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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6권 (25)

카지모도 2023. 4. 10.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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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파수제도가 그 동안 일신하게 작정되어서 사방 산 위에 파수막이 있고 파

수막 하나에 사람이 다섯씩 매어 있는데 다섯 사람 중의 넷은 그저 파수꾼이요

하나는 파수꾼의 패두인데, 파수꾼 넷은 둘씩 짝패를 지어서 한 패가 낮번을 들

면 한 패는 밤번을 들되 낮번과 밤번을 선보름 후보름으로 서로 돌리고, 패두는

번에 빠지는 대신에 낮이고 밤이고 하루 몇 차례씩 올라가서 파수꾼의 잘잘못을

돌보고 그 위에는 사산 파수를 총찰하는 두령이 있어서 파수꾼의 군호를 날마다

정하여 주고 또 파수꾼과 패두의 상벌을 맡아 보았다. 배돌석이가 이태 동안 내

리 사산을 총찰하여 오는 까닭에 파수꾼의 식구들을 거지반 다 알고, 또 파수꾼

의 번차례를 대개 다 짐작하였다. 억석이가 밤번인 것을 짐작 못하고 온 사람이

라도 자꾸 불러서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짐작이 나서련만 배돌석이는 대답 없

는 것을 헤이지 않고 “억석이 억석이?”하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방문까지 두들

겼다.

얼마만에 방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고 다시 한참만에 방문이 부스스 열리며

억석이 딸인 처녀가 내다보며 “파수막에 밤번 들러 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배돌석이가 갑자기 수줍어져서 공연히 입맛을 다시며 “아직도 밤번이든가?”하

고 혼잣말하니 “무슨 급한 일이면 잠깐 불러오리까?”하고 처녀가 물었다. “

파수 선 사람을 불러올 것은 없다" "그러면 새벽에 교대 주고 내려오거든 곧 가

서 보이라고 말하오리까" "급히 물어볼 말이 있는데 네 어른 대신에 네게 물어

봐두 좋으까" "무슨 말씀입니까?" "방에는 누가 있느냐?" "동생아이 하나뿐입니

다" "동생아이는 자느냐?" "자는 모양이올시다" "방에 좀 들어가두 좋겠느냐?" "

잠깐이라두 들어앉으실 데가 못됩니다" "그럼 이리 좀 나오너라”

처녀가 방에서 나온 뒤에 배돌석이는 방문 앞 작은 봉당 끝에 걸터앉아서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놓으며 “여기 와 앉아라”하고 처녀를 돌아보았다. 처

녀가 와서 앉지 않고 “물어보실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묻는 것을 배

돌석이가 노기 있는 음성으로 “와 앉으라거든 얼른 와 앉아라”하고 명령하듯

이 말하여 처녀는 마지못한 모양으로 배돌석이 옆에 와서 쪼그리고 앉았다.

“네가 나이 몇살이야?” 처녀는 대답이 없었다. 배돌석이가 한번 씽긋 웃고

처녀의 손목을 덥석 쥐니 처녀는 깜짝 놀라 뿌리치려고 하였다. 배돌석이가 손

목을 더 단단히 쥐면서 “네가 내게 수청들 맘이 있나 없나 이걸 내가 급히 알

구 싶다”하고 말하니 처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건 내일 아비더러 물어

보십시오”하고 말하였다. 배돌석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네 어른에겐 물어보나

마나 좋다구 할 테지만 네 생각에 어떠냐”하고 처녀의 말을 기다리는 것같이

한동안 있다가 다시 “내게루 같이 가서 이야기 좀 하자”하고 곧 처녀를 일으

켜 세웠다. 억석이의 딸은 양반의 집에서 아이종 노릇할 때 벌써 약을 대로 다

약은 것이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속에 대감이 몇 개 들어앉았는 처녀라, 처음

놀라던 때와 딴판으로 아주 아양스럽게 “나더러 도회청으로 가잔 말씀입니까?

