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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플류도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카추샤의 특사 서류가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청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러나 아직 서류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여관으로 다시 돌아와서 우선 이에 관한 편지를 셀레닌과 변호사에게 급히 보냈다. 편지를 다 쓰고 난 뒤 시계를 보았다. 벌써 장군 댁의 만찬에 참석할 시간이 되었다.
장군 댁으로 가는 도중 그는 카추샤가 특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여자의 이주 유형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변화가 생각났다. 또한 그녀의 과거도 생각났다.
'아니야, 그런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잊어버려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그는 급히 그녀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테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장군에게 이야기할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군 댁의 만찬은 네플류도프에겐 별로 색다른 것이 없는 부호나 고관들이 늘 하는 일상 생활의 사치스러운 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사치는 고사하고 일상 생활의 편의마저도 궁했던 터라 그에게는 각별히 유쾌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장군 부인은 니콜라이 1세의 궁녀로도 있었던 페테르부르크의 고풍스런 귀부인으로 프랑스어는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했으나, 러시아어는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지나칠 만큼 자세를 꼿꼿이 하고 앉아서, 손을 움직일 때에도 팔꿈치를 허리에서 떼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조용하고 조금 수심 띤 존경의 태도로 대했지만 손님들에게는 사람에 따라 조그만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특히 네플류도프에게는 마치 가족을 대하는 것같이 극진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새삼스레 자기의 가치를 인식하고 유쾌한 만족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녀는 네플류도프가 이런 시베리아 벽지에까지 찾아온 것이 좀 파격적이긴 하였지만 그 진실한 성품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특이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게 하였다.
이런 세심한 친절과 장군 댁의 우아하고 사치스런 분위기 때문에 네플류도프는 이 환경과 맛있는 음식, 자기와 같은 계층의 친숙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즐거움과, 긴장이 풀리면서 생기는 충족감에 흠뻑 젖어들었다. 흡사 최근 몇 개월 동안 자기가 처한 환경과 자기를 둘러싼 그러한 생활 속에서 줄곧 살아 온 것이 모두 꿈만 같고, 지금에야 겨우 그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만찬에는 장군의 딸과 사위, 부관 등 가족들 외에 예의 그 영국인과 금광 주인인 상인, 그리고 시베리아의 먼 도시에서 온 지사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네플류도프에게는 이 사람들이 모두 다 유쾌하게만 보였다.
영국인은 건강하고 혈색이 좋은 사람으로, 프랑스어는 아주 서툴렀지만 영어는 뛰어나게 능통해서 웅변가처럼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견문이 무척 넓어서 미국, 인도, 일본, 시베리아 등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하였다.
젊은 금광 주인인 상인은 농민의 아들이었지만, 런던에서 맞췄다는 연미복에 다이아몬드 커프스를 달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서재를 가지고 있었고 자선 사업에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유럽적인 자유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청년에게서 건강한 농민 기질의 어린 나무에다 유럽 문화를 접분한 것 같은 전혀 새롭고 우수한 문화인의 유형을 보는 것 같아서 네플류도프는 그에게 흥미와 호감이 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시베리아의 소도시에서 온 지사는 네플류도프가 페테르부르크에 있었을 때에 많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 국장이었다. 숱이 엉성한 곱슬머리에 상냥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를 지닌 뚱뚱한 사내로, 하반신이 무척 뚱뚱하고 정성껏 다듬은 흰 손에 반지를 몇 개나 끼고 있었는데 웃는 얼굴이 무척 보기 좋았다. 이 지사는 부정이 만연되어 있는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로 이 댁 주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또한 음악을 아주 좋아해 우수한 피아니스트였던 장군 부인도 지사가 훌륭한 음악가이며 자기와 합주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를 존경하였다. 네플류도프의 기분은 매우 유쾌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람까지도 지금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쾌활하고 정력적이며 파르스름한 턱을 지닌 부관은 무슨 일에나 봉사 정신을 발휘한다는 그 선량함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네플류도프에게 호감이 간 사람은 장군의 딸과 사위인 사랑스러운 젊은 한 쌍이었다. 이 장군의 딸은 예쁘지는 않았지만 순진하고 젊은 여성으로 두 어린애한테 온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 그녀가 부모와의 오랜 싸움을 한 끝에 연애 결혼을 했다는 그 남편은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한 겸손하고 머리가 영리한 자유주의자로서 관청에 근무하면서 한편으로 통계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토착 종족의 연구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멸족으로부터 구출하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모두 다 네플류도프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새롭고 흥미있는 사람으로 그와의 합석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군복을 입고 백십자 훈장을 달고 식탁에 나온 장군은 흡사 오랜 벗을 대하는 것처럼 네플류도프와 인사를 나누고 곧 손님들을 자쿠스카와 보드카가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오늘 아침 자기 집을 나간 뒤에 무슨 일을 했느냐는 장군의 물음에, 네플류도프는 우체국으로 가서 아침에 말했던 사람이 특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대답하고 또 한번 감옥 방문을 허가해 달라고 말했다.
장군은 만찬 식탁에서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얼굴을 찌뿌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드카를 드시겠어요?"하고 그는 프랑스어로 식탁에 다가온 영국인에게 물었다. 영국인은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오늘은 교회와 공장을 견학했는데, 이번에는 큰 이동 감옥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 마침 잘됐군요!"하고 장군이 네플류도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가도록 하시지요. 통행 허가증을 두 분께 내드리도록 하게." 그는 부관에게 말했다.
