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

혼불 5권 (36)

카지모도 2024. 8. 17. 06:30
728x90

 

10. 아랫몰 부서방

 

얼레에 감겨 있던 무명실을 다 풀어 검푸른 밤하늘의 한가운데로 연을 깊이

날려보내 버린 기응은 얼레를 마루 위에 내려놓고는

"풍물 치는 구경이나 잠시 허고 올란다."

하면서 뒷짐을 진 채로 사립문을 나섰다. 흰 달빛에 그림자 검은 머리가 앞을

서는데. 바깥쪽에서 그와 엇갈리어 그림자 하나가 사람보다 먼저 문 안으로 들

어선다. 기표의 처 수천댁이었다. 문간에서 마주친 수숙간에 무어라고 두어 마디

나누는 소리가 달빛 속에 두런두런 들리더니

"자네. 다리 밟으러 안 갈라는가?"

마당으로 들어선 수천댁이 오류골댁한테 물었다.

대보름날 밤이면 으레 남자들은 동산으로 달맞이를 하러 가고 달불놀이를 하

며 한 동아리로 어우러져 달집을 사를 때. 여자들은 마을 가까이 있는 다리로

어울려 가서. 자기 나이 수대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오가며 다리를 밟는 것이

었다. 답교는 많이 할수록 좋다 하였다. 그렇게 하면 일년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이렇게 대보름날 밤에는 아녀자가 다리를

밟는다고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보름날 밤의 답교는 엄금이었다. 그 대신

에 하루를 늦추어 열엿새날 밤에 하게 하였다. 다시없는 명절의 차고 맑은 달은

하늘에 높이 떠 휘영청 밝고. 온 마을이 모두 달빛과 불길에 들떠 풍물 소리 요

란하게 울리는 대보름날 밤이란. 신명만큼 혼잡하기 마련인 탓이었다. 그것도 자

기 마을 사람들끼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 마을. 저 마을. 이웃 마을에 삼동

네가 너나없이 장구 치고 북 치며. 꽤괭 꽤괭 꽹과리에 지이잉 징 징을 두드리

어 한바탕 노는데다. 맞붙은 동네끼리 횃불싸움 한다고 천지가 떠나가게 함성을

지르면서 불꽃을 휘두르는 와중이란. 당자들로서는 엄동에 땀투성이가 되게 신

이 나는 일이고. 구경꾼들에게는 그런 장관이 없어서 공연한 사람까지도 어깨가

들썩이어 흥분하게 하지만 바로 그런 탓에 부녀자들은 바깥에 나가면 안되었던

것이다.

"대보름날 아니라도 달이 뜨면 무단히 잘모르는 개도 짓는 법인데 하물며 심

정 가진 사람이랴. 한 식구 같은 동네 사람도 이런 날이면 자칫 못 믿을 판에.

횃불 논다고 이웃 동네 장정들이 불덩어리 치켜들고 범떼같이 몰려드는 밤에.

행여라도 바깥출입 생각도 마라. 얼씬하다 까딱하면 생 큰일난다."

엄중한 어른들은 집안의 아녀자에게 그렇게 오금을 박았다. 거기다 과년한 처

자가 있는 집은 단속이 각별한 것을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횃불싸움은

참으로 볼 만하였다. 큼지막한 짚뭉치 속에다 닭똥과 사금파리 그리고 숯덩어리

를 집어 넣어 만든 횃불을 손에 손에 든 온 동네 청년과 남자들은 옆 마을과의

경계인 둔덕으로 올라가

"와아아."

"와아."

함성을 지르며 팔을 휘둘러 횃불을 공중에 돌렸다. 둔덕에는 벌써 옆동네 횃

불들이 넘실거려 주홍의 불무리를 일으키며 붉은 불살의 회오리같이 밀려와 있

었는데. 그것은 이 동네로 들어오려는 횃불들이었다. 둔덕에 선 두 무리의 휘황

한 횃불들은 서로 상대편 불무리를 결사적으로 막아 내며 혹은 밀치며. 이쪽으

로 들어오려 하고 저쪽으로 넘어가려 하였다. 누구든지 상대편 동네로 먼저 불

을 밀고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검은 그을음을 길게 뿜으며 너울너

울 타오르는 횃불이 달빛을 물들일 때. 불 속에서 달구어진 사금파리는 허공으

로 튀어올라 타닥. 찬연하게 부서지며 선홍으로 흩어졌다. 그럴 때 사람들은 다

시금 와아아. 함성을 질렀다. 이 횃불싸움에서 이기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동네

청년들의 혼삿길이 환히 트인다고 해서 이 마을과 저 마을의 온 동네 남자들이

다 나와 응원하고 싸우는 이 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흥겨움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그만 진 동네에서는. 밀고 들어오는 횃불의 무리를 위하여 동이술을

내놓고 음식을 한판 걸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또 두 동네가 한자리에

어우러져 왁자아. 하늘이 울리게 풍물을 놀았다. 그러니 어른의 분부가 아니더라

도 감히 문 밖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녀자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세월이 달라져서 그토록 흥에 겨운 놀이들이 어느결

에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명맥만 남아. 어린 사내아이들이

"망울이야아."

"망울이야."

하며 논둑 밭둑에 쥐불을 놓고. 저희끼리 놀이로 횃불을 돌리는 정도였다. 달

집을 사르고 풍물을 치는 것도 완연히 규모가 줄어. 그전에 비기면 시늉에 불과

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연히 매안 마을 아녀자의 답교도. 굳이 열엿새날이 아닌 보름날 밤

에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꼭 누가 허락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의 동네 개

울로 다리를 밟으러 가는 것도 아니요. 혼자서 가는 밤길도 아니었기 때문에 은

연중 묵인이 되었다고나 할까.

"금방 오마."

강실이를 혼자 남겨 두고 나서는 것이 어쩐 일인지 다른 때 같지 않아 마음에

걸린 오류골댁은 사립문간에서. 마당에 선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 곧 들오실 것이다."

다시 한 마디를 더 붙인 오류골댁이 수천댁을 따라 고샅으로 나갔다.

"큰집에 형님은 어쩌고 계신가 모르겄네요."

그네는 율촌댁 걱정을 하였다. 그 말 속에는 같이 모시고 갔으면 좋으련만 하

는 뜻도 들어 있고. 아직 상중에 두 동서만 답교하러 간다는 것이 왠지 송구스

럽다는 뜻도 담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