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데기 같은 것들 몇백 명이라도 겁날 것 없다고 흰소리하는 두령들을 서림이가
가지가지 불리한 점을 들어서 설복할 때 꺽정이가 서림이더러 “그러면 어디 가서
목을 지키구 있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서림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서울루 가는
데 양성, 용인으로 바루 갈는지 평택, 수원으루 돌아갈는지 그것두 모르구 미리
어디 가서 목을 지키겠소.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을
말하우. ” “압상해 가는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중로에
서 빼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 “그러면 그 동안에 우리는 어디 가서 묵겠소.
” “읍내 가까운 촌으루 다니면서 어물장사 하지요. ” “우리가 촌으루 다니
는 중에 서울루 가버리면 낭패나지 않소?” “두목 네 사람을 매일 한두 사람씩
읍에 들여보내 두면 군관과 군사들이 서울서 오는 것을 곧 알게 될 께니까 그런
낭패는 없겠지요. ” “나하구 봉학이하구 유복이는 그 동안에 칠장사를 가서
다녀와야겠소.” “그럴 것 없이 오늘 일행이 다같이 칠장사에 가서 하룻밤 묵
으면 어떨까요?” “그래두 좋소. ” 칠장사 가서 하룻밤 묵을 의논이 작정된
뒤에 튼튼할 성으로 작은 두목 한 사람은 읍에 들여보내 두자고 박유복이가 말
하여 마침내 작은 두목 중의 신불출이는 도로 읍으로 들여보내고 불출이 졌던
짐은 이봉학이와 서림이가 번갈아 지고 칠장사로 가게 되었다. 일행 아홉 사람
중에 칠장사 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꺽정이나, 꺽정이도 항상 죽산길로 다닌
까닭에 노루목이나 또는 내촌 앞에서 가는 사잇길을 모르고 죽산 가는 놋박재로
길을 잡았다. 일행이 놋박재 마루턱을 향하고 올라오는 중에 앞길 몇 간 밖수풀
사이에 몽치 든 군 대여섯이 나타났다. “짐들을 게 벗어놔라.” 호령을 듣고 앞
서 오던 꺽정이가 한번 껄껄 웃으니 여러 사람이 모두 따라서 큰소리로 웃었다.
몽치 든 군들이 서로 돌아보다가 하나가 뒤로 돌아서서 휘파람을 불더니 휘파람
소리 끝에 새로 서넛이 수풀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중에는 칼 든 자가 하나 있
었다. 칼 든 자가 괴수인 성불러서 가장 거드름을 빼면서 몽치 든 군들에게 한
두 마디 말을 묻고 곧 앞으로 나서서 일행을 바라보며 “짐들을 빨리 벗어놔라.
” 하고 고성을 쳤다. 꺽정이가 얼른 짐을 벗어놓으며 여러 사람에게 눈짓하여
일행이 다 짐을 벗어놓는 중에 눈치 없는 곽오주만은 꺽정이가 그자 놀리려는
것을 모르고 “짐 지구는 저깐놈들을 못 해내우.” 하고 두덜거리다가 꺽정이에
게 입속 꾸지람을 받고 비위에 마땅치 못한 듯이 꿍 소리 하며 짐을 벗어 내던
졌다. 말썽없이 짐들 벗어 놓는 것을 보고 칼 든 자는 만족히 여기는 모양으로 머
리를 끄덕끄덕하였다. 꺽정이가 일부러 우렁찬 목소리를 줄여 가지고 “짐짝들
그리 가져가리까?” 하고 물으니 칼 든 자는 말을 못 알아들었던지 “무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짐짝을 그리 갖다 드릴까 묻는 말이오.”“시키지 않는
짓 고만둬라.”“수고될 것 없소. 갖다 드리리다.”꺽정이가 짐 여덟 짝을 네 짝
씩 포개놓고 걸빵으로 얽어 동이는데 칼 든 자가 보고 “그건 무슨 짓이냐?”“
왜 짐짝들을 한데 얽어매느냐?”하고 호령호령 하였다. 꺽정이가 호령을 들어가
며 포개 얹은 짐짝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대강 얽어 동인 뒤에 좌우 손에 짐 네
짝씩 들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몽치 든 군들은 입을 딱 벌리고 칼 든 자
는 떨리는 목소리로 “장사 성함이 누구시오?”하고 물었다.“성함은 알아 무엇
하게?” 꺽정이는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는데 서림이가 앞으로 쫓아나오며 “죽
산놈들은 양주 임장사의 선성두 들어 뫼시지 못했느냐?”하고 기세를 부리었다.
