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16 1989. 8. 1 (화)
그제 물장난으로 여태 뻐근한 팔 다리의 쭉지들.
새벽일어난다.
바람부는 소리.
내 방은 너무 덜컹거려서 俊방에 앉는다.
창밖의 뒷산 숲은 온통 춤들을 추어 수런거린다.
기도.
"내가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고 땅에 뿌리를 내리면 어떤 힘에 따라 살아 남게 된다고... 요오시, 살아남자, 그리고 이야깃꾼이 되는거다." -이정항-
15517 1989. 8. 2 (수)
또하나의 태풍 12호가 북상중이라는데, 휴가가 끝난 현장은 또 떠들석.
상여금 감봉을 월차휴가 사용으로 대치시킨다는 문제로 급기야는 태업의 양상을 띈다.
경영진의 용렬함이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몇 푼 아끼려는건지, 태업을 부추기는건지.
15518 1989. 8. 3 (목)
근로자는 오전까지는 작업거부 양상을 띄더니 오후들어 푼다.
바람 몹시 불다. 간혹 빗발도 듣고.
英이 방에서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얘기.
나같은 어른짜리로서는 객적은 얘기의 내용일지 몰라도 이런 대화는 참 가치있는 것이다.
나 또한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얘기가 즐겁기 짝이 없다.
15520 1989. 8. 5 (토)
어제 SB-359 진수.
현장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있는 자의 배짱과 없는자의 헛깡다구.
피곤한 것은 이쪽 저쪽 눈치보기에 도통한 관리자란 부류들.
잠 설치다.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야 하는데, 하며 맴돌다 맴돌다 결국 들어가지 못하는 오줌마려운 초조감에 뒤척이는 꿈.
오른 손의 새끼손가락과 팔목의 통증은 잦아질줄 모른다.
어제의 긴시간 타이핑 작업에 더욱 무리가 간 듯.
英이와 俊이는 교회에서 7일날 언양의 기도원으로 수련회간다고.
고마운 일. 아이들의 어린 영혼에 예수님의 은총이 가득한 기회이기를.
토요일인데.
드로우잉 아카데미의 초상화 숙제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일찍 돌아와서 그릴 생각은 아니하고 술마실 생각만 하는...
15521 1989. 8. 6 (일)
어제 10여년만에 탁구 친다.
이 여름철 땀 뻘뻘 흘리며 하는 운동도 이열치열의 피서가 됨직도 하다.
김사장과 어울려 늦도록 술집 순례.
까페, 가라오께, 나이트....
결국 3시 넘어 집에 들어오다.
깨어난 일요일 아침은 어느새 10시가 넘어있다.
목욕하여 정신을 추스리다.
아이들 이미 교회에 가버리고, 오늘 그다지 찌푸리지 않은 J만 오두마니,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조그만치도 욕정의 기미는 보이지 아니하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사십이 넘어 이제서야 시의 오의를 알듯도 하는 늦둥이.
삶의 켜는, 그 나이테는 향기로운 술이 되는가.
15522 1989. 8. 7 (월)
어제 일요일에도 결국 그림숙제는 손도 못대고 만다.
종일 낮잠과 아이들과의 노닥거림.
깨어난 월요일 아침은 잔득 구름 낀 우중충한 날씨.
오늘 아이들 3박4일 수련회 떠날 것이고,
내일은 어머니 생신, 아, 어느새 일흔번째이다.
15523 1989. 8. 8 (화)
회사는 갈수록 자심한 스트레스를 퍼붓는다.
어제 아이들 떠나다.
두 녀석 없으니 넓지도 않은 집안이 정말 휑하다.
J는 어머니 생신의 음식 장만에 부산한데, 이런 J는 너무나 고마웁다.
새벽.
英이 방에서 시편 119.
잔잔한 감동,
기도.
15524 1989. 8. 9 (수)
어제 어머니 생신.
J가 생신상 차려, 점심때 어머니,형, 彦이, 哲이 오다.
오지 않는 형수.
그리고 둘러앉은 음식상에서 축 처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형과 그 눈치 속에서 태연하게 작은 아들네를 훼하는듯한 어머니의 포즈는 슬프다.
