 했다. 파히토스카(옥수수 이파리로 말아놓은 가느다란 궐련)를 피우고 있는 그녀의 침대 옆에는 그녀가 마실 커피가 놓인 조그만 테이블이 있었는데, 공작 부인은 시원한 검은 눈과 고른 이와, 아직도 나이보다 더 젊은 티를 내려는 암갈색 머리의 가냘프고 훤칠한 부인이었다.

공작 부인과 의사와의 사이에는 스캔들이 떠돌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이 때까지 그런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지금 그 일이 문득 생각났는데, 기름을 발라 번질번질한 턱수염을 좌우로 멋지게 갈라 붙인 의사가 그녀의 의자 옆에 있는 것을 보자 속이 메스껍도록 불쾌해졌다.

콜로소프는 공작 부인과 가까운 낮고 폭신폭신한 안락 의자에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 커피를 젓고 있었다. 조그만 테이블 위에는 리큐어 술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미시는 네플류도프와 함께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피곤하시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 하시면 제 방으로 오세요." 그녀는 네플류도프에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 명랑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꺼운 양타자 위를 사뿐사뿐 밟으며 방에서 나갔다.

"참 잘 왔어요. 자, 여기 앉아서 얘끼나 좀 해주구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 공작 부인은 진짜와 혼동될 만큼 감쪽같이 만든 아름답고 긴 틀니를 드러내 보이면서 일부러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몹시 우울한 얼굴로 재판소에서 돌아오셨다고요. 확실히 그런 일은 상냥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괴로우리라고 생각되었다오."하고 그녀는 프랑스 어로 덧붙여 말했다.

"맞아요, 그래요."하고 네플류도프는 대답했다. "이따금 느끼게 되는데, 자기에게는...다른 사람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고말고요." 부인은 그의 말의 진실성에 감동한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교묘하게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당신 그림은 어떻게 됐나요? 꼭 한번 보고 싶은데."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몸이 이렇게 부자유스럽지만 않다면 벌써 보았을 텐데."

"전 그림을 완전히 집어치웠습니다." 네플류도프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그녀의 빤히 들여다 보이는 아첨이 숨기려고 애쓰는 나이와 마찬가지로 다 드러나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시면 안돼요! 저, 레핀(러시아의 대표적 화가)씨도 저에게 말씀하셨다우. 당신은 천재적 소질이 있다고요."하고 그녀는 콜로소프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면서 부끄럽지 않을까?' 하고 네플류도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네플류도프가 기분이 얹짢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분위기에 맞는 세련된 자기네 대화 속에 끌어들이진 못하겠다고 단정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콜로소프 쪽을 돌아보며 새로 나온 희곡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마치 콜로소프의 의견이 모든 의혹을 풀어 주고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영원불멸의 의의를 갖기나 하는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말투였다.

콜로소프는 그 희곡을 깍아내리는 김에 예술에 관한 자기 의견까지 늘어놓았다. 공작 부인은 그 의견의 진실함에 경탄하면서 희곡 작가들을 위해서 두둔도 해봤지만, 곧 항복하여 절충안을 꺼내놓기도 했다. 네플류도프는 가만히 듣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가 보고 듣고 있었던 것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의 말을 듣는가 하면, 어느새 콜로소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플류도프는 분명히 깨달았다. 첫째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나 콜로소프에게 있어서 그 희곡은 하찮은 것이고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저 식사 후 소화를 위한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콜로소프는 보드카와 포도주, 리큐어 주 따위를 마셔 약간 취해 있었는데, 그것은 어쩌다 한잔 마셨다가 취해 버린 농부들의 주정과는 달라서 항상 술을 마셔서 취한 사람들의 주정이라 비틀거리지도 않고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흥분한 자기 만족감에 빠져 있었다. 셋째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불안스러운 듯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네플류도프는 알아챘다. 그것은 비스듬히 비쳐 들어오는 태양 광선이 그녀에게까지 비쳐와서 그녀의 나이를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그녀는 콜로소프의 의견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장단을 맞추고는 침대 옆의 벽에 붙어 있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의사는 벌떡 일어나 마치 자기가 한집안 사람이기나 한 것철럼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방에서 나갔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필리프, 제발 저 커튼을 내려 줘요." 벨소리를 듣고 잘생긴 하인이 들어왔을 때, 그녀는 창문의 커튼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녜요,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거기에는 신비로운 것이 있어요. 신비로운 데가 없다면 시라는 것도 있을 수 없지요."하고 그녀는 까만 눈으로 커튼을 내리고 있는 하인의 동작을 화난 듯이 지켜보며 말했다.

"시가 없는 신비란 미신일 뿐이며, 신비가 없는 시는 산문에 불과해요."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짓고 커튼을 바로잡고 있는 하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계속했다.

