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반댁이 놀라서 되묻는다. 그것은 뜻밖의 말이었던 것이다.
"나도 참 아니할 말로, 며느리 문짜 좀 빌려 써야겠네. 그 정황은 사리반 조카
한테 직접 물어 보소."
"예?"
"얼마나 경천을 할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해 다 저문녘에 두 사람이
저 뒤안 후원에서 수군수군, 볼상도 사납고 남의 입살에 오르내리기 똑 좋게, 밀
모 꾸미는 역적들마냥, 나 들을까 겁냈던가 숨조차 죽이고는, 무슨 말 주고받더
니, 그만 혼절을 할 뻔했다네. 쓰러지다 말었어. 아까."
"누가요?"
"누구겄는가."
그럴 일이 아니었으나, 사리반댁이 냉큼 말꼭지를 딸 것 같지 않은데다가, 아
까부터 내내 참고 있던 분이 비꼬여 율촌댁은 효원에 대한 언급을 터뜨리고 말
았다. 그러면서도 이런 식으로 며느리 말을 터뜨리는 것은 시어미 체통이 구겨
지는 행신이라, 손아래 사람 보기가 민망하여 다시 부아가 치민다. 그네는 하마
터면
"둘이서 양손을 부여잡고, 쓰러지네, 부축하네, 참 어디다 옮길 수도 없는 작태
를 벌이더라."
는 말까지 토할 뻔했던 것이다.
천하 못된 것 같으니라고.
제가 나를 옳게 시에미로 대접하여 어른답게 여기는 마음이 눈꼽쟁이 꼬물만
치만 있었더라도 그처럼 대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렇게 안 대했다면 내가 이런
구차스운 자리를 갖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어? 어머님. 자세한 말씀은 사리반서방님께 직접 들으서요? 그게 나으실 것
같그만이요? 그래, 무엇이 낫단 말이냐. 내가 내 얼굴을 스스로 깎는 이 무렴봉
욕이, 네 눈에는, 네가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주는 것보다 나을 성싶었더냐?
이 무슨 망신스러운 꼴이란 말인가. 이 몰골은 부모로서 자식의 소식을 비럭
질하거나 강탈하려는 형상이 아니고 무엇일꼬. 집안에 소식 알고 있는 사람을
놓아 두고. 이게 다 흉이지, 흉.
이러한 사실들이 다시금 역정스럽다.
그토록이나 애간장이 마르고 녹도록 기다리고 기다려온 금지옥엽 내 자식의
소식을 드디어 듣게 된 마당에 어째서 반가움 대신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것
일까.
"그럼 아짐께서 그 연유를 바로 물어 보신단 말이지, 왜?"
나를 불러 간접으로 묻느냐는 사리반댁 시선이 율촌댁을 찌를 때, 그네는 후
끈 끼치는 수모를 구름같이 뒤집어 썼던 것이다.
"말을 안해. 함봉을 하고."
겨우 그 토막을 밀어낸 율촌댁의 눈썹끝이 바늘 빛을 띤다.
"사리반 조카도 그러는 게 아니야. 본데 있는 집안의 반듯한 자손이 위아래도
구분없이, 정작 소식을 들어야 할 어미는 젖히고, 남으 집 며느리와 쑥덕쑥덕 공
론하는 태도가 대관절 무엇이며, 어디서 보고 배운짓인가. 동계어른 그러실 분이
아닌데 동경으로 유학간 것이 탈이었던 모양이구먼. 신식은 그런 것인가 보아,
그러고 자네도 마찬가지야. 부창부수라더니, 나한테 그리 대하자고 둘이서 약조
했는가?저 애는 여기서 더 거론할 것도 없고."
비늘이 떨리며 파랗게 곤두서는 율촌댁 음성이 콱, 단호하게 날을 내리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능멸하려거든 마음대로 해. 허나, 그게 아니라면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해
주게."
느닷없이 단도 맞은 사람처럼, 가슴팍이 패이게 꽃히는 말을 뽑지도 받지도
못한 채 두 손을 모아쥐고 엉거주춤하는 사리반댁을, 율촌댁은 눈 깜박도 안하
고 쏘아본다.
"아이고, 제가 무얼 알아야지요."
사리반댁은 형체 없는 안개를 휘어잡아 끈을 꼬고 가닥을 추리려는 것이나 마
찬가지인 이 추궁 앞에,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인지 올바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피할 수만은 없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저 대강
겉놀림으로, 무난한 안부나 몇 말씀 전해 드리고 말기에는 앞서의 일이 예사롭
지 않았다는 것도.
더욱이나 지금 율촌댁은
"능멸."
이라는 격어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 그 경위를 알 수는 없으나 효원이 혼절해서 쓰러질 뻔했다면 틀
림없이 남편한테서 '그 소식'을 들은 것이 분명한데, 결국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차이일 뿐이지, 미구에 곧 밝혀지고 알려질 일이 아니랴. 어쩔 수 없다.
달이 차면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다. 허나, 섣불리 앞당겨 발설할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선후 가리지 않고 몰리듯이 뱉은 말이 집안 분란 일으키는 불씨를 만
들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정녕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네."
율촌댁은 이제 음성을 싸늘하게 내리깔았다.
"아, 아니어요. 아짐. 무슨 말씀을... 그저... 저... 오유끼가요."
"오유끼?"
"예."
"그것이 거기를 따라갔더란 말인가?"
질리는 율촌댁 얼굴에 순간 실망과 배반감이 역력히 떠오른다.
"예. 동행해서 갔던가 봅니다."
"처음부터여, 아니면 나중에 전갈을 받고 찾어서? 어떻게 같이 갔다는 게야?"
"대실서방님이야 어디 처음부터 데리고 가실 생각 허셨을라고요? 전주에 두고
가시려는 걸 눈치채고는 기어이 따라갔겠지요."
에미는 헛껍데기였구나.
주저앉는 마음의 한쪽이 허물어진다.
율촌댁은 정말로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벌린 입을 못 다무는 율촌댁 숨줄을 타고 사리반댁 전하는 말들이 우우 밀려
들어가 연기 자욱하게 부풀면서,율촌댁의 배는 만삭보다 더 무겁게 차 올랐다.
그배가 그네의 오장을 짓누른다.
사리반댁도 짓눌린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8권 (1) (0) | 2025.01.19 |
---|---|
혼불 7권 (51, 完) (0) | 2025.01.18 |
혼불 7권 (49) (0) | 2025.01.14 |
혼불 7권 (48) (2) | 2025.01.12 |
혼불 7권 (47) (0) | 2025.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