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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37)

카지모도 2024. 12. 27.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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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 밤 삼경이면 영영 살어서는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르는 것으로 황

아장수 뒤 딸리어 보내야 하는 여식을 두고, 시집가면 낫는단말 당키나 한 일인

가.

차라리 강실이가 문중에서 몰매를 맞고 덕석말이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어

도, 온 동네 조리를 돌며 귀때기에 화살을 꽂은 채 회술레를 당하는 한이 있어

도, 어미가 저 불쌍한 새끼를 끼고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바랄 나위가 없

을 것만 같았다.

상처는 싸매면 되고, 수치와 모욕은 견디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구하게 찢어내는 생이별이라니.

아무리 달래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비도의 경위가 뱃 속의 아이처럼 짐작조

차 못하게 감추어져, 길 아닌 길로 일생 동안 강실이를 헤매게 할 그 까닭을 끝

내 어미는 모르는 채, 오직 쫓아내듯 멀리 아주 보내야만 한다...

오류골댁 핏물 도는 쓰라린 눈에 저만큼 멀어져 아랫몰 굽이로 접어드는 춘복

이 뒷모습이 아물아물 비쳐들었다.

가까스로 냇물을 건너서 거멍굴에 이른 춘복이는 농막 지게문짝을 잡아당길

기운까지도 다 빠져 버려, 덜푸덕, 토방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놈의 눈구먹이 빠져어어 어쩠어어?"

툼박한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더듬어 눈자위를 눌러 본 그는

"빠지든 안했능게비네."

중얼거린다.

눈알이 안 빠진 것은 천만 다행이었으나 눈두덩이 여지없이 찢어져 짙은 핏물

이 흘러든데다가 호되게 맞은 자리가 부어올라, 아무리 눈을 끔적여 보려 해도

눈뚜껑 여닫히는 것이 마음대로 안되고, 우선 눈앞에 무엇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토방에 주질러 앉아 두 다리를 쭈욱 뻗고는 그대로 널부러져 드러누워 버리려

는 춘복이를 황급히 일으키어 부축한 것은, 뒤미처 쫓아온 공배와 공배네였다.

아까 춘복이가 불시에 들이닥친 원뜸의 장정들한테 붙들려 갈 때부터 매안으

로 따라갔다가, 대문 바깥 호제집 처마밑에 옹송그리고 서서 오금을 제대로 펴

지 못한 채, 매타작 몽둥이 후려패는 소리에 깜짝깜짝 간이 졸아 낯빛마저 새까

맣게 죽어 버린 공배 내외는, 절뚝이며 뒤꼭지 세우고 걷는 춘복이와 함께 거멍

굴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저 몰골을 씻길 그릇이며 우선 갈아입힐 옷으로 치수는 좀 어긋나지

만 공배와 바지와 저고리를 주섬주섬 챙겨 가지고 오느라고 잠시 자기네 오두막

에 들렀다 온 두 사람은, 드디어 춘복이를 붙들고 울음이 먼저 터진다.

"어디 보자, 어디 바아. 어디 어디를 맞었냐아, 긍게."

공배네는 방안으로 끌어 옮기어 드러눕힌 춘복이의 옷을 우선 벗기고 쑥대강

이 뒤엉킨 머리통과 터져서 피멍 든 얼굴을 애가 타게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피를 닦아냈다.

"야 이놈아. 낯빤대기가 징짝이 되어 부렀다이? 니 주둥팽이는 똑 땡끼벌에

쐰 놈맹이고."

공배가 억지로 웃음엣말을 던졌다.

"누가 잘났다께미 미운 소리마안 미운 소리만 옹퉁지게 골라서 콩콩, 해 쌓드

니 인자 그 주딩이 다 낫드락은 헐 수 없이 입이 무거서 말 못히고 참어야겄다

잉? 근지러서 어쩌까."

춘복이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무슨 대꾸를 하려 해도 돌덩이 같이 단단하고 무거운 입술이

제대로 벌어지지를 않았다. 그저 다만 가물거리는 머리 속으로 실꼬리 달린 생

각들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할 뿐.

그런 그의 귀에 아까부터 울리는 것은,

어흐으으으

어흐으응

몹시도 서럽게 울던 쇠여울네의 목 놓은 울음 소리였다.