난 가기가 싫은데요”하고 몸을 흔들었다. “딴소리 말구 가자" "안 가면 어쩌실

테요" "네까짓것 하나를 내가 못 끌구 갈 듯하냐" "끌려가면서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쫓아나오겠지요" "소리지르라구 주둥이를 가만히 둘세 말이지" "죽기

한사하고 날뛰면 좀 어려우실걸요" "이애 순순히 가자꾸나. 죽기 한사하면 장할

것이 무엇이냐" "가기 싫은 걸 순순히 가요" "내게루 가기 싫으면 너의 방으로

들어가자. 저 윗방은 무어하는 방이냐" "아비가 집에서 잘 때 저 자는 방이에요"

"너 자는 방이면 불필타구다. 그리루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 방을 좀 치워야겠

으니 손을 놓아주세요”

배돌석이가 줄곧 잡고 있던 처녀의 손목을 놓았다. 처녀가 윗방으로 들어가서

아래윗간 사이문을 열고 두방으로 왔다갔다 하며 부스럭거린 끝에 윗방에 등잔

불을 당겨놓고 기직자리를 깔아놓는데 그 동안 배돌석이는 밖에서 “대강만 치

워라" "불은 킬 것 없다" "고만 들어가랴?”하고 재촉재촉하였다. “자, 들어오십

시오” 배돌석이가 윗방에 들어와서 기직자리에 앉으며 곧 섰는 처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앉을 테니 놓으세요" "내 무릎에 와서 앉아라" "내가 어린앤가

요?" "내게 대면 어린애지 무어냐" "점잖으신 어른께서 왜 어린애를 잠도 못 자

게 하십니까?" "잠 못 자게 하는 게 분하냐?" "단잠을 깨면 누구든지 골나지요"

"네 동생두 잠이 깨었느냐?" "그애는 잠귀가 질겨서 한번 잠이 들면 딩굴려도

안 일어난답니다" "너두 잠귀는 밝지 못한 모양이더라. 내가 부르다 못해서 방문

까지 두들기니까 그제사 겨우 부시럭부시럭 일어나지 않았니" "방문 앞에서 소

리지르는 걸 모르도록 잠귀가 어둡지는 않습니다" "그럼 부르는 소리를 듣구서

두 가만히 누워 있었구나" "몇 번 부르시다가 아비의 대답이 없으면 으레 밤번

인 줄 짐작하고 가시려니 생각했지요" "그러면 나중에는 무슨 선심으루 일어났

니" "총찰두령께서 아비에게 죄책을 내릴까 봐 겁이 나서 일어났지요" "단잠을

깨운 대신 내가 품에 끼구 재워 주마" "자장자장해서 재워주시렵니까?" "얼굴이

덜밉지 않더니 말대답두 역시 밉지 않게 하는구나”

배돌석이가 처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바로 자리에 눕히려고 하니 처녀는 사지

를 떠는 듯 마는 듯 떨었다. “나중에 뫼시구 잘 테니 정당한 말씀이나 좀 해주

세요" "정당한 말이구 실없은 말이구 다 두었다 하자" "그럼 저의 덮개와 벼개

나 가져오겠으니 잠깐만 혼자 누워 기십시오” 처녀가 배돌석이를 목침까지 베

어 주고 아랫간으로 내려갔다. 한동안 부스럭 소리만 나고 처녀는 좀처럼 올라

오지 아니하여 배돌석이가 어서 오라고 몇 번 재촉한 뒤에 처녀가 헌 이불 조각

을 끌어안고 올라오더니 배돌석이 발채에 그린 듯이 서서 앉지 아니하였다. 배

돌석이가 번듯이 누워서 처녀를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리는 중에 처녀가 별안간

배돌석이 배 위에 와서 걸터앉으며 왼손으로 헌 이불 쪼각을 제쳐 버리는데 바

른손에 든 칼날이 드러났다.

