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왕동이가 길두령이라고 부른 사람은 길막봉이다. 막봉이가 고개 밑에 내
려와서 봉학이에게 인사하고 나서 한옆에 모아 앉힌 발가벗은 사람들을 가리키
며 “저것들을 왜 죽여버리지 않았소?”하고 황천왕동이더러 물으니 천왕동이는
이봉학이를 한번 흘낏 돌아보고 “죽이면 좋겠는데 죽이지 말라네그려.” 하고
길막봉이의 말을 대답하였다. “저것들을 놔준대두 우리들 가기 전에 놔주지 못
하우.” “그러니 어떻게 처치했으면 좋겠나?” “글쎄.” 하고 길막봉이가 고개
를 비틀고 생각하다가 채수염 난 자를 바라보며 “상갑이, 이리 좀 오게.” 하고
불렀다. 길막봉이가 상갑이란 자를 데리고 잡아 앉힌 사람 처치할 도리를 의논
하는 중에 이봉학이는 황천왕동이를 불러가지고 어찌된 사단인 것을 물었다. “
내가 정신이 얼떨떨해서 모르겠네. 속시원하게 이야기 좀 하게.” “저것들을 다
처치해 놓구 이야기 합시다.” “대체 이 일을 형님이 시켰겠지?” “그렇소.”
“형님은 지금 어디있나?” “여기 오지 않았소.” 이봉학이가 또 말을 물으려
할 즈음에 길막봉이가 황천왕동이를 오라고 불러서 황천왕동이는 길막봉이 옆으
로 가고 이봉학이는 계향이의 승교바탕 앞으로 왔다. 계향이가 포대기로 폭 싼
간난애를 꼭 끌어안고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봉학이가 가까이 왔을 때 얼굴을 조
금 치어들고 나직한 목소리로 “화적들이 우리를 구해 주러 왔지요?” 하고 물
으니 이봉학이는 입맛 쓴 모양으로 “우리를 구해 주러 왔는지 죽을 골루 몰아
넣으러 왔는지 나는 모르겠네.”
하고 대답하였다. “서울 가면 일이 어떻게 될까요? 덧거치지 않을까요?” “어
찌 덧거치지 않겠나. 잘못하면 죽기 쉽지. 그 핏덩이가 아마 나의 한세상 난 표
적이 될까베.” “중로에 적변당한 것이 죄될 것도 없겠지만 죄가 된다고 하더
래도 포도부장이나 금부도사에게 죄가 될망정 나리께 죄될 까닭이 무어요?” “
적변이 나 땜에 난 적변이니까 화적들의 죄까지 내가 홈빡 뒤집어쓰게 될 것일
세.” “그러면 화적들 따라 적굴루 가실지언정 서울은 가실 생각 마시오.” “
죽은 정승이 산 강아지만 못하다니 도둑놈이 되더라두 살아놓구 보잔 말인가?”
하고 이봉학이는 서글픈 웃음을 웃었다. 채수염 난 자가 여러 졸개 도적들을 데
리고 잡아 앉힌 군사들을 마저 옷 벗기고 상투 풀어 맞잡아 매는 동안에 고개
위에서 새로 둘이 내려오는데 채수염이 치어다보며 “여게 판돌이, 자네 부자는
고개 위에서 이때까지 무엇했나. 어서 빨리 내려오게.” 하고 소리쳤다. 둘이 고
개 밑으로 내려온 뒤에 채수염이 그중의 나이 먹은 탑삭부리와 몇 마디 이야기
하고 곧 졸개 도적들을 시켜 잡아 앉힌 사람을 모조리 잡아 일으켜세웠다. 이봉
학이는 이것을 보고 죽이려는 줄로 알고 황천왕동이를 와서 붙들고 “그에 다
죽일 작정인가?” 하고 시비하니 황천왕동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럼
왜 잡아 일으켜세우나?” “여기다 그대루 두구 가면 벌거벗구 십 리 이십 리를
가서 고발할른지 모르니까 숲속 나무에 동여매 놓구 가기로 했소.” 이때 이봉
학이의 하인이 큰소리로 나리 나리 하고 불렀다. “내 하인은 왜 동여매나?”
“저 나리 찾는 것이 하인이오? 곧 빼노라겠소.” 황천왕동이가 가서 말하여 이
봉학이의 하인은 빠지고 도사와 나장과 나졸과 포도군사들은 모두 숲속으로 끌
려갔다.
해 진 지가 오래라 어둔 빛이 짙어져서 네댓 간 밖에 사람이 어렴풋이 보이게
되었다. 숲으로 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만 들리고 형용은 보이지 아니할 때 뒤
에 남은 황천왕동이는 이봉학이와 같이 길가 풀섶에 주저앉아서 전후 곡절을
이야기하였다.
