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석이의 딸을 부르러 간 졸개가 돌아와서 “기집애년을 불러왔소이다”하고
고하여 여러 두령이 밖을 내다보니 추녀 끝에 달린 등롱 불빛에 덜밉지 않은 얼
굴이 드러났다. “그년 곧잘 생겼구나" "참말 똑똑하게 생겼으니까 고런 맹랑스
런 짓을 했구나”하고 몇 두령이 칭찬들 하는 중에 꺽정이가 뜰 아래에 섰는 억
석이의 딸을 내려다보며 “이년, 네 말 듣거라. 배두령께서 어째 네게 실없이 하
셨든지 실없이 하셨으면 순순히 받을 것이지 생심쿠 칼부림을 한단 말이야. 그
런 발칙한 년이 어디 있단 말이냐”하고 호령하였다.
꺽정이의 호령질이 뜻밖의 일이라 배돌석이도 당황하였으니 억석이의 딸은 초
풍함직하건만 고개를 푹 숙이고서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아니하였다. “옷고름에
매듭지은 것을 네 손으루 풀어버려라" "못 풀어버리겠느냐?" "어떻게 할 테냐?
어서 말해라” 꺽정이의 큰소리가 연거푸 난 뒤에 억석이의 딸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배두령께서 맺어 주신 것이니 배두령께서 풀어 주셨면 좋겠습니다”하고
대답하는데 말은 똑똑하게 하나 말소리는 떨려나왔다. 오가가 내다보며 “결자
해지라니 그년의 말이 옳소. 꾸중 고만하우”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고개를 돌이
켜 배돌석이를 바라보며 “겁없는 건 좋지만 눈 적은 건 흉일세”하고 껄껄 웃었다.
꺽정이가 올라오라고 명하여 억석이의 딸이 방 옆 툇마루에 올라섰다. “이리
오너라. 얼굴을 다시 좀 보자”하고 오가가 웃으며 말하니 억석이의 딸은 가리
마가 앞으로 보이도록 얼굴을 옷깃에 파묻었다. “얼굴 들고 내 말 좀 들어라.
내가 너를 수양딸루 정하구 싶은데 네 맘에 어떠냐?" "맘에 싫으냐? 왜 말이 없
느냐?" "아비에게 물어보십시오" "네 아비의 뜻두 물어볼 테지만 우선 네 생각
에 어떠냐?" "제야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내게 수양딸루 올 생각이 없단 말
이냐?" "아니올시다" "당세의 영웅호걸 한 분을 내가 사윗감으루 점찍어 놓구
딸을 구하는 중이다. 네가 내 딸이 되면 그 영웅호걸은 네 차지가 될 테니 좋지
않으냐”
억석이의 딸이 수삽한 태를 지으며 외면하느라고 고개를 옆으로 돌이킨단 것
이 공교히 돌석이 앉은 편으로 돌이켰다가 “배두령이 사윗감인 줄을 저년이 어
찌 알구서 벌써 눈을 맞출까” 오가에게 조롱을 받고 아주 방을 등지고 돌아섰
다. 오가가 억석이의 딸을 바로 서라고 이른 뒤 “수양딸 노릇을 할 테냐, 안 할
테냐?”하고 말을 다지니 억석이의 딸은 천연스럽게 “아비가 다른 말이 없을
줄은 짐작하옵지만 저야 아비의 말을 듣지 않고 대답을 여쭐 길이 있습니까”하
고 대답하였다. “네 말이 옳다. 곧 네 아비를 불러서 물어보자”하고 오가가 작
은 두목 하나늘 불러서 앞산 파수꾼의 교대를 잠깐 변통하고 김억석이를 내려오
도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억석이가 와서 여러 두령께 문안을 드린 뒤에 오가가 억석이를 보고 “네 딸
을 내가 수양딸루 정하구 싶은데 네 맘에 어떠냐?”하고 물으니 억석이는 대번
에 “황감한 처분이올시다”하고 허리를 굽신거리었다. 오가가 그제는 억석이
딸을 보고 “네 아비가 허락했으니 인제는 내 딸 노릇할 테지. 자, 내게 먼저 절
한번 하구 다른 두령께 차례루 절 한번씩 해라”하고 일러서 억석이 딸이 오가
에게부터 절하기 시작하여 돌석이까지 빼놓지 않고 모조리 돌려 절하였다. 오가
가 좌중을 돌아보며 “나는 새루 얻은 딸을 데리구 가서 모녀 상면을 시켜야겠
네. 딸 얻은 턱으루 내일 낮에 내가 술 한잔 냄세”말하고 일어섰다. 오가가 억
석이 부녀를 데리고 간 뒤 돌석이는 먼저 일어서 갈 생각을 고만두고, 다른 두
령들과 같이 꺽정이게서 밤 늦도록 놀다가 나중에 막봉이와 함께 처소로 돌아왔다.