건강할수 없는가.
즐겁고 즐거워 덕담들이 오가고, 정다운 웃음들이 어우러지는 어머니 생신.
우리네 가족이라는 족속들은 도무지 건강하지 아니하다!
그러나 어머니, 만수무강하시라.
15525 1989. 8. 10 (목)
늦더위 기승.
현장은 땀 흘리는 도가니.
가죽 옷을 걸치고 탱크 속에서 용접봉을 녹여대는 그들.
전접반 최학조의 작업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에게서 어떤 숭고함까지도 느낀다.
얼마나 건강한가.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인가.
英이 俊이는 잘들 지내는지.
특히 俊이녀석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밥먹는 속도 느린 녀석이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지.
마루에 돛자리깔고 잔다.
딱딱한 바닥의 침구가 편한 잠 이루게 하였는지, 간밤에는 잘 잤다.
J는 깊은 새벽잠 빠져 있는데 아마 막내 녀석의 꿈에 잠겨 있을 듯.
오늘 퇴근하여 돌아오면 내 새끼들이 와 있을 것이다.
15526 1989. 8. 11 (금)
어제 아이들 돌아오다.
조잘대는 얘기 얘기꺼리들.
12시 넘어 취침, 4시30분 기상. 그리고 강론 설교의 연속, 때로는 철야기도.
英이와 俊이의 제일 첫 번째 기도 주제는 제 어미의 교회출석이었다고, 그 얘기를 듣는 J는 그저 빙긋 웃고만 있는데.
아이들, 고마운 하나님.
俊이 녀석은 사흘동안 똥을 누지 않았다는데 녀석의 표정은 그토록 밝다.
아이들 잠들고 英의 손 모두어 잡고 기도드린다.
15527 1989. 8. 12 (토)
연일 늦더위.
J, 어제 혼자서 방마다 방바닥에 니스칠 하다.
그 수고하였음이 대견하구나.
마루에 네식구 얼기설기 섞여 자다.
다소 늦은 새벽 기상.
요한복음 끝부분. 기도.
나의 주님.
나의 가정은 무언가 조그씩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 예전의 내 거친 감정밭, 절제치 못하는 감정의 표출방법도 요즘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
J의 변화도 눈부신바 있고, 특히 아이들.. 그 고마움, 크리스찬의 향기.
이 고마움을 느끼는 반지빠른 나의 눈치는 주님이 주신 지혜.
15528 1989. 8. 13 (일)
어제는 아마도 올여름의 크라이막스.
정말 지독하게 뜨거운 현장이었다.
그러나 토요일이라는 심리적 가벼움이 그것을 견디도록 하여 준다.
퇴근 길, J를 불러내 파마하는 동안 미장원 함께 앉아있게 한다.
그제 밤.
마루에서 네식구 자던 날.
나는 소주 한병 마시고 되우 코를 골아재꼈던 모양인데, 학원에서 돌아온 英이에게 J는 "아빠 코고는 소리 때문에 오늘밤 편하게 자기는 다 글렀다" 하니까 英이가 "엄마, 예수믿는 사람의 기도에는 권능이 있는거야" 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 우리 아빠 코 골지 않게 해주세요" 어쩌고 하면서 기도를 하였단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 진동하던 코고는 소리가 뚝 그치더란다. 그리고 J와 아이들 잠들때까지도 전혀 코를 골지 않더란다.
아마, 그날은 밤새 코 골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신기하였다는데, 나 또한 듣고보니 신기하다.
바람소리처럼 수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인 새벽4시.
앗, 비다. 거침없이 시원스레 쏟아지는 빗줄기. 새벽의 어둔 하늘을 수억의 사선으로 가르며 비가 쏟아져 내린다.
얼마나 시원한 비인지.
그 시원함이 이토록 반가우나, 한편 오늘 현장의 특명 작업사항이 걱정되지 않는바도 아니다.
15529 1989. 8. 14 (월)
어제도 역시 찌는듯한 더위, 아침에 그토록 시원스레 내리던 비는 10시경 그치더니, 습기를 머금은 폭염이 창궐한다.
