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하기에 한 시각이라두 빨리 올라구 절뚝거리면서 왔지요.”
“길두령 잡혀 갇힌 지가 오늘 며칠짼가?” “오늘 벌써 엿새째가 되는가 봅니다.”
“그 동안에 혹 죽었는지두 모르겠네.” “옥사가 결말나기 전에 옥 속에서 죽으면 탈
이라구 안성 관가에서 의원 대서 치료해 준단 말이 있습디다.” 돌석이가 근심에 잠겨 있
는 좌중을 돌아보며 “오늘 밤에라두 안성들을 떠나야 하지 않소?” 하고 말하
여 그 자리에서 즉시 안성 갈 일을 의논하려고 먼저 곽오주까지 다시 불러오게
되었다. 오주가 와서 막봉이의 소식을 듣고 대뜸 “그 자식 잘 다녀오지 않구
왜 붙잡혔어. 서장사의 말마감 해줄라구 붙잡혔나.” 하고 서림의 비위를 거니
서림이도 가만히 안 있고 “길두령이 일부러 자청해서 붙잡힌 건 아닌가 보우.
” 하고 오주의 말을 빈정거렸다. “누가 일부러 붙잡혔다우? 서장사의 말이 맞
았단 말이지.” “아닌게 아니라 내 말만 들었더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매
우 옹골지겠소.” “곽두령 눈에는 내가 소인으로밖에 안 보이는 게야.” “서장
사가 내게 소인 하는 사람이 아닌데 소인으로 보일 까닭있소.” 돌석이가 눈을
모지게 뜨고 나앉으며 “동무 하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판에 잡담하구
있단 말이오.” 하고 소리를 질러서 오주와 서림이의 말다툼이 쑥 드렁갔다. 그
뒤에 오가가 좌중을 둘러보며 “자, 안성을 가기루 하구 보면 갈 사람부터 작정
해야 하지 않소?” 하고 의논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꺽정이가 먼저 “나는 오래
전부터 죽산을 한번 가려구 별러오는 중이니까 내가 가겠소.” 하고 말하자, 이
봉학이가 꺽정이의 뒤를 받아서 “선생님을 한번 뵙기 겸 나두 가겠소.”하고
나서고 또 박유복이가 봉학이의 말을 따라서 “나두 같이 가겠소.” 하고 나섰
다. 꺽정이가 봉학이와 유복이를 돌아보며 “우리 셋이 같이 가는 게 워낙 좋겠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오가를 보고 “우리 셋만 가면 어떻게든
지 막봉이를 뺏어올 수 있을 게니 다른 사람은 갈 것 없소.” 하고 말하여 오가
가 그렇다고 대답할 때 배돌석이가 손을 내저으며 “다른 사람은 몰라두 나는
가야겠소. 내가 길두령과 특별히 정분이 좋다는 게 아니라 길두령이 이번에 안
성 가게 된 것은 말하자면 내 충동인데, 안성 간 탓으루 죽을 곡경 당하는 것을
내가 가만히 앉아 볼 수 있소.” 하고 말 뒤를 꼭꼭 눌러 말하여 굳게 결심한
것을 보이니 꺽정이가 돌석이더러 “그럼 넷이 같이 가지.” 하고 말하였다. 박
유복이가 꺽정이를 보고 “이왕이면 서장사까지 같이 가두룩 합시다. 서장사만
큼 계책을 낼 사람이 우리 중에 없지 않소?” 말하고 또 이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안성 가서 여기와 연락할 일이 없으란 법 없으니까 천왕동이두 같이 가
는 게 좋겠소.”말하니 꺽정이는 들을 만하고 있는데 황천왕동이가 시쁘장스러
운 어운으로 “나는 빼놓는다구 빼놔두 좋소. 다들 간 뒤에 나 혼자 가두 갈테
니까.” 하고 딴 배짱이 있는 것을 말하고 또 서림이가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여러분이 같이 가자시면 나두 가지요.” 하고 갈 의향이 있는 것을 말하였다.