이미 다 울어 버려서 목청만 남았을 뿐, 눈물도 흐르지 않는데 그네는 하염없

이 울고 울며, 매맞은 매안의 저무는 고샅길을 절룩절룩 내려왔었지.

그 여우가 우는 소리도 같고, 상한 늑대가 우는 것도 같았던 소리.

아마 날이 새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가야 할 그 쇠여울네의 처절한 울음 소리

를, 한겨울 메마른 허공의 회초리 바람 소리가

휘이잉

날카롭게 채가면, 곡성은 칼로 자른 듯 끊겼다가 다시 어두운 밤의 바닥에서

솟구쳤었다. 그때 춘복이는 농막 귀퉁이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그 소리를 새

기며 들었던 것이다.

원뜸의 사랑마당에서 쇠여울네를 무섭게 내리치던 몽둥이와 장작이 새파랗게

불꽃을 일으키고, 개 한 마리 잡는 것보다 더 처참하게 튀어 오르던 피.

"이 피를 갚으리라."

춘복이는 그때 주먹을 돌멩이보다 단단하게 쥐며 어금니를 물었다. 부서지게

악물었던 어금니에 물린 말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쇠여울네.

나를 야속타 말으시오.

내 이날 이때끄장 천헌 목숨 안 죽고 살어 남은 죄로, 그 집이서 밥 얻어먹

은 죄로 매타작에 놉이 되야 쇠여울네 등짝을 내리치고 말었지마는, 인자 그 몽

둥이, 그 장작으로, 때리라고 헌 놈 쥑여 부릴 거잉게.

오늘 니얄 안되먼 모레가 있고 곱페가 있소.

내 것 뺏기고 몰매 맞고, 벵신 되고 동낭치로 쬐껴나는 심정은, 죽어서도 잊히

지 말고, 살어서도 잊어 부리지 마시오. 시방은 혼자 당헌 것 같고 혼자 쥐어뜯

음서 울지마는, 두고 보시오. 두고 보먼 알 거이요.밤이 짚어지면 새복이 오고

마는 거잉게.

쇠여울네.

더 울으시오.

... 더 울으시오.

울다가 숨이 끊어져서 죽어도 좋응게 울으시오. 나도 따러 울고, 공배 아제도

따러 울고, 그 옆집이도 울고, 이 거멍굴이 떠내리가게 울읍시다. 언제 한 번도

한소리로 소리내 보도 못헌 놈의 벌거지 같은 인생살이, 인제라도 한소리로 뫼

야서 창사가 터지게 울읍시다.

호령 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헌들, 우리들이 죽기로 한을 허고 우는 소리보다

클랍디여.

쇠여울네. 인자 두고 보시오.

죽지 말고 살어서 두 눈 딱 뜨고, 꼭 보시오.

강실이가, 이놈 춘복이란 놈 자식 새끼를 낳고 마는 것을 내가 꼭 뵈야 디릴

거잉게, 그날끄장은 부디 죽지 마시오. 그거이 머 몇 천 년이나 남은 것도 아닝

게, 쇠여울네, 어디로 가서 살든지 소식 끊지 말고 그날을 지달르고 있으시오.

쇠여울네가 울고, 내가 울고, 거멍굴에 엎어진 이 비루허고 보잘것없는 인생들

이 남모르게 울고 울던 설움을 내가 모질게 다갚어 줄 거잉게, 오늘 내가 내리

친 장작에 어깨 찢어진 거, 너무 야속타 말으시오.

쇠여울네, 미한허오.

그 미안하던 마음의 인과응보를 받았는지, 똑같은 마당에서, 그때는 춘복이가

쇠여울네를 내리쳤는데 이제 오늘은 거꾸로, 바로 그 자리에서 춘복이가, 쇠여울

네 당한 만큼 직사하게 맞은 것이다.

무섭고 무섭구나.

이렇게 세상살이는 갚는 것이로구나. 억지로 짜 맞추려 해도, 이와같이 톱날

서로 물리듯이 정확하게, 준 것을 그대로 받을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춘복이

는 부르르 등골이 떨렸다.

그런디 참 요상허네. 알 수 없는 일이여. 어뜨케 알었이까잉?