“양주 임장사라니 임꺽정이오?”“그러시다.”칼 든 자가 서림이의 말을 듣고
서는 황망히 칼을 내던지고 꺽정이 앞에 쫓아와서 땅에 엎드리며 “장사를 몰라
보입고 잘못했습니다.”하고 사과하니 꺽정이가 양편 손의 짐짝들을 땅에 내려
놓고 나서 “모르고 잘못한 게니 어서 일어나우.”하고 엎드린 자를 붙들어 일
으켰다. “저는 성명이 곽능통입니다.” 꺽정이가 그자의 성이 곽가란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며 “오주, 이리 와서 일가하고 인사해라.”하고 말하니 곽오주와 다
른 두령들이 다같이 앞으로 나와서 능통이와 인사를 마친 뒤에 능통이가 꺽정이
를 보고 “길막봉이 일루 오셨겠지요?”하고 물어서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이었
다. “저같이 변변치 못한 위인도 길막봉이 일을 조만히 근심합니다.”“막봉이
를 아시우?”“알지는 못하지만 초록은 동색입지요.”“고마운 말이오.”“지금
어딜 가십니까?”“칠장사루 가는 길이오.”“칠장사는 어째 가십니까?”“오늘
밤 묵으러 가우.”“지금 해가 다 져가는데 칠장사를 어떻게 가십니까, 저의 사
는 달골이 여기서 가차우니 저의게로 묵으셔도 좋습니다. 그러구 저의의 힘 자
라는 일이면 심부름도 해드리겠습니다.”능통이의 호의(好意)를 받아서 일행은
칠장사로 가지 않고 놋박재에서 달골로 들어오게 되었다. 능통이의 집에서 저녁
밥들을 먹은 뒤에 작은 두목 세 사람은 바깥방에서 자고 두령 여섯 사람만 안
건넌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방이 좁고 물것이 많아서 마당에들 나가 자려고 꺽
정이가 능통이를 보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달라고 청하였다. “물것이 많지요?”
“물것보담도 방이 답답하우.”“널찍한 사랑칸을 세울 수 있지만
남의 눈이 무서워서 못 세웁니다.”“이 동네 사람은 모두 댁내요?”“네, 이 동
네 사람은 다 저의 심복입니다. 그렇지만 읍내 관속이나 타동 사람의 눈을 기이
느라구 고생입니다.”“턱 밑에 있는 놋박재와 같은 데서 일하자면 얼굴 아는
사람에게 들킬 때가 많지 않겠소?”“제가 여기 놋박재와 용인 메주고개 두 군
데루 돌아다니는데 메주고개서 일할 때는 이 동네 아이들을 쓰구 놋박재서 일할
때는 메주고개 밑에 사는 아이들을 씁니다. 아까 놋박재에서 먼저 내보냈던 것
은 용인 아이들입니다.”“두 군데를 합하면 부하가 모두 얼마나 되우?”“되지
못한 것들이 수효는 사오십 명이나 되지요만, 그중에 제구실 할 만한 놈은 몇
놈 안됩니다.”“마당에 나가 앉아서 이야기합시다.”“네, 잠깐만 참으십시오.”
능통이가 바깥 머슴방에 있는 졸개 두엇을 불러서 말을 이르더니 얼마 동안 뒤
에 마당에 포진이 훌륭하게 되었다. 멍석을 깐 위에 기직자리를 연폭하여 깔아
놓고 이슬받이로 차일까지 쳐놓았다.여섯 사람이 다 건넌방에서 마당으로 나온
뒤에 능통이가 안방에 들어가서 요때기 이불때기를 한아름 안아 내다놓으며“새
벽녘에는 선선들 하실 테니 배만이라두 덮으십시오.”하고 말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이 능통이의 후의를 사례하는 중에 곽오주는 “우리 동생, 사람이 신통한걸.
”하고 너털거리었다. 서림이가 능통이를 보고“메주고개가 일터라니 말씀이지
만 우리가 만일 메주고개서 일을 내게 되면 부하를 모아가지구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겠소?” 하고 물으니 능통이는 “어째 메주고개에 가서 일을 내시게 됩니
까?” 하고 물었다. “지금 안성옥에 갇힌 우리 동무를 서울루 압송할 때 중로
에서 빼앗을 작정이오.” “메주고개를 장대시다가 김량으루 돌아가면 어떻게
하실랍니까?” “그렇기에 앞서 목을 지키지 않구 뒤를 따라가려구 하우. 혹시
메주고개서 일을 내게 되거든 도와 달란 말이오.” “어째 파옥하실 생각을 안
하십니까?” “파옥을 하자면 접전이 날 텐데 우리 열 사람쯤 가지구 접전하며
한편으루 파옥하자면 우선 손이 모자라서 할 수 없소.” “안성 관군이 한껏하
야 이삼백 명밖에 안될 겝니다. 여러분 같은 영웅 장사가 그까지 것쯤 해내기야
여반장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관군만 해내신다면 파옥하는 건 변변치 않은
내가 담당하오리다.” 꺽정이가 능통이의 말을 듣고 서림이더러 “이 주인이 이
왕 한팔 도와준다니 다시 파옥할 계책을 생각해보.” 하고 말하니 서림이가 “
녜, 잘 생각해 보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내일 칠장사 가서 하룻밤
자구 올 테니 내일 하루 여기 주인하구 잘 상의하우.” 서림이가 꺽정이의 말을
대답하기 전에 능통이가 “질장사는 왜 가시려구 합니까?” 하고 꺽정이에게 물
었다. “우리 선생님을 보이러 가우.”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이 근방에서
두 재 구경 간다구 벼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단다.” 하고
꺽정이가 목맨 소리 하며 이봉학이와 박유복이를 돌아볼 때, 두 사람의 눈에서
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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