별안간 “나는 사람이 아니오?” 하고 곽오주가 소리를 버럭 질러서 여러 두령
이 다 오주를 돌아보는 중에 오가가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물으니 “나는
사람 축에 못 가기에 가잔 말들을 않지.” 하고 오주는 툴툴거렸다. “나더러두
같이 가자지 않는 게지.” “늙은이는 사람 아닌가.” “그럼, 늙은이와 젊은 놈
이 같소.” “앗게 이 사람아, 늙은 것두 분한데 사람 대접까지 않는다면 분통이
터져 죽으란 말인가.” “나두 지금 분통이 터져 죽겠소.” “우리 둘이 다같이
분을 참구 뒤에 남아 있세.” “난 싫소.” 하고 오주는 머리를 흔들었다. 청석
골에 아직 별로 큰일은 없을 것이지만, 늙은 두령 오가 하나만 두고 모짝 다 나
가기가 어려워서 꺽정이가 오주와 천왕동이 두 사람을 늙은 오가 옆에 남겨놓고
가려고 생각하고 두 사람더러 뒤에 남아 있으라고 타이르니 천왕동이는 싹싹하
게 “가자면 가구 있으라면 있지요.”하고 긴 말을 하지 않으나 사람이 끈덕진
오주는 부득부득 간다고 고집을 세웠다. 꺽정이가 자기 말 안 듣는 데 홧증이
나서 “너는 아무리 간다구 해두 내가 안 데리구 갈 테다.” 하고 언성을 높여
도 오주는 눈 한번 끔쩍 않고 “내가 따라가면 형님이 날 때려죽이겠소? 나는
맞아죽더래두 가구 말 테요.” 하고 넙죽넙죽 말대답하였다. “네가 정히 그렇게
가구 싶다면 내가 안 갈 테니 내 대신 가거라.” “형님 그러지 마우. 내가 좋은
꾀는 못 내두 데리구 가면 설마 아주 쓸 데야 없겠소.” 오주는 여럿이 너도 나
도 간다는데 갈 생각이 났을 뿐 아니라 서림이를 같이 가자면서 자기를 빼놓는
데 불퉁이가 나서 기어코 가려고 고집을 세우는 판이라, 좋은 꾀는 못 내도 쓸
데없지 않다는 말에 ‘내가 서림이만 못하단 말이오.’ 하고 빼놓는 것을 원망
하는 뜻이 보이어서 꺽정이가 한참 생각하다가 오주더러 “너는 말할 수 없는
위인이다. 쓸데가 있구 없구 같이 가자.” 하고 같이 가기를 허락하였다. 황천왕
동이가 오주를 직신거리며 “같이 가기 싫다는데 떼를 써서 같이 가면 사람만
치떨지 신통할 게 무엇인가?” 하고 조롱하니 오주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찌끗
째끗하며 “나더러 치떨다구 해두 속으루는 샘이날걸.” 하고 대꾸하고 박유복
이가 오주를 바라보며 “난데 나가서 갓난애 우는 소리가 들리면 여기서처럼 야
단두 못치구 어떻게 할 테냐?” 하고 물으니 오주는 얼음에 자빠진 쇠눈깔같이
큰 눈을 끔벅끔벅 하다가 “귀막으면 고만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인제 갈 사람은 대강 작정된 모양이니 갈 채비를 어떻게 차릴
까 의논해 보지요.” 하고 말하니 꺽정이가 “무슨 특별히 채비 차릴 것이 있
소?” 하고 서림이에게 물었다. “첫째 병장기들은 가지구 가야지.” “안성 가
서 혹시 관속들을 사더래두 인정 줄 것을 유렴해 가지구 갔으면 좋겠는데 어떻
게들 생각하시오?” “인정 줄 것은 무에 좋겠소?” “상목 외에 금은붙이나 좀
가지구 가면 좋겠지요.” “그러면 병장기와 인정 줄 것으루 부담 하나를 맨듭
시다.” “중로에서 혹 기찰이나 당해서 짐을 풀어보이게 되면 낭패 아닙니까?
”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내 생각 같아서는 금교역말 어물전에 기
별해서 어물을 몇 짐거리 들여다가 어물 밑에 병장기라든지 인정 줄 것을 묻어
서 짐을 맨들구 우리들이 어물장사패 노릇을 하구 가면 중로에서 기찰을 당하더
래두 염려가 없을 것 같소.” “그것 참 된 생각이오.” 꺽정이 외에 다른 두령
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건 고사하고 곽오주까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갈
채비 차릴 것은 서장사가 통히 맡으시우.” 꺽정이 말끝에 서림이는 선선히 “
모레 새벽에 떠나두룩 내일 안에 준비를 다 해노리다.” 하고 대답하였다. 두령
여섯 사람 외에 심부름할 작은 두목 네 사람이 같이 가게 되어서 도합 열 사람
이 어물장사를 꾸며가지고 떠나는데, 꺽정이와 유복이와 돌석이와 오주는 작은
두목 네 사람과 같이 어물짐들을 지고 짐질할 줄을 쇠배 모르는 봉학이와 서림
이만 물주들인 체하고 빈몸으로 따라가기로 작정되었다. 일행이 청석골서 떠나
던 날 무사히 송도를 지나고 장단을 지나서 가얌고개 아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서 하룻밤 편히 자고 이튿날 식전 나루를 건너서 임진을 지날 때에 이봉학이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는 진군들을 봉학이는 보고도 못본 체하였다. 큰길로 오다가
가는버들 사잇길로 고골 앞을 지나서 바눌티 정상갑이 집에 들어가서 또 하룻밤
을 자고, 그 이튿날 늦은 아침때 모래재를 넘어와서 문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남
대문 밖에 있는 친한 객주집에 와 앉아서 장물을 팔아 보내고 소문을 알아 보내
는 남소문안패 괴수의 아들 한온이를 청해다가 만나보고, 점심 뒤에 한강으로
나와서 나룻배를 기다리는 중에 나룻가 주막에 앉았던 포교 두엇이 일행을 보고
쫓아들 나왔다. 포교 하나가 꺽정이 앞에 와서 내려놓은 짐짝을 가리키며 반말
로 “무슨 짐이야?” 하고 묻는데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서림이가 턱 나서
서 “어물짐이올시다.”하고 대답하였다. “어물장사들인가?” “녜, 그렇습니다.