그날 정월 대보름에 이씨 문중 도선산을 내가 한 바꾸 다 돌았는디, 당골네

가시버시말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그림자도 없등만, 그 가시버시는 누구한테 들

켰길래 잽헤 갔이까아.

나는 절대 그런 내색 비씩도 안했는디.

박달이가 즈그깁 문앞에서 나중에 나 낼오는 걸 봤다고는 허지만, 그건 나를

본 거이제 만동이 백단이를 본 것은 아니었잖이여?

그런디 어뜨케 알어냈능고.

그는 이 일이 탄로난 연유를 불문하고, 어쨌든, 본의 아니게 자기가 보아 버린

남의 비밀이 백일하게 들통나서, 다 죽을 지경으로 혹독한 난장을 맞고, 그 아비

의 뼈다귀마저 산산조각 흩어져 밟히게 된 꼴을 겪고 만 것은, 제 탓도 없지 않

으리라 싶었다.

무엇인지 그 비밀 누설의 빌미를 준 것이 자기인 것만 같았다.

그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머, 발설만 안했다고 다가 아니라, 죄우간에 내가 그 일을 보고, 또 해필이면

그날사 오밤중에 박달이허고 마주쳤이니, 암만해도 요상해서 그놈이 기양 그 질

로 쫓아 올라가 봤을랑가도 모르제. 이씨네 도선산으로.

아까 봉게로 만동이가 피를 굉장히 많이 흘리고 쏟든디. 설마 죽든 않겄지.

그께잇 것 갖꼬. 천골에 상놈들이 머 매 좀 맞는다고 죽간디?맞는 것도 한두 번

이어야 아프제, 이골이 나먼 엥간히 얻어터진 자리는 손으로 쓱쓱 ㄸ어 불먼, 딱

지 앉고 깨깟이 낫어 불틴디 머.

하다가도 문득 불안한 생각이 치밀어 꼬리를 이었다.

"... 아재."

춘복이가 손도 못 대게 부어서 쓰리게 벌어진 입시울을 달싹이며 저 안쪽 목

구멍을 겨우 열어 공배를 부른다.

"오오, 왜?"

반색을 한 공배가 춘복이 입술에 가까이 귀를 댔다.

"먼 말 헐라고? 해 보그라, 어서"

공배네도 귀를 세우고 거들었다.

"... 당골... "

"당골네?"

"... 만동이... "

"만동이가 멀 어쩠냐?"

"... 가 보라고."

"어디를 가 보래? 너한테?"

제 말을 잘못 알아들어 엇짚는 공배의 대답에 춘복이는 난감한 듯, 아니라고

고개 젓는 시늉을 하였다.

"오오, 나보고 만동이한테 가보라고?"

춘복이 기색에서 얼른 속뜻을 눈치챈 공배가 물었다. 그리고는

"인정머리 아조 없는 놈인지 알었드니, 니 코가 석 자나 빠징게 급헌짐에 본성

정 나오냐? 넘의 걱정보톰 허게? 듣기는 갠찮다마는."

하며 대가리를 쥐어박으려 하였다.

"어구구구, 왜 이리여?"

공배네가 그 주먹진 손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양에 깜짝 놀라 기겁하는 소리

를 지르며, 공배 주먹을 두 손으로 잽싸게 감싸 잡는다.

"수박을 쪼갤랑가, 왜 독뎅이맹인 주먹은 치키들고잉?"

"아 맨날 때리든 대가린디 조께 다쳤다고 못 때릴 거잉가?"

오늘따라 공배는 평소에 않던 익살을 더욱 부리며, 마치 춘복이가 여늬때처럼

둘러앉아 놀다가 벌렁 드러눕기라도 한 것같이 가볍게 대하였다. 후줄후줄한 낯

골에 웃음까지 머금고는.

"담뱃가리 붙여 놓고 한 잠 푸욱 자그라. 낼 아칙에 날 새먼 해 뜨디끼, 한 밤

자고 나면 지 아무리 찢어진 자리서도 새 살 뾔족이 돋응게로."

그러이 사는 이치여.

"자, 나 만동이네로 가서 좀 디다보고 집이로 몬야 갈라네. 야가 잠드는 것 바

감서 나중에 오든지, 여그서 새든지 알어서 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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