배돌석이와 길막봉이가 도회청 문안에 들어설 때 달빛이 마당 반쪽만 비치어
서 한마당 안에 환한 데도 있고 침침한 데도 있는데 환한 데가 있으므로 침침한
데가 더욱이 침침하여 보이었다. 막봉이가 자기 처소에 가려고 침침한 데로 들
어가다가 다시 환한 데 나와서 돌석이더러 “여보, 가만히 생각하니 용심이 나
는구려”하고 말하였다. “무에 용심이 난단 말인가?" "같이 홀애비루 지내다가
혼자 장가를 드니 어째 용심이 나지 않겠소" "기집애가 탐난다면 자네게 물려줌
세" "진국은 나 먹구 훗국은 너 먹으란 수작이오?" "잠깐 맛만 봤지 진국은 고
시라니 남아 있네" "진국이구 훗국이고 혼자 다 먹으우. 구차이 물려달란 말 않
소" "그럼 왜 용심난다구 말하나?" "장가들어 가지구 새살림을 차리구 나가면
나 혼자 도회청의 수복이 노릇을 할 테니 내 신세가 가엾지 않소" "내가 딴집
살림을 하게 되거든 자네두 같이 가세" "남진 기집 농탕치는 판에 젊은 놈이 건
성화 나서 죽으라구" "남진 기집이라니 말버릇두 고약하다" "말버릇을 배운 것
이 그뿐이니 어떻게 하우" "여보게, 자네 안해를 곧 데려다가 우리 둘이 일시에
살림을 차려보세" "좋은 말이오. 그렇지만 내 안해 데려오기를 기다리자면 한참
쉬어야 할걸" "자네 안성 행보를 한번만 하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자네 주저하는
속을 모르겠네" "속 모를 거 무어 있소. 안해란 것이 후살이를 안 가구 저의 집
에 있더래두 아비 어미가 내놓지 않을 것을 뻔히 아는데 데려올 맘을 먹을 까닭
있소. 그 아비 어미가 사람이 황두령의 장인 장모 반만이라두 하면 내가 벌써
데리러 갔겠소" "장인 장모가 외딸이라구 내놓기 싫어하거든 장인 장모까지 데
려오라니까. 그럼 말썽 없을 것 아닌가" "내외가 다 말썽쟁이라 내가 가서 끈다
구 따라나설 리가 없소" "딸하구 같이 오지 않을라면 딸만 내노라구 염병을 부
리지" "염병을 부리다가 살인나게. 애초에 고만두는 게 상책이지" "그러면 달리
기집 하나를 구해 보게" "차차 구하지" "늘어지기는 오뉴월 쇠불알일세" "그러다
가 욕하겠소" "자네는 졸리지 않은가. 나는 졸려" "졸리거든 고만 잡시다”
막봉이와 돌석이는 서로 잘 자라고 인사하고 각기 흩어졌다. 막봉이가 자리에
누운 뒤에도 오랫동안 둥글거리다가 잠이 든 까닭에 이튿날 식전 잠이 아직 몽
롱한 중에 누가 방안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 시중드는 졸개로만 여기어서 “부르
지 않는데 왜 들어오느냐?”하고 나무라다가 “남은 조반 먹구 길을 왔는데 이
때까지 무슨 잠이오?”하는 대답에 놀라서 벌떡 일어 앉아 보니 탑고개 작은 손
가가 방안에 들어섰다.