일요일의 회사. 그곳에서는 독서도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과 선불교' 반쯤 읽는다.
일관하여 흐르는 에리히 프롬의 사상체계.
그의 신경증으로서의 종교감정 해석은 지독한 독신일텐데 곧장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도 그의 논리적으로 일관된 사상체계 때문일 것이다.
오토의 '종교철학'에서의 누미노제 개념과는 어떻게 상치되는 것인지 파악하고 싶다.
일요일 오후 집에 돌아와 조용필 노래 들으며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소주와 함께 여유작작함을 즐긴다.
옛날공책 속에서 그때 썼던, 낙서인지 희곡인지 요령부득의 글을 발견한다.
환토: 거기에는 외치는 소리가 있었거든. 그 소리는 커다란 종소리같았지. 그 소리가 내 영혼에 닿았을 때 핵분열을 일으켜 내 영혼을 그만 산산조각내고 말았지.
초칸: 깨달은 거로구나.
환토: 그래, 깨달을 각.
초칸: 그 곳에서는 수천만마리 지렁이들이 엉켜서 꿈틀댄다며? 그리고 끓어오르는 구더기떼들의 대가리들이 수억의 구멍에서 빠끔빠끔 구역질을 뿜어댄다면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짓이겨 뭉개버릴 커다란 로라를 마련해 준다면서?
환토: 그 뿐이 아니야.
아마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아류일터인데 환토와 초칸이라는 이름은 또 무엇인지.
15530 1989. 8. 15 (화)
선선한 바람이 있어 늦더위는 한풀 꺾이다.
광복절, 모처럼 현장 나가지 않는 날.
낮잠도 자고, TV영화 'U BOAT'도 보다.
독일영화, 잠수함이라는 폐쇄공간의 심리적인 드라마.
감상중 돌연 화면에 자막으로 나타나는 긴급 뉴스.
임수경 판문점 통과.
그 예쁘고 여리게 생긴 소녀는 이제 어찌 되는건가.
그 여림을 파괴하는 이념을 향한 확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를 이토록 확고하게 만든 것은 남인가, 북인가.
그녀 부모의 지금 마음은 어떨른지.
몹시 바람이 불고 먼 바다에는 백파가 인다.
15531 1989. 8. 16 (수)
어머니와 형, 그리고 많은 관광객과 함께 평양에 갔다. 만나보기를 어색해하는 형을 놔두고 어머니와 나는 한적한 평양 시내 어느 아파트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현관에서 우리 모자를 맞이하는 젊은 여인, 그 뒤로 아버지가 나타난다. 생각보다 무척 키가 크시고, 안경이 번득이는 창백한 지성인 타잎인데 의외로 젊으시다. 큰 절드리고 부여잡고 좀 울다. 그 옆에 담담하고 의연한 자세로 앉아계신 어머니. 아버지는 소설가이신데 그것도 추리소설가셨다. 아버지의 저서, 문고판의 추리소설을 한권 주신다. 갖난 아기 하나는 잠들어 있고, 俊이 또래의 또 한 아이. 이복동생들인가.
아버지 집을 나와 걷는 평양거리, 한적하고 깨끗한 골목길에는 아름다운 햇살이 가득하다.
간 밤의 꿈, 아버지에 대하여 이토록 상세한 이미지의 꿈을 꾼 것은 처음이다.
아마도 임수경의 탓인 모양인데, 꿈이 깬후에 한참동안을 그대로 누워있다.
아버지, 사모치게 가엾은 내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와 이별하고 돌아나오는 평양의 어느 길목에서 어머니가 내게 했던 한마디 말이 연이어 떠오른다. "나만큼이나 네 아버지도 야비하지." 무슨 뜻인지.
15532 1989. 8. 17 (목)
방금 나의 생존한 날 15531일째가 지나고 15532일째를 맞았다. 술 취하여 돌아 와 씻고 앉은 내 책상 앞의 시각은 12시 30분.
