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아한 낯빛으로 율촌댁 앞에 마주앉은 사리반댁은, 아짐께서 웬일로 날 다
저문 밤중에 갑자기 사람을 부르시는고, 싶으면서도 짐짓 아무 내색을 안한 채
"어떻게 진지는 좀 잡수겼어요?"
범상한 듯 여쭌다.
"반 술이나 뜬 둥 만 둥 했그만. 자네는 어째, 밥 먹었는가?"
"예 그저."
"춥지?"
"좀 썬득썬득허네요. 암만해도 아직은."
입춘 추위에 선늙은이 얼어 죽느다는 말도 있지마는 엊그제 우수, 경칩 다 지
나고 이제 내일 모레면 청명이 성큼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써그럭써그럭 얼음
기운 끼치는 밤바람은 낡은 풍지를 헤집는다.
부르르르.
문풍지 떠는 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율촌댁이 후루루 마른 어깨를 떠는데, 소
름 돋은 귀밑이 푸리푸릿해 보인다.
사리반댁이 그 안색에 고개를 갸웃한다.
외풍 탓이겠지.
다른 때 같으면야 당연히 화로를 당겨 놓고 손을 쪼일 터이지만, 지금은 상중
이라, 그런 당연조차도 자식으로서는 차마 생각 못할 호사여서 아예 금하고 있
으니, 군불마저 삼간 방바닥은 저녁밥 지은 불끝이 겨우 남아 그런대로 밍밍한
온기가 돌았으나, 앉아 있는 사람은 목덜미 동정 닿는 고대가 썬득할 만큼 방안
에는 냉기가 차 있었다.
"여묘에 비길까, 아무러면."
고드름 매달리게 생겼다고, 방이 찬 것을 염려하던 동서 수천댁한테 율촌댁은
쉰 소리로 핀잔했었다. 며칠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방안이 한데처럼 썰렁한 것은 꼭 불기가 없어서 그런 탓
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무엇인가 심상치 않았다.
"어째 아짐 신색이 영 썽클해 뵈이시네요. 추우신가아... "
사리반댁은 우선 변죽을 울리며 율촌댁 안색을 살핀다. 어른 모시고 사는 것
이 몸에 익은 그네는 상대방 얼굴에 눈썹끝만 움직여도 속마음을 짚어 내는 일
에 남다른 면이 있었다.
"춥기는, 동지 섣달도 아닌데."
율촌댁 음성에 가시가 걸려 있다.
"그럼 어디 안 좋으신가요?"
"그래 보여?"
"그러시단 말씀도 같고요잉."
" 세상살이가 웃을 일이 별로 없네그려."
"왜. 무슨 심기 상허실 일이라도 있으서요?"
율촌댁은 그 말에 대답 대신 윗몸을 사리반댁 쪽으로 바짝 기울여 당기며 입
술을 주름지게 모은다.
동그스름하고 모난 데 없는 사리반댁 얼굴은 낯꽃이 환하여 늘 웃는 빛이다.
어려운 어른 모시고 앉은 자리에서도 범절은 깍듯하지만 어쩐지 그 웃어른한테
는 평온하고 무람없는 느낌을 가지게 해 준다.
"내가 생김새 덕을 봐. 속은 안 그런데."
언젠가 효원의 건넌방에 들러 잠시 담소하던 사리반댁이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날 효원은 사리반댁 아명이 '효덕'이며, 그 두 글자 중에 '덕'자는 그네
의 친정댁 가내노비였던 순덕이의 이름에서 따온 글자라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내가 순덕이 덕짜를 쓰는 사람이라네."
하면서
"이 세상에 순덕이 팔짜를 누가 당하리."
"너는 저 순덕이 팔짜만 닮아라."
"순덕이가 이 세상에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뿐인데, 이미 순덕이한
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
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고 말씀하셨다는 어머니 안어른 이야기도 함께 해 주었다.
"형님 안어버이께오서는 참 크게 개명허셨던가 봅니다."
"개명보다는 체득이지 뭐."
"아무리 그렇단들 사라반이 어디라고, 그 서슬 울타리 안에서 당신 따님 이름
에다 종의 팔짜 닮기를 빌어 순덕이 덕짜 놓고 축망을 하실 수가 있겠소? 어지
간한 사람이라면 생각이야 어떻든 실행에서는 고루를 못 벗는 것이 통례지요."
"그러까아?"
"아무럼요."
"하기는 그렇기도 할 것이네. 사리반이 달리 사리반인가? 그게 본디 비내라,
사립안. 왜 그렇게 부르는고. 조선조 말에 우리 입향조께서 이 마을로 들어와 자
리를 잡으신 연후에, 도덕이 드높고 학문이 빛나서 그 후손들이 창성하니, 인근
에 칭송이 자자하고 기백은 푸르러, 권세와 명리, 호사와 화미에 물들지 않는 선
비으 기상을 대쪽같이 세우실 때. 마을 변두리에다 비잉 둘러 울타리 담을 친
뒤 경계를 삼고 출입구로는 오직 사립문을 하나 커다랗게 만들어서, 동성종족이
아닌 타족들은 드나들 수만 있을 뿐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살지는 못하게 했다네."
"자긍이겠지요."
"엄청난 편벽 배타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 사립문 울안에 사는 종족
들끼리는 누구나 한집안마냥 우애하고 서로서로 북돋아서, 도둑도 없고 다툼도
없고 부녀자 행실은 명경 같은데 서당에는 글 읽는 소리 그칠 날 없었대."
"그래서 사립안이구료."
"그래. 그래서 모두들 사립안이라고 불러. 그 마을을. 그런데, 그래서 우리 안
어른께서는 더 답답우셨겠지. 세월은 길고 천지는 광활하여 안팎 조화가 무쌍하
건만, 여인의 몸으로 나서 그 운명에 이미 굴레 많은데다가, 양반, 양반, 차꼬 차
고, 그것도 모자라 울타리까지 두른 마을 대쪽 같은 사립안으로 시집을 오셨으
니. 내 생전에 과연 저 사립문을 몇 번이나 나가 볼 수 있을 꼬. 싶으시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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