“식전에 웬일이야?" "셋째형님이 어젯밤에 왔소" "셋째형님이라니, 뉘 셋째형
님 말이야?" "잠이 아직 덜 깼구려. 삼봉이가 왔단 말이오" "무어 삼봉이 형님이
왔어? 어디 있어?" "내게 있소" "왜 같이 오지 않구" "같이 들어오자니까 한사쿠
싫답디다" "나더러 나오라든가?" "그럽디다” 막봉이가 일어나서 부지런히 소세
하고 조반 요기한 뒤에 배돌석이와 다른 두령들에게 셋째형 삼봉이를 데리고 오
마고 말하고 작은 손가가 와서 같이 탑고개로 나왔다.
삼봉이는 진주 가서 살다가 진주서 상처하고 자식 남매를 발안의 부모에게 갖
다 맡긴 뒤에 다시 등짐장사로 떠돌아다니는 중에 천안 어느 양반의 집 계집종
을 보고 반하여 그 양반의 집에 비부를 들게 되었는데, 막봉이와 형제 서로 만
나는 것이 비부 든 뒤에 처음이라 막봉이는 형이 그저 등짐 지고 다니는 줄로
알고 “형님, 그 동안 어디루 다녔기에 그렇게 오래 안 들렸소”하고 물었다. 삼
봉이가 미처 대답하지 전에 누이 큰손가의 안해가 옆에서 “양반의 집에 가서
비부쟁이 노릇한다네”하고 말하니 막봉이는 다시 형더러 “참말이오?”하고 물
었다. 삼봉이가 천안 양반의 집에 비부 들게 된 것을 이야기하여 막봉이가 들은
뒤에 “형님 생각 잘못했소. 어디 기집이 없어서 남의 집 종의 서방 노릇을 한
단 말이오”하고 책망하여 말한즉 삼봉이는 웃으면서 “너는 그렇게 말할 줄 알
았다”하고 대답하였다. “사람의 비위를 가지구서 어떻게 턱찌끼를 얻어먹구
사우?" "나두 처음에는 아니꼬운 꼴을 많이 보려니 생각했더니 생각과는 다르더
라" "형님 비위가 전버덤 좋아졌구려" "내 비위가 좋은 것버덤 주인양반의 집
인품이 좋다" "남에게 매인 몸이 어떻게 나왔소?" "발안이 집에 다니러 온 길에
너두 보구 누님두 볼라구 여기까지 왔다" "어머니 아버지 다 안녕하십디까?" "
어머니버덤두 아버지가 근력이 아주 말 아니더라" "그저 내 걱정들 하십디까?"
"그럼, 어머니는 전과 같이 노상 질금거리구 아버지는 이따금 한숨을 쉬는데 근
력이 부쳐서 전처럼 가슴두 짓찧지 못하는 것이 더욱 가엾더라" "돌아가기들 전
에 내가 한번 가뵈일 작정이오" "아버지 어머니두 가보이려니와 네 안해를 한번
가봐라. 내가 천안 가서 비부 들기 전에 안성 가사리를 갔다가 만나봤다”
“저의 큰집에 다니러 온 것을 만나봤소?” “그 어머니가 작년 겨울에 독감을
앓다가 죽었어. 초상 치느라구 땅마지기가 있던 것은 없어지고 지금 부녀 두 식
구가 큰집을 의지하고 가사리 와서 사는데 큰집의 토심이 여간 아닌 모양이드
라. 그 어머니가 살았을 때 다른 사위 얻으려구 하는 것을 그 아버지가 딸 하나
가지구 사위 두 셋씩 얻는 법이 없다구 못 얻게 했다는데 네 안해가 나를 보더
니 어떻게 우는지 내가 아주 곡경을 치렀다. 너를 한번 만나보면 죽어두 한이
없겠다구 증언부언하기에 내가 힘써 보마구 말을 했다. 이번에 발안이 집에 와
서 들으니까 그 아버지가 그 동안 발안이를 두번이나 왔다 갔다는데 한번은 와
서 네 소식을 들었느냐고 묻구 가구 한번은 와서 네가 화적질한단 말이 있으니
그런 말을 들었느냐구 묻구 가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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