익숙한 손님이여. 오랜 만일세. 2년여전 떠났다가 다시 나를 방문한 반가운 손님. 그대가 나를 다시 찾으리라는 것은 요근래 그대의 잦은 공갈로 진작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 정장을 갖추고 정식으로 나를 찾아온 그대를 나는 맞을 차비가 되어있지 아니한가. 이것을 양해해주기 바라네. 오늘 조선소의 일과중, 끊임없는 수수께끼와 괴롭힘이 있었는데, 나의 엘도라도 인듯한 그 평양거리는 어째서 그토록 깨끗하고 적막하였는지, 아버지의 재취인듯한 그 여인은 왜 그렇게 미인이고 단정하였는지, 아버지는 왜 그렇게 키가 컸던지.. 나는 도무지 어제의 꿈을, 내 심리의 공식에 대입시킬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네. 나는 이제 내 아버지를 생각해 낸 것인가, 나는 이제 내 아버지를 만질수 있다는겐가. 나는 이제 내 아버지를 사랑할수 있다는겐가. 내게도 나를 향하여 씽긋 웃어주는 한 사나이를 가져도 좋다는 겐가.
불면의 영이여. 네가 원하는바 그것이 바로 이것이냐. 나를 칼날처럼 만들어 어찌 하려느냐. 마누라의 그 굵직굵직한 신경밭을 낫질하려느냐. 어머니의 그 여생의 불쌍한 몸짓을 헤딩하려느냐. 누구의 그 부운 볼퉁이를 쥐어박으려느냐. 그래, 너는 어찌 하려느냐. 불면의 영아, 네게 이름을 붙여주마. 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재료들이 갖추어져야 할터인데, 그중의 하나는 아버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다.
예수님, 예수님. 술이여, 술이여. 잠이여, 잠이여.
술취함의 밤. 나는 잠들 수 없거니와, 나를 감동케하는 아름다움은 내 곁에 존재하지 않거니와. 그렇다. 나는 잠들 수 있거니와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거니와.
개에게는 불면이라는 이름의 병이 없다. 나는 개새끼만큼의 건강성도 갖지 못하고 있은 것이다. 상헌아. 그대는 이 병을 네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가. 그것은 허영이고 갈등의 시험장인가. 혹은 네 괴로움의 결정체인가.
폼잡지 말라. 상헌아. 너는, 너의 무의식은 몸부림을 치고있은 것인데도, 너는 진지하게 그것을 이해할 생각은 않은채 술이나 처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거기에 내포된 네 죽음이 이토록 명약관화한데도 짐짓 모른척 하면서 술이나 퍼마시는 그대.
마비. 그것은 술. 내 아내, 내 자식들.
15534 1989. 8. 19 (토)
그제 8월 17일은 J의 마흔세번째 생일.
J가 나와 S형 어머니등으로 부터 받은 선물.
'성자가 된 청소부' '젊은 날의 초상' '물소리 바람소리' '무소유' 그리고 나의 금일봉.
이제 여름제국은 몰락하고 있다.
그러나 회사는 거친 분위기, 직선적인 언어의 폭력.
15535 1989. 8. 20 (일)
어제밤, 홀로 내 방 책상 앞에 앉아서 고량주를 두병이나 비워버렸다. 이문열의 소설 읽으면서.
취한채 마루로 나와 아이들과 '조스 3편'이라는 삼류 공포영화 본답시고 앉았다가 고대로 쓰러져 잠이 들다.
"너에게 돈이 있는가를 묻지말고 술마실 의사가 있는가를 물어보라"
"나는 술의 유혹 이외에 모든 것에 저항할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는 이 말은 내게 아주 딱 드러맞는 비유이다.
일요일, 작은 처남부부와 S기 놀러왔다.
15536 1989. 8. 21 (월)
끈적거리는 무더위 끝에, 퇴근 무렵 큰 비 내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웃의 변압기가 터지는 굉음에 혼비백산. 무슨 폭탄 터지는 소리.
모든 잔업 중단시키고 비에 젖어 돌아오다.
캄캄한 천지는 번개의 찰나적인 섬광에 순간적으로 몸을 드러냇다가는 이내 어둠에 잠긴다. 하늘의 신음처럼 우르릉 우르릉 우는 천둥소리.