배돌석이가 수족을 놀릴 사이도 없이 처녀는 세로 잡은 칼로 곧 배돌석이의

젖가슴을 내려지를 것같이 겨누면서 “꿈쩍만 하면 찌를 테니 그리 아시우”하

고 야무지게 말하였다. 배돌석가 어이가 없어서 도리어 웃으면서 “찌르구 싶거

든 맘대루 찔러라”하고 두 손을 깍지 껴서 이마 위에 얹었다.

“장난으로 생각하시오?" "장난이라면 좀 과하다. 대체 이게 웬 짓이냐?" "당

신의 말을 들어봐서 약차하면 당신 죽이고 나 죽을 작정이오"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이냐?" "당신이 나더러 수청을 들라니 나를 화냥년으로 여기셨소?"

"내가 너더러 언제 화냥년이라구 하더냐" "두령만 사람이 아니오. 졸개도 사람이

고 졸개의 딸도 사람이오. 오장육부가 다 같은 사람이오" "누가 사람이 아니랄세

말이지" "사람인 줄로 알면 어째 사람 대접을 안 하시오?" "무엇이 사람 대접이

아니냐?" "아닌밤중에 남의 집 편발 처녀를 끌어내서 수청들라는 것이 사람 대

접이오?" "임자 없는 편발 처녀니까 말을 건네봤지, 임자 있는 남의 기집같으면

생의나 했겠느냐" "내 몸을 버려놓은 뒤에 나를 어떻게 해주려고 생각했소? 그

걸 좀 분명이 말씀하오" "무얼 어떻게 해주어? 너만 싫다지 않으면 데리구 살려

구 했지" "명색없이 데리구 살려고 생각했소?" "같이 살면 가시버시지 어째 명

색이 없느냐?" "가시버시니 무엇이니 하지 말고 분명히 말씀하오. 나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소, 안해를 삼으려고 생각했소?" "내가 어디 안해가 따루 있을세 첩

을 삼으려구 생각하지" "새로 오신 이두령은 안해가 없어도 기생첩만 데리고 삽

디다" "이두령이 전에는 안해가 있었으니까 첩으로 얻었지만 지금이야 그 첩이

첩이냐 안해지" "나를 안해 삼을 작정이면 우리 아버지보고 통혼을 할 것이지

왜 나를 보고 수청을 들라고 했소?"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먼

저 관계를 맺고 나중 대사를 지내는 일두 세상에 흔치 않으냐" "지금도 나를 안

해로 데리고 사실 생각이 있소?" "생각이 있다뿐이냐" "이렇게 칼부림을 당하고

도 그런 생각이 남아 있소?" "네가 도둑놈 두령의 안해 재목으루 쩍말없다" "정

말이오?" "그럼 정말이지. 네가 설마 네 칼이 무서워서 거짓말하랴" "정말이면

옷고름을 맺읍시다" "나는 옷고름 맺는 법을 모르니 네가 가르쳐라" "이때까지

맹세를 쳐보신 일이 없소?" "맹세야 더러 쳐봤지" "천지신명 앞에 맹세를 치고

맹세 친 표로 내 옷고름에 매듭을 맺어 주시구려" "오냐 그래라. 천지신명 앞에

맹세를 치자면 일어 앉아야지" "누워서라도 정성만 드리시오”돌석이가 누운 채

로 눈을 스르르 감고 “돌석이가 억석이의 딸을 안해로 데려다가 길래 살겠습니

다. 만일 이 말을 저버리면 천지신명께 벌역을 받겠습니다”하고 중얼거린 뒤에

다시 눈을 뜨고 처녀의 옷고름에 매듭을 지었다. 처녀가 그제사 배 위에서 내려

앉으니 돌석이는 일어 앉아서 처녀의 빰을 찰싹 때리며 “네가 고약한 년이다”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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