” “어디들 사나?” “저는 양지읍에 살구요, 동무들은 고든골 사는 사람두 있
구 좌찬이 사는 사람두 있습니다.” “물건은 어디서 해가나?” “서울서 해갑
니다.” “서울을 언제 왔나?” “엊그저께 왔습니다.” “어디서 묵었나?”
“남대문 밖 객주에서 묵었습니다.” “지금 어디루 가나?” “고향에들 가서
하루 이틀 쉬어 가지구 양성 죽산을 거쳐서 청홍도 진천, 음성 등지루 물건을
펴먹이러 가겠습니다.” 포교가 하게로 하는 말을 서림이가 공대해서 대답하는
데 대답하는 품이 조금도 꾸며 하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 포교가 말을 더 묻
지 않고 “음, 그래 어물장사들이야.” 하고 혼잣말하며 동무 포교를 돌아본 뒤
다시 서림이를 보고 “무슨 어물들인가? 구경 좀 하세. 짐짝들을 풀게.” 하고
말하니 서림이가 망건 뒤를 긁죽긁죽하며 일행들을 돌아보고 “길이 늦어 탈이
지만 물건을 구경하자시니 얼른얼른 짐짝들을 이리 내다 풀지.” 하고 말하였다.
한짐을 푸니 그 짐에는 상어, 공어 등속이 차곡 차곡 재여 있었다. 포교들이 들
척들척해보고 또 한 짐을 푸니 그 짐에는 오징어, 가오리 등속이 가로세로 넣어
있었다. 포교들이 쑤석쑤석해보고 다시 또 한 짐을 푸니 그 짐에는 전복꼬치와
홍합줄이 상자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었다. 포교 하나가 작은 전복을 가리키며
“전복은 요렇게 작은 것이 큰 것보덤 맛이 있느니. ” 하고 동무 포교를 돌아
보는데, 서림이가 얼은 작은 전복 한 꼬치를 집어들고 “이것이 감복이올시다.
맛이 신통하지요. ” 하고 한 꼬치 열 개를 그 포교에게 내주며 “노놔서 맛들
이나 보십시오. ” 하고 말하니 그 포교는 고개를 가로 흔들다가 “인정으루 주
는 게니 받세그려. ” 동무 포교가 권하는데 권에 못이기는 체하고 손을 내밀었
다. “이런 좋은 어물들이 시굴 구석에서 잘 팔리나?” “시골 구석에서는 소대
상두 안 지냅니까. 일년에 한두 번씩은 펴먹일 수가 있습니다.” “자네가 물건
주인인가?” 서림이가 이봉학이를 가리키며 “저 사람하구 저하구 둘이 밑천을
대서 장사합니다.” 하고 대답한 뒤 곧 포교들더러 “남은 짐은 한꺼번에 풀어
서 보시게 해두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포교들은 “남은 짐을 다 볼 거 없
네. ” “푼 짐을 도루 묶게. ” 하고 각기 한마디씩 말하였다. 짐 세 짝을 풀었
다가 다시 묶는 동안에 한 배를 놓치고 다음 배로 일행 열 사람은 무사히 한강
을 건넜다. 새원을 지나서 다르냇재를 넘을 때 잿길이 된 까닭에 짐들이 갑자기
무거워져서 작은 두목들은 다 땀을 철철 흘리고 입을 벌리고 헐헐하였다. 하정
을 잘 살피는 이봉학이가 이것을 보고 잠깐 쉬어가자고 다른 두령들과 공론하여
잿마루에 와서 다들 짐을 벗어놓고 땀을 들이는 중에 박유복이가 작은 두목 중
의 신불출이를 보고 “이 재에서 우리 처음 만나던 것이 벌써 옛일 같애. ” 하
고 말하니 불출이는 손가락을 꼽아보고 “벌써 사 년이나 됐습니다. ” 하고 대
답하였다. “그때 자네더러 벌잇길을 고치라구 권하던 내가 오늘날 자네하구 같
이 이 길루 벌어먹을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겠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
일세. ” 서림이가 유복이의 말을 옆에서 듣고 “왜 회심한 생각이 나시우?”
하고 웃고 곧 불출이를 돌아보며 “자네가 새원 사람이라지. 새원 사람이면 이
재 이름의 출처를 잘 알겠네그려. ”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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