마음은 안정되지 않고, 어떤 악한 영이 깃든것만 같은 정신.
눈물의 기도.
주님의 평강이 이 육체를, 불면의 정신을 지배하여 주옵소서.
15537 1989. 8. 22 (화)
술마시지 않은 날의 숙면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나.
술이나 약물에 의존하는 잠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데.
불면의 영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주는 그 빛의 세계에서 멀리 떠나 있다.
진정 사무친 그리움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형해화된 도그마의 헛소리.
애통하는 심령이 아니라, 불만과 원통함과 억울함의 심령으로 투덜거리는 기도.
바리새인의 외식으로 너울 쓴 위선자.
불면의 영이여.
불면을 일으키는 너 사탄의 심리 속 동인이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15539 1989. 8. 24 (목)
어제 차장으로 승진.
타부서로의 전보는 없다. 그저 조선부 차장일 뿐이다.
고래심줄같은 과장 8년. 이제야 승진이라는 걸 하였으나 그다지 기쁘지는 않구나.
현장을 벗어나는 보직이 주어젔다면 정말 기뻤을텐데.
아침 바람 속에 숨어있는 가을 냄새, 나는 맡는다.
계절은 감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계절과 사건이 날줄과 씨줄로 마주칠 때 그 인간은 특정한 감성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15543 1989. 8. 28 (월)
여태 8월에서 맴돌고 있다.
정말 무덥고도 긴 여름의 터널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여름도 지나고 승진이라는것도 하였으니 무언가 창조의 빛이 있을법하지 않은가.
창조의 삶, 동기부여가 가득한 삶.
월요일 아침, 더위는 여전히 끈적끈적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다.
15544 1989. 8. 29 (화)
여름의 종장은 어디 쯤이려는지.
오늘 역시 아침의 태양은 뜨겁다.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절정은 아름다우나 쇠잔해가는 생명의 마지막 발악은 흉하다.
나는 잔서의 더위가 싫다.
간밤의 꿈.
술을 먹지 않은 밤의 회색수면, 고립된 소외감, 이유없는 배처그 군거적 순종의 원리를 타파함.
그런 것은 무한한 자유로움과 미망을 끊는 결단이어야 하는데, 그토록 분하고 서러웠던 까닭은, 자유에서의 도피이며, 그야말로 군거적 순종의 원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내 영혼의 가엾음일 것이다.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젊은 시절의 열병, 젊음의 고뇌.
나의 젊음을 회상해보면 내 젊음은 얼마나 유치하였던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던지.
얼마나 어리석고 치기만만한 환상속의 거짓이었던지.
그 시절 나의 치열하였음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고, 나의 고뇌는 일종의 자기연민이었고, 나의 도취는 완전한 사기꾼의 속임수였다.
이 소설에서 문학적 완성도나 디테일의 어설픔이 곳곳에 노정되어 잇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나를 감동케하는 것은 진지하게 고뇌하는 젊음의 모습이 그려저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의 기도.
이것 하나라도 이 가정의 전통이 되고, 이 기도가 그 날의 지배자가 되어라.
15545 1989. 8. 30 (수)
어제 SB-355 Derrick System Load Test.
SB-364, SB-360 의 공정 작성하다.
퇴근 무렵 갑자기 쏟아지는 비.
집에 도착하자 전깃불마저 나가버린다. 근처 변압기가 누전된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대낮의 분진들을 떨어내고, 촛불 켜 앉아 소주.
편한 잠 이루었으나 혓바늘 창궐.
비는 거짓말처럼 개이고.
바바 하리다스 '성자가 된 청소부'
무슨 영성개발을 표방한 동화의 얘기들인데, 이런 진부한 책들이 요즘 베스트셀러이다.
"어쩌다 밖에 나가 며칠만에 돌아오면 나를 보자마자 산의 까투리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애들 먹이부터 뿌려주어야 한다" -법정-
스님의 세계, 절깐, 물소리 바람소리.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하여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
철저한 실존의 자각, 그리고 여유와 자연과... 범신론의 세계.
기독교로 옷입지 않은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