황천왕동이가 이봉학이를 찾아보던 날 서울로 가지 않고 청석골로 돌아가서 봉
학이의 신변이 위태한데 봉학이의 고집이 앉아 당하려고 하여 불구에 서울로 잡
혀가게 될 것을 일장 이야기하였더니 임꺽정이가 이야기를 듣고 곧 박유복이더
러 “우리 둘이 임진을 나가 보자.” 하고 말하여 박유복이도 “그래 봅시다.”
하고 대답하는데 옆에 있던 서림이가 나서서 “두 분이 가시면 이별장을 꼭 끌
고 오시겠소?” 하고 묻고 재처 “이별장이 만일 끌려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테요?” 하고 물으니 임꺽정이가 “숫제 우리두 같이 잡혀가겠소.” 하고 대답
하였다. “아무리 정분들이 여타 자별하시더래두 같이 잡혀가신다는 건 안될 말
씀이오.” “봉학이가 내 엉걸루 죽게 되지 않구 제 죄루 죽게 되었더라두 우린
가만히 보구 있을 수가 없소.” “그러니 이별장을 구해낼 도리를 생각합시다.”
“무슨 좋은 도리가 있소?” “찬찬히 생각하면 더 좋은 도리두 있겠지만 지금
언뜻 생각나는 걸루 말씀하면 이별장이 서울루 잡혀갈 때 중로에서 뺏어오는 것
두 한 계책이 될 듯하우.” “그렇게 하자면 우리가 미리 중로에 가서 지켜야
하지 않소?” “언제 잡혀갈지 모르구 여러 사람이 미리 가서 지킬 수도 없으니
황두령이 한번 서울까지 가서 자세한 소식을 알아오시면 좋겠소.” “천왕동이
가 갔다오기 전에 잡혀 올라가면 낭패 아니오?” “황두령이 걸음에 내일 하루
면 갔다오실 텐데 오늘까지 별장 노릇 하구 앉았는 사람이 설마 하루 이틀 동안
에 잡혀가게 되겠소” 황천왕동이가 서림의 말을 듣고 고개를 외치며 “일이 속
으루 벌써 잔뜩 곪았으니까 언제 밖으루 터질른지 모르겠소.” 하고 말하여 서
울 길목을 미리 와서 지키려고 지킬 자리를 의논들하게 되어서 혜음령 말이 났
을 때 길막봉이가 앞으로 나앉으며 “ 혜음령을 가서 지키려면 혜음령패를 불러
쓰는 것이 제일 편한데 그 패의 괴수 바눌티 정상갑이와 호랭잇골 최판돌이가
나하구 면분이 있으니 내가 내일 황두령하구 먼저 떠나서 황두령은 서울을 다녀
오구 나는 정상갑이나 최판돌이를 가서 보구 여러분 오시기 전에 그 패를 모아
놓으면 어떻겠소? 황두령이 서울 왕래하는 동안에 만일 이별장이 잡혀올라가게
되면 그건 내가 담당하리다.” 하고 말하니 서림이가 길막봉이의 말을 좋다고
찬동하고 또 임꺽정이와 박유복이에게 서울 소식을 듣고 떠나라고 역권하여 이
튿날 길막봉이와 황천왕동이만 먼저 떠나게 되었었다. 천왕동이가 막봉이를 따
라서 바눌티 정상갑이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밤들도록 술 먹은 탓으로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서울 가서 금부도사가 이날 새벽에 떠난 소식을 듣고 곧 회정하여
청석골로 가는 길에 이봉학이가 묶여오는 것을 보고, 길막봉이에게 알리려고 급
히 바눌티를 와서 보니 정상갑이는 고골 너머 놀미 근처에 퍼져 있는 졸개들을
모으러 가고 최판돌이 부자만 막봉이 옆에 와서 있던 중이라 길막봉이는 먼저
판돌이 부자를 데리고 고개 위로 나가게 하고 황천왕동이는 놀미까지가서 상갑
이 외 십여 명 한 패를 몰고 뒤에 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황천왕동이는 총기 있는 사람이라 말들 한 것까지다 다시 옮겨가며 이야기 하
느라고 숲속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온 뒤에사 이야기가 비로소 끝이 났다. 천왕
동이가 이야기를 마친 뒤에 “인제 우리와 같이 청석골루 갑시다. 오늘 밤에 임
진 서 또 밤배를 탔으면 좋겠는데 탈 수가 있겠소?” 하고 물으니 이봉학이는 “
밤배?” 하고 긴 한숨을 쉬고 나서 “그거야 될 수 있겠지.”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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