"필리프, 그 커튼이 아니라 저 창문의 것 말이야."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이런 데까지 일일이 말을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이 불쌍하다는 듯이 수난자 같은 말투로 주의를 준 다음, 곧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향기로운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히토스카를 보석 반지로 장식된 손으로 집어 입에 물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근육이 발달한 잘생긴 하인 필리프는 미안한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장딴지가 불룩한 튼튼한 다리로 양탄자를 조심스레 밟으며 묵묵히 다음 창문으로 옮겨가서 주의 깊게 부인을 지켜보면서 한 줄기의 햇살도 부인 쪽으로 비치지 않도록 커튼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또 실수를 했으므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신비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단하고, 지독하게도 자기 속을 썩여 주는 둔해 빠진 필리프에게 주의를 주어 일을 다시 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순간 필리프의 눈이 번득였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하인은 분명히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렸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이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남이고 힘이 센 필리프는 이내 화난 기색을 감추고 질렸다는 듯이 가냘프고 야윈 몸이 온통 겉치레 일색인 공작 부인이 하라는 대로 묵묵히 일했다.

"물론 다윈의 학설에도 다분히 진리가 있습니다."하고 콜로소프는 낮은 안락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거슴츠레한 눈으로 공작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좀 지나친 데가 있어요. 정말이에요."

"당신도 유전설을 믿으시나요?"하고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네플류도프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이렇게 물었다.

"유전설이라고요?" 네플류도프는 물었다. "아니,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으나, 그는 이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상상 속에 떠오른 이상한 환상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모델로 써 보고 싶을 만큼 미남이며 힘이센 필리프 옆에다, 수박같이 둥근 배, 벗겨진 대머리, 근육이라고는 전혀 없는 채찍 같은 두 팔을 가진 콜로소프의 발가벗은 몸뚱이를 세워 놓은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은 실크나 비로드로 감겨 있지만 소피야 바실리예브나의 진짜 어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 상상은 너무나 소름이 끼쳤기 때문에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소피야 바실리예브나는 그를 훑어보았다.

"참, 미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녀가 말했다. "그 애한테 가 보세요. 슈만의 신곡을 들려 주고 싶어하더군요. 참 흥미있는 곡이예요."

'그녀는 피아노를 칠 생각도 없단 말이야. 어쩌자고 그런 엉뚱한 거짓말만 늘어놓을까?'하고 네플류도프는 일어서서 소피야 바실리예브나의 보석 반지로 장식된 속까지 비쳐 보일 듯이 뼈만 앙상한 손을 잡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객실에서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가 그를 만나자 여느 때처럼 프랑스 말로 곧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보이하니 배심원이란 직무가 몹시도 괴로운 모양이군요."

"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까지 이 불쾌한 기분에 젖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무슨 일로 그렇게 기분이 상하셨죠?"

"그 까닭은 묻지 말아 주세요." 그는 모자를 찾으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걸 기억하고 계시죠? 그래서 항상 우리들 앞에서 가혹하도록 진실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왜 말씀하시길 꺼리시지요? 생각나지, 미시?"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는 때마침 객실로 들어온 미시에게 말을 건넸다.

"그야 그 때는 농담이었으니까요." 네플류도프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농담이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서 우린 너무나 추악하기 때문에... 아니, 나라는 인간이 진실을 말할 수가 없도록 그렇게 추악하다는 거죠."

"변명은 그만두세요. 그보다 어째서 우리들이 그토록 추악한지, 그 말씀이나 해보세요."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는 네플류도프의 심각한 표정을 모른 체하고 조롱하듯 말했다.

"아녜요. 나 자신이 불쾌함을 자인하는 만큼 거북한 일은 없어요." 하고 미시는 말했다.

"난 그런 것을 절대로 자인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늘 즐거울 수 있지요. 자아, 제 방으로 가세요. 우리들이 정성껏 당신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 드릴께요."

네플류도프는 마치 말에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기 위해 쓰다듬어 줄 때 그 말이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은 유별나게 다른 때보다 더욱 마차를 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젠 돌아가야겠다고 사과하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미시는 그 전보다 더욱 오랫동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당신한테 중대한 일은 당신의 친한 친구한테도 중대하는 걸 잊지 마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일 와 주시겠어요?"

"글쎄요, 어떻게 될지."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으나 자신에게 대해선지 아니면 그녀에게 대해선지도 모르는 부끄러움이 느껴져 얼굴을 붉히면서 허둥지둥 나와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무래도 수상한데요." 네플류도프가 나가자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가 말했다. "내가 꼭 알아내고야 말겠어요. 어쩌면 자존심이 얽힌 애정 문제일지도 몰라요. 우리 미챠(네플류도프의 이름. 드미트리의 애칭)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니까요."

'애정 문제라 해도 틀림없이 지저분한 일일 거야.'라고 미시는 말하고 싶었으나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는 네플류도프를 보고 있을 때와는 딴판으로 마치 불이 꺼진 듯한 맥빠진 표정을 하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더러운 말을 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에게는 말하지 않고 다만 "누구나 기분이 나쁜 날도 있고 좋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요."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분도 나를 속이나?'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되었으면서도, 그렇다면 그분 역시 너무하신 거야.'

'이렇게까지 되었다면서도'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것인지 설명하라고 한다면 미시 자신도 뭐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가 그녀의 마음속에 희망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장래를 거의 약속할 정도였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한 말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단지 눈짓, 미소, 암시 등의 무언의 말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잃는다는 것은 더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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