"당신은 언제 가시렵니까?" 네플류도프가 영국인에게 물었다.
"저는 오늘 밤에 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들 모여 있을 것이며, 사전에 준비도 못할 것이고, 있는 그대로를 불 수 있겠죠." 영국인이 대답했다.
"옳아, 최고의 장면을 보시겠다는 거군요! 보시도록 해드리죠. 꼭 보시도록! 감옥 개선에 대해 글도 많이 썼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외국의 신문에서라도 알아보라고 해야겠어요." 장군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부인이 손님들의 자리를 정하고 있는 만찬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네플류도프는 장군 부인과 영국인의 사이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장군의 딸과 전직 모 국장이 앉아 있었다. 식사하는 동안 영국인은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장군은 프랑스의 통킹 원정을 이야기하며 신랄하게 비평하기도 하면서 이따금 시베리아의 부패상과 뇌물에 관한 이야기도 화제로 등장시켰다. 네플류도프에게는 모두 별로 흥미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응접실로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영국인과 장군 부인을 상대하여 글래드스턴에 대한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서 네플류도프는 상대편의 주목을 받을 만큼 현명한 말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훌륭한 식사와 술 다음에 커피를 마시며 푹신한 안락 의자에 몸을 파묻고 친절하며 교양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노라니까 네플류도프는 점점 더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특히 영국인의 희망에 의해 장군 부인이 전직 모 국장과 피아노 앞에 같이 앉아 충분히 연습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을 연주했을 때 네플류도프는 오랫동안 맛 볼 수 없었던 완전한 정신적 만족을 맛볼 수 있었다. 흡사 지금에야 비로소 자기가 참으로 가치 있는 인간인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피아노도 훌륭했지만 교향곡 연주도 아주 좋았다. 이 교향곡을 잘 알고 있고 또 좋아하는 네플류도프에게는 적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안단테를 듣고 있는 동안에 그는 자신에 대한, 그리고 모든 자기의 선행에 대한 감동으로 말미암아 콧등이 찡해 옴을 느꼈다.
오랜만에 자기에게 즐거움을 맛보여 준 장군 부인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하고 네플류도프가 작별 인사를 하려 했을 때, 장군의 딸이 용기를 낸 듯한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와서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들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 애들을 한번 봐주시겠어요?"
"아니, 애는 아무라도 아이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줄 아는가봐."하고 장군 부인이 귀여운 억지를 부리는 듯싶은 딸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공작님은 아이들 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으셔."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는 흘러넘칠 듯 행복스러운 모성애에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어서 보여 주십시오."
"어린애를 보이려고 공작님을 끌고 가는군." 장군이 카드용 테이블에서 사위, 금광 주인, 부관과 함께 앉아 웃으면서 소리쳤다.
"그럼 어서 보여드려야지."
이 젊은 어머니는 지금 자기 어린애들을 보이고 나면 어떠한 평을 받게 될까 하는 생각에 흥분하여 네플류도프의 앞에 서서 빠른 걸음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벽지를 바르고 천장이 높은 네 번째 방에는 검은 갓을 씌운 조그만 램프가 방을 밝히고 있었고 귀엽고 작은 침대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침대 사이에는 흰 숄을 두르고 시베리아 특유의 광대뼈가 튀어나온 선량해 보이는 유모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다. 애들 어머니는 첫째 침대 위로 허리를 굽혔다. 그 침대에는 곱슬곱슬한 긴 머리카락을 베개에 흐트러뜨린 두 살 정도의 계집애가 조그만 입을 벌린 채 곤하게 자고 있었다.
"얘가 카차랍니다."하고 어머니가 푸른 줄무늬가 쳐진 이불 사이로 드러난 조그맣고 하얀 발꿈치를 덮어 주면서 말했다.
"예쁘지요? 이제 겨우 두 살이에요."
"참 귀엽군요!"
"그리고 얘가 바슈크에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부르시죠. 누굴 닮았는진 모르겠어요. 진짜 시베리아인이죠, 안 그래요?"
"정말 귀엽게 생겼군요." 네플류도프는 엎드려 잠든, 토실토실한 사내애를 보려고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정말 그래요?"하고 애어머니는 여러 가지 의미가 섞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쇠사슬과 박박 깎인 머리, 구타, 타락, 그리고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크르일리조프와 카추샤 -그녀의 모든 과거와 함께- 가 떠올랐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별안간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자신도 이렇게 고상하고 순결하게 보이는 행복이 그리워졌다.
몇 번이나 어린애들을 칭찬해 주어 그 찬사를 간절히 황홀하게 듣고 있는 어머니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 준 다음,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뒤를 따라 영국인이 아까 약속한 감옥에 함께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 장군과 그의 딸 부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네플류도프는 영국인과 함께 장군 댁의 현관 계단으로 나왔다.
날씨는 변하여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어느 틈에 길도, 지붕도, 정원의 나무들도, 마차 대기소도, 마차 지붕도, 말잔등도, 모든 것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영국인은 자기 마차가 있었으므로 네플류도프는 그 마부에게 감옥으로 향하도록 일러 주고 자기의 마차에 올랐다. 그는 언짢은 일을 해야만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 삐걱거리는 영국인의 마차 뒤를 따라 달리기가 무척 힘든 소복한 눈길 위로 마차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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