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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49)

카지모도 2025. 1. 14.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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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짜있는 가문에 우여곡절 손 귀한 집 증손을 자식으로 두었으면, 의당 어미

로서 올바러게 훈계하고 허물없이 길렀어야 옳을 일이나, 내 그러하지 못하였어.

성례까지 한 자식이, 그뿐인가, 저 또한 아들이랑 낳은 몸이 이도 저도 다 버리

고, 부모도 조상도 다 버리고 어느 한 밤 야반도주를 해 버렸으니."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꼬.

제 미어지는 간장을 생각하면, 어미 간장은 녹아도 못 당하겠지.

"이 지경이 되고 나서 일변 남의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부끄러운 마음에도 세월이 덮이면 이끼가 끼는가, 이제는 염치

조차 없어져서 그저 다만 애가 닳고 보고 자울 뿐."

그런데 이제는 드디어 소식줄을 잡았다...

복받치어 가누기 어려운 심정을 어금니로 누르는 율촌댁 눈시울에 붉은 눈물

이 맺힌다.

"내가 남들같이 순탄하게 자식을 둔 것도 아니었네. 자식 안 귀한 에미가 어디

있을까마는 참말로 내게로나 집안으로나 문중으로나 여늬 아들과는 달라서 내

딴에는 공도 많이 들였는데. 이렇게 소식 한 자 못듣고 살면서도 때 되면 밥 먹

고 때 되면 잠 잤어. 무정한 에미지. 허나 나도 매인 몸이라, 핑계 같지만 어쩔

수 없었네. 만일에 소코리 장수나 팔도거지 동낭치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어디에

고 그 아이 있다는 말 그저 싸래기 반 토막만 얻는대도 내가. 가다가 닳아져서 죽

는 한이 있을망정 걸어 걸어서 찾아갈 것만 같등마는."

마음 맺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율촌댁 음성이 아래로 가라앉고, 그 목소리를

따라 사리반댁은 점점 더 고개가 난감하게 수그러진다.

대실서방님 소식을 들을랴고 나를 부르신 게로구나.

어찌할꼬.

"자네는 소견도 남다르고 미덥기도 해서, 내가 체신 없이 오밤중에 오라가라는

했네만, 꼭 좀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쪽으로 턱을 바짝 내미는 율촌댁 기색에 사리반댁이 고개를 든다.

"말씀 하시지요."

"사리반 조카가 만주로 해서 왔다는 말을 들었네."

"그랬다는그만요."

"가아를 만나고 왔다면서?"

"봉천에 일부러 갔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들 우애가 크면서부터도 자별했었지... "

"두 분 어버이 문후 소상히 여쭙고, 가내 식솔이며 문중 어르신들과 일가 친지

의 안부도 하나 하나 지성으로 묻고요, 마을 일들도 몹시 궁금해하더랍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본시 자상하고 유순한 사람이."

말을 꺾는 율촌댁의 목이 메인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다던가?"

부모는 항상 자식의 몸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염려한다. 혹 무슨 몹쓸 병에라

도 걸리지 않았는지, 율촌댁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무래도 아까 효원의 거동이

흉참한 소식 접한 사람의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다행히 사리반댁은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어쩌고 있다던고... ?"

"뜻이 있어 떠난 길이라 각오가 단단하고, 공부에도 열심이어서 집으로 돌아올

날이 머지 않을 것이라고도 하고요."

"그건 자네가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겉자락 말일 게고, 다른 말 들은 것이

또 있을 것이네. 무슨 소리라도 좋으니 들은 대로 일러 주어. 대관절 어쩌고 있

다던가."

다그쳐 묻는 율촌댁 기세에 순간 난색이 지나가는 사리반댁 눈빛을 놓치지 않

은 율촌댁이 어느결에 한 무릎 다가앉는다. 그 무릎이 하도 절실해서 마치 사리

반댁 고삐를 조이는 것 같았다.

"제가 무얼 알아야지요."

"나도 다 짚이는 것이 있고 짐작이 있어. 자네는 필시 무얼 알고 있을 것이네."

"아이고, 어제 온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어디 뭐 이야기할 틈이나 있었기에요?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 걸요."

"자네 내외 정리가 도타운 것을 믿고 내 묻는 말이니 돌이 말고 말해주어. 조

카가 알고 질부가 알고 며느리가 아는 일을. 정작 에미는 모르고 있어야 옳단

말인가. 꼭? 자네들이 싸잡아서 동아리져 나를 이렇게 농판 만들고 따돌려야만

속이 시원허겄어?"

